통일신라시대의 토기의 특징은 토기 그릇의 표면에 도장 무늬[印花文]를 장식하는 것이다
도장 무늬 토기는 삼국시대에도 일부 나타나고 있지만 통일신라 이후에는 그릇의 표면 전체에
도장 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신라가 가야를 병탄했던 6세기 중반 [眞興王 재위 540~576년 ] 고구려 백제의 돌방 무덤이
신라 慶州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높은 굽의 접시 굽다리 접시의 다리가 짧아지고 넓어지며 네모 마름모 모양의 구멍은 작아진다
또한 그릇 표면에 녹색 [綠色]유약을 바른 녹유 [綠釉]토기가 만들어지는데
녹유는 백제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
[ 전북 고창 익산 6세기 중반 충남 청양 7세기 전반 ]가 남아 있다
중국의 8세기 녹유 [綠釉 도기가 신라 慶州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
중국이나 백제로 부터 녹유[綠釉 ]도기 기술이 신라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시대 신라 토기
통일 신라시대 토기
도장 무늬의 유약을 바른 녹유 토기
그런데 녹유는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다고 하여 음식을 담는 용도 등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토기로는 만들지 않고 장식품이나 뼈 항아리 [骨壺] 용도의 토기를 제작하였는데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보인다
뼈 항아리 [骨壺]
뼈 항아리가 등장한 것은 신라사회에 불교가 정착하면서 불교식 화장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신라 법흥왕 [재위 514 ~540년 ]代에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토착종교를 믿고 있었던
신라인들은 불교를 수용하는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차돈의 순교 갈등을 격은 후 527년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뼈 항아리는 사람의 시신을 화장한 후에 유골을 담고 묻는 것인데
초기 뼈 항아리는 일반 토기를 사용하였으나 차츰 전용 항아리가 제작 되었는데
8세기 이후는 도장 무늬 등 다양하고 화려한 무늬가 베풀어졌으나
9세기 이후는 무늬 없는 뼈 항아리가 主流를 이룬다
통일 이후 시대 토기는 불교식 화장이 유행함에 따라 무덤 부장품의 신발 등잔 기마인물형 오리
등 삼국시대에 비해 다양한 토기가 발굴되지 않는다
굽다리 접시 손잡이 잔 그릇 받침대 등 가야 신라만큼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던 나라는
인류역사상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
統一新羅時代の土器の特徴は土器器の表面に道場柄[印花文]を飾ることだ
道場柄土器は三国時代にも一部現われているが統一新羅以後には器の表面全体に
道場柄を飾っている
新羅が伽揶を併呑した 6世紀中盤 [真興王 在位 540‾576年 ] 高句麗百済のドルバング墓が
新羅 慶州に入って来ながら土器にも新しい変化が現われた
高いかかとのお皿焼くお皿の足が短くなって広くなって四角菱形模様の穴は小くなる
また器表面に緑 [緑色]上薬を塗った ノックユ [緑釉]土器が作られるのに
ノックユは百済私費時代に あたる時期に 陶器徒弟品を製作した窯の焼き跡
[ 全北コチャン益山 6世紀中盤忠南青陽 7世紀全般 ]が残っている
中国の 8世紀ノックユ [緑釉 陶器が新羅 慶州で出土されることで見て
中国や百済からノックユ[緑釉 ]陶器技術が新羅に伝わっていたと推定される
三国時代新羅土器
統一新羅時代土器
道場柄の上薬を塗ったノックユ土器
ところでノックユは人体に有害な成分があると言って食べ物を盛る用途など日常生活に使う
土器では作らないで飾りや骨かめ [骨壷] 用途の土器を製作したがうちの先祖たちの
知恵が見える
骨かめ [骨壷]
骨かめが登場したことは新羅社会に仏教が定着しながら仏式化粧が流行ったからだ
新羅法興王 [在位 514 ‾540年 ]代に仏教が伝来されたが土着宗教を信じていた
新羅人たちは仏教を収容するのに易しくなかったようだ
イチァドンの殉教葛藤を柄は後 527年仏教を公認するようになる
骨かめは人の死体を化粧した後遺骨を盛って問うことなのに
初期骨かめは一般土器を使ったが徐々に専用かめが製作になったが
8世紀以後は 道場柄など多様で派手な柄が施されたが
9世紀以後は 柄ない骨かめが 主流を成す
統一以後時代土器は 仏式化粧が流行るによって墓副葬品の履き物燈巣騎馬人物型鴨
など 三国時代に比べて多様な土器が発掘されない
焼くお皿取っ手杯器支柱など伽揶新羅位多様な土器が製作された出なさいという
人類歴史上その例が珍しいと言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