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단순한 추정 자료입니다. 조선에서는 金忠善의 활동 기록이 사실적으로 남아 있지만,
일본에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여러 추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볍게 보시는 겁니다. 맹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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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는 사야가가 전국시대때 존재했던 일본 최강의 철포부대원 중, 한 인물이라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잘 쏘는 여러개의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 중, 최강의 철포부대는 바로 와카야마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철포부대. 이 부대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은 독립집단 으로, 최고의 명사수들이었다. 바로 이 사이카부대에 사야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사카 지로 : 총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총도 그렇지만, 화약의 조합도 그렇다. 그런 것들이 조선에 전수된 것을 볼 때, 사야가는 사이카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던 마을 이름을 따, 잡하, 일본발음으로 사이카라 불렸는데 사야가와 발음이 흡사하다. 석산군기(사이카들의 전투를 묘사한 책), 이 책에는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아래 그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사카지로는 바로 이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 주장한다.
고사카 지로 : 스즈키 마고이지로라는 이름이 진짜 이름인데, 밖에 나가면 전부 사이카라고 불렀다.
실제, 스즈키는 당시 조선에 출병했고, 이후 그의 흔적은 일본 땅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고사카 지로 :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조선침략의 출병지 나고야까지 100명을 데리고 갔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겨버린다. 마고이치로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남아있는데, 그만 홀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 사이캬집단이 살았다는 사이카부락, 사이카라는 마을 이름은 아직까지 그 지방에 남아있었다. 와카야마성, 이 곳이 사이카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면, 그는 왜 조선에 투항했을까?
고사카 지로 : 주요 간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그 식량을 노리고 이 일대에 불을 질렀는데, 그 당시에는 대단했다. 움직이는 것은 개도 죽였다.
일본전역에 맹위를 떨치던 최강의 철포부대인 사이카집단은 전쟁 발발 7년 전, 히데요시군에 의해 초토화됐다. 사이카가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부하던 영주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이유였다. 멸망한 사이카집단은 부락을 떠나, 전국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사야가가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라면,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수였다는 모하당문집의 기록에 위배된다. 스즈키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장수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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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한 장수였다고 주장하는 교수가 있다. 마루야마 교수. 그는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장수 하라다노부타네라는 새 학설을 발표했다.
마루야마 교수 : 가토 기요마사의 출정군인에 대한 일람표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사야가가 될 수 없다. 전사했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중에서 조사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니까, 사야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남은 인물이 하라다 노부타네였다. 본묘사는 가토 기요마사가 전쟁 후,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바로 이 절 안에, 가토 기요마사군대의 진립서가 보관되어 있다. 이 진립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출병 1년 전에 작성한 것으로, 조선침략시 출병할장수 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마루야마 교수 : 가토 기요마사의 진립서는 1592년 가토 기요마사가 제2진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해서, 조선에 상륙하는데 그때 가토 기요마사 쪽의 군진을 나타내는 그런 자료이다.
과연 사야가라는 이름은 있을까? 그러나 무장들의 명단에서 사야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라다 노부카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진립서에 쓰여져 있는 여력(○力, 다른 곳에 있는 부대로서 유력한 장군에게 협력해주는 부대). 하라다 노부타네는 바로 이 여력부대에 속해 있었다.
마루야마 교수 : 여력에 속한 이름들은 여기서는 안쓰고 있다. 여력을 조사해보면, 여력의 맨 처음에 실려있는 이름이 하라다 노부타네(사야가)다.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여력부대 명단. 무사들의 이름 맨 위에,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하라다 가문의 족보에도,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선에 출병한 기록이 나와있는데, 출병 후 그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에서 죽었거나, 혹은 투항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하라다가 조선출병 전, 직접 작성한 자신의 부대구성원명단. 거기에 그는 자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야가가 전수했다는 조총기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은서사문서는 그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그의 조선출병 부대원 중,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투항했다면, 조총기술을 조선에 전수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라다 가문이 살았던 마에바루시. 그곳에 하라다가문이 세운 절이 남아있다. 절 안에는 하라다 집안의 묘지들이 있다. 그런데 하라다 노부타네의 묘지는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다. 하라다가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족보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하라다 가문은 대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군에 의해 정벌 당하고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예속됐다.
전국통일을 꿈꾸던 히데요시가 큐슈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라다 가문이 희생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국통일과정에서, 하라다뿐 아니라, 많은 반 히데요시세력을 만들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인 하라다가 조선에 투항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성에 3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반란을 대비해, 이 곳에 전국, 영주의 아내들을 인질로 데려다 놓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의 야심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과 무사들은 조선침략을 반대했다.
사지마 아키꼬 (후쿠오카 여학원 대학 인문학부) 교수 : 영주들은 히데요시로부터 명령 받은 군인들, 전쟁에 참가해야 할 사무라이들을 모을 수가 없었다. 사무라이들이 가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군인들을 출전시키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있다가 히데요시로부터 처벌받은 영주들도 있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들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고야 성 안에는 반란자들의 아내를 처형하는 처형장 자리가 남아있다.
나카자토 노리모토 (향토사학자) : 히데요시는 반란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사츠마와 시마즈의 유력한 가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것에 대해 프로이스라는 선교사가 편지를 로마에 보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 반란자의 처가 나고야성에 인질로 있었는데 그들은 못박혀서 불태워진다.
나고야성에서, 반 히데요시 세력들도 억지로 조선에 출병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싸울 명분이 없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인 장수 사야가, 그는 출병 전 이미 투항을 결심한 것이다.
re:sumatera //要請した
これは単純な推定資料です. 朝鮮では 金忠善の活動記録がリアルで残っているが,
日本では記録が残っていないです. したがって日本では多くの推定が出ています.
軽く見るはずです. 盲目的に見るのではない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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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坂地ではサヤがが戦国時代時存在した日本最強のチォルポブデワン中, 韓人物だから主張した.
当時, 日本には弔銃を直接製造して, よくうついろいろなチォルポブデがあった. そのうち, 最強のチォルポブデはすぐ和歌山県の ¥"サイカ¥"だと呼ばれるチォルポブデ. この部隊は領主に隷属しなかった独立集団で, 最高の名射手たちだった. まさにこのサイカブデにサヤががあったというのだ.
小坂支路 : 鉄砲を作るということは相当な技術を要する. 鉄砲もそうだが, 火薬の組合もそうだ. そんなものなどが朝鮮に伝授されたことを見る時, サヤがはサイカであるでしょう.
彼らは, 自分たちが住んでいた村名をつけて, ザブハ, 日本発音でサイカだと呼ばれたがサヤがと発音がそっくりだ. 石山軍旗(サイカドルの戦闘を描いた本), この本にはサイカブデの大将Suzukiマゴイチで(下の絵)の姿が描かれている. 小坂誌ではまさにこのSuzukiマゴイチでがサヤがだと主張する.
小坂支路 : Suzukiマゴイジロという名前が本当の名前なのに, 外に出れば全部サイカだと呼んだ.
実際, Suzukiは 当時朝鮮に出兵したし, 以後彼の跡は日本地どこにも残っていない.
小坂支路 : Suzukiマゴイチでは朝鮮侵略の出兵誌名古屋まで 100人を連れて行ったがその後では消息が切られてしまう. マゴイチで以外の他の人々は残っているのに, つい忽然, 消えてしまったのだ.
当時サイキャジブダンが暮したというサイカブラック, サイカという村名前はいまだにその地方に残っていた. 和歌山性, こちらがサイカの本拠だった. ところでサイカブデの大将 Suzukiマゴイチでがサヤがなら, 彼はどうして朝鮮に投降しただろうか?
小坂支路 : 主要幹部たちはあちこち散らばっていた. そのため (秀吉が) その食糧を狙ってこの一帯に火をつけたが, その頃にはすごかった. 動くことは犬も殺した.
日本全域に猛威をふるった最強のチォルポブデであるサイカジブダンは 戦争勃発 7年前, 秀吉君によって焦土化された. サイカが秀吉の支配を拒否した領主と親密な関係だったという理由だった. 滅亡したサイカジブダンは部落を発って, 全国にばらばらと散らばった. ところが, サヤががサイカブデの大将Suzukiマゴイチロなら, サヤがが加藤紀要マーサの先鋒長寿だったという暮夏当たり文集の 記録に違背される. Suzukiは加藤紀要マーサの部下大将ではない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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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サヤがが加藤紀要マーサ旗下の一長寿だったと主張する教授がある. Maruyama教授. 彼はサヤがが, 加藤紀要マーサ旗下の長寿ハラダノ−ブタネという新しい学説を発表した.
Maruyama教授 : 加藤紀要マーサの出征軍人に対する一覧表をよく見たが, その中から, 終わりまで生き残った人はサヤががなれない. 戦死したとか, 行方不明になった人の中で調査した. 何故ならば終わりまで生き残った人は故郷に帰るから, サヤがではないからだ.
そうして残った人物がHaradaノ−ブタネだった. 本描写は加藤紀要マーサが 戦争後, 自分のお父さんを称えるために建てた祠堂だ. まさにこのお寺の中に, 加藤紀要マーサ軍隊のジンリブソが保管されている. このジンリブでは加藤紀要マーサが朝鮮出兵 1年前に作成したことで, 朝鮮侵略の時ツルビョングハルザングスらの名簿を記録しておいたのだ.
Maruyama教授 : 加藤紀要マーサのジンリブでは 1592年加藤紀要マーサが第2陣で名古屋性を出発して, 朝鮮に上陸するのにあの時加藤紀要マーサの方の軍陣を現わすそんな資料だ.
果してサヤがという名前はいるか? しかし武将たちの名簿でサヤがの名前は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 Haradaノ−ブカのやっぱり見えなかった. ジンリブソに使われている余力(○力, 他の所にある部隊として有力な将軍に協力してくれる部隊). Haradaノ−ブタネはまさにこの余力部隊に属していた.
Maruyama教授 : 余力に属した名前たちはここでは使わない. 余力を調査して見れば, 余力の最も初めに積まれている名前がHaradaノ−ブタだね(サヤが)だ.
加藤紀要マーサ旗下の余力部隊名簿. 武士の名前マン上に, Haradaノ−ブタネという名前が書かれている. Harada家門の系図にも, Haradaノ−ブタネが朝鮮に出兵した記録が出ているのに, 出兵後彼が消えたという記録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朝鮮で死んだとか, あるいは投降した可能性を言ってくれる.
ハラに朝鮮出兵の前, 直接作成した自分の部隊構成員名簿. そこに彼は自分が豊臣秀吉の命令を受けて, 朝鮮を征伐するために海を渡ると記録している.
それならサヤがが伝授したという弔銃技術はどんな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るか? ウンソ査問ではその疑問を解いてくれている. 彼の朝鮮出兵部隊員中, チォルポブデがあった. 彼らを連れて投降したら, 弔銃技術を朝鮮に伝授する可能性は十分だ.
Harada家門が生きたマエバルシ. その所にHarada家門の立てたお寺が残っている. お寺の中にはHarada家の墓地たちがある. ところでHaradaノ−ブタネの墓地はこちらで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 ハラに朝鮮から帰って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系図の記録を裏付けてくれるのだ. 戦国時代に, Harada家門は大領土を持っていた. しかし秀吉君によって征伐あって加藤紀要マーサ旗下で隷属した.
全国統一を夢見た秀吉が九州地方を占める過程で, Harada家門が犠牲されたのだ. 秀吉は全国統一過程で, Haradaだけではなく, 多くの半分秀吉勢力を作った. 反秀吉 勢力であるハラに朝鮮に投降する可能性は十分なのだ.
豊臣秀吉は朝鮮侵略のために, 名古屋性に 30万大軍を集結させた. そして反乱を備えて, こちらに全国, 領主の妻たちを人質にやけどしようとしたがおいた. 身近の脅威を感じるところにも, 秀吉は大陸征伐の野心を具体化させた. しかし多い領主たちと武士は朝鮮侵略を反対した.
買うなアキコ (福岡ヨハックワン大学人文学部) 教授 : 領主たちは秀吉から命令受けた軍人たち, 戦争に参加しなければならないさむらいたちを集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さむらいたちが行きたがらなかったからだ. 豊臣秀吉の命令でさむらいたちは戦争に出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 軍人たちを出場させないでしも篭っていている途中秀吉から処罰された領主たちもあった.
反秀吉勢力たちは, 実際反乱を起こしたりした. 名古屋城の内には反乱者たちの妻を処刑する処刑場席が残っている.
ナカザト老吏モットー (郷土史学者) : 秀吉は叛軍を恐れていた. それが事実になって起きたのだ. サツマとシマズの有力な家臣が反乱を起こす. それに対してプロイスという宣教師が手紙をローマに行かせたりした. それを見れば, 反乱者の妻家名古屋性に人質でいたが彼らはめりこむ事ができなく燃やされる.
名古屋性で, 反秀吉勢力たちも無理やりに朝鮮に出兵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しかし彼らには争う名分がなかった. 反秀吉勢力である長寿サヤが, 彼は出兵の前もう投降を決心した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