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韓国の植林

일본인들은 한국의 식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한말의 민둥산을 놓고 여러 가지 험담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만
한일 양국의 식림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 보고자 합니다.
日本人たちは韓国の造林について関心が多いようです。
旧韓末の禿山を置き、さまざまなうわさ話を連ねていますが
日韓両国の造林について簡単に見てみたいと思います。

天下泰平の時代が終わり明治維新を迎えると、政治的混乱の中、至るところで官林の盗伐や民林の乱伐が行われ、再び里山の森林が荒廃へ向かいました。
その後、社会の安定とともに山林保護規制が課せられ、国や民間による造林も盛んに行われて徐々に回復。
1929年には造林推奨規則が公布され、初めて私有林まで補助対象を拡大するといった動きもありました。
천하 태평의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면, 정치적 혼란 속에 곳곳에서 官林의 盗伐들과 백성 숲 乱伐을 해 다시 산의 숲이 황폐화로 향했습니다.
그런 사회의 안정과 함께 산림 보호 규제가 부과되고, 국가와 민간에 의한 조림도 활발히 행해지고 서서히 회복.
1929 년 조림 권장 규칙이 공포된 처음 사유 숲까지 보조 대상을 확대하는 움직임도있었습니다.

 

笠取山荒廃の様子・大正11年(1922)
(※8)東京多摩川の水源地、笠取山荒廃の様子(1922年)
 笠取山 유린의 모습 다이쇼 11 년 (1922)
(※ 8) 도쿄 타마 수원지, 笠取山 유린의 모습 (1922 년)

ところが、1941年に太平洋戦争が始まると、大量の木材や木炭が必要となり、平地林は造船・建築・杭木・薪炭用材としてことごとく伐採され、
奥山の国有林からも軍需造船用材その他に用材として多くの大木が伐られました。最終的には、風致林、社寺林、防風林、そして幼齢林まで伐採。
全国各地の山が禿げ山と化したそうです。
그런데, 1941 년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나무와 목탄이 필요 평지 숲은 조선 건축 말뚝 나무 薪炭 재료로 모조리 벌채되고
오쿠 야마의 국유림도 군수 조선 재료 기타 재료로 많은 대목이 伐ら되었습니다. 결국, 풍치 림, 사찰 숲, 방풍림, 그리고 어린 나이 숲까지 벌목.
전국 각지의 산이 대머리 산으로 변해 버린 것 같습니다.

終戦後、全国各地でそれまでなかったような大水害が発生し、これらを阻止すべく荒廃林地への植林が国家再建の重要課題に。
そして、1950年、緑化運動推進母体として「国土緑化推進委員会」結成。森林資源を造成し、国土の保全と水源かん養を図り、生活環境の緑化が推進されました。
종전 후 전국 각지에서 그동안 못했던 큰 수해가 발생하고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황폐 임지에 조림이 국가 재건의 중요 과제.
그리고 1950 년, 녹색 운동 추진 모체로서 "국토 녹화 추진위원회"결성. 산림 자원을 조성하여 국토의 보전과 수원 함양을 도모하고 삶의 녹화가 추진되었습니다.

일본의 에도시대와 그 이전의 식림 사례는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입버릇 처럼 홍수와 가뭄 방지를 위해 造林에 힘썼다고 주장하지만 에도시대에는 벌목을 금지했던 것만 눈에 띄고 그나마 造林에 대한 흔적은 농사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日本の江戸時代とそれ以前の植林のケースは、なかなか見つけて入手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日本人たちは口癖のように洪水と干ばつの防止のための造林に力使ったと主張するが、江戸時代には伐採を禁止していただけで目立ってそれさえも造林の痕跡は、農業と関連がなく見えます。

한국의 사례를 두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韓国の事例を二つ挙げてみましょう。


 

함양咸陽) 상림(上林)은 함양읍의 서쪽에 있는 위천(渭川)강가에 있는 숲으로서,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고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咸陽の上林は咸陽の西にある渭川 沿いにある森林で、統一新羅 眞聖女王(在位887〜897)の時に崔致遠先生が咸陽の洪水被害を防ぐために造林したと伝えられている。
昔は大馆林と呼んだが、この森の真ん中の部分が洪水で崩壊に伴い、上林,下林に分けられた。現在、下林は毀損されて跡だけ残っていて上林だけが昔の姿を保っている。

 

국립수목원은 광릉숲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애초 이 터는 신숙주(1417∼75)의 묘 자리였으나
세조가 자기 묏자리로 썼다. 1468년 6월 세조와 왕비 윤씨가 여기에 묻히자 조선 왕실은 ‘광릉(光陵)’이라 이름 붙이고,
광릉을 중심으로 사방 15리(약 5.9km)에 이르는 숲을 능림(陵林)으로 지정해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때부터 광릉숲은 금림(禁林)이 됐다. 500년이 넘도록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난 숲은 식물학자가 말하는 ‘극상림’의 경지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 스스로 완성된 생태계를 구축한 안정된 숲이 극상림이다. 그 원시의 숲 생태계가 서울시청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다.
国立樹木園は、グァンルンスプ真ん中に位置している。当初、このデータは、申叔舟(1417〜75)の墓の敷地だったが、
世祖が自分の墓の敷地で使った 。 1468年6月、世祖と王妃 尹氏がここに埋もれる朝鮮王室は光陵と名付けて、
光陵を中心に、四方15里(約5.9km)に及ぶ森林を陵林に指定して出入りを厳格に統制した。
この時から光陵林は禁林となった。 500年以上にわたり、人間の干渉から外れた森は、植物学者が言う極上林の境地に至った。
長年自分で完成された生態系を構築し、安定した森林が極上林である。その生の森の生態系が、ソウル市庁からわずか一時間の距離にある。世界でも珍しい事例だ。

조선시대에 식림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때때로 민둥산이 많아졌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취사 난방 목적의 연료 사용을 꼽을 수 있겠지만 연료용의 목재는 가까운 산의 가지나 직경이 가는 잡목을 사용했으므로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일시에 민둥산으로 만드는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첫번째, 병선을 만들 목적으로 소나무를 많이 심었기에 蟲害가 극심했습니다.
두번째, 火田에 의한 산림의 훼손이 극심했습니다.
세번째, 사냥을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는 것
朝鮮時代にシクリムエ多くの力を注ぎま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朝鮮王朝実録には、時々禿山が多くなったという記録が登場します。
その理由を要約すると、炊事暖房のための燃料の使用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が、燃料用の木材は、近くの山の種類がありますが、直径が行く雑木を使用したので、思ったよりも被害が大きくていません。
一時的に禿山にする要因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
最初、兵船を作成する目的のためにパンをたくさん植え機に虫害が深刻です。
第二に、火田による森林の破壊が深刻です。
第三に、狩りのために山に火をつけたということ

조선왕조실록에서 근거를 찾아 봅시다.
朝鮮王朝実録の根拠を見つけてみましょう。

농사에 산림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農業への森林の重要性を記録しています。

태조 8권, 4년(1395 을해)
“勸農之要, 在築堤堰。 守令皆帶勸農之職, 而不急乎此。 堤堰者, 所以備旱潦也。 乞下都觀察使, 令州府郡縣, 擇其鄕閑良、品官廉幹者, 定爲勸農官, 當秋冬交, 修築堤堰, 以瀦雪水, 務要堅緻, 無或漏洩。
“농사를 장려하는 중요한 일은 제언(堤堰)을 쌓는 데에 있습니다. 수령들이 모두 권농하는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여기에 힘쓰지 않으오나, 제언이란 가뭄과 장마를 방비하는 것이오니, 도관찰사에게 명을 내리시어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하여금 그 고을의 한량(閑良) 품관 중 청렴하고 일 잘 보는 사람을 골라서 권농관(勸農官)으로 정하게 하고, 〈농한기인〉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언을 수축해서 눈 녹은 물을 모아 두게 하되, 단단하고 치밀하게 하는 데 힘써서 새는 일이 없게 하소서.
山林茂密, 然後地氣滋潤, 旱不爲災, 收拾橡實, 可備凶年。 無賴之徒, 耽于田獵, 輒縱火焚, 尤可痛心。
산림이 무성한 뒤에 땅 기운이 윤택해서 가물어도 한재가 덜하며, 상수리를 주워서 흉년을 방비할 것입니다. 무뢰한 무리들이 전렵하는 것만 탐을 내어 산에다가 불을 놓으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산림을 점검하고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로 나누어 맡아 보게 하여, 만일에 불을 놓는 자가 있으면 즉시 와서 알리어 중한 죄로 벌하게 하고,
 
성종 263권,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3월 4일(갑술) 3번째기사
봄철에 산림에 불지르는 일을 금하고, 수령이 되기를 피하지 못하게 하다
御晝講。 右副承旨曹偉啓曰: “方春風亂草枯, 火之延爇甚易, 山無草木, 則泉源枯渴, 有害於農, 方草木生長之時, 守令從而焚林以獵, 民又火而耕之, 以此材木亦乏, 非細故也。 請立法禁之。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위(曹偉)가 아뢰기를,
“이른 봄에는 바람이 어지럽게 불고 풀잎이 말라 있으므로, 산불이 번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산에 초목(草木)이 없으면 물줄기의 근원이 마르게 되므로, 농사(農事)에 해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초목이 생장(生長)할 시기에 수령(守令)들이 산림(山林)에다 불을 질러 놓고 사냥을 하며, 백성들도 화전(火田)을 일구어 경작(耕作)을 합니다. 그래서 재목(材木)까지도 바닥이 나게 생겼으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청컨대 법(法)을 만들어 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바야흐로 초목이 생장하는 봄철에 불태워 죽이는 것은 천심(天心)에도 위배되는 것이니, 하서(下書)하여 엄하게 금하도록 하라.”

유실수의 재배
有实树の栽培
접목과 우생학이 사용되고 있었던 점에 관심을 가져 주세요.
接木と優生学が使われていた点に関心を持ってください。

太宗 23卷, 12年(1412 壬辰 / 명 영락(永樂) 10年) 2月 18日(癸酉) 4번째기사
상림원의 나무에 좋은 배 나무를 접목하기 위해 사약 강의를 강원도에 보내다 
遣司鑰姜義于江原道, 求好梨枝。 以接上林園木也。

世宗 42卷, 10年(1428 戊申 / 명 선덕(善德) 3年) 12月 9日(丙戌) 6번째기사
국가의 수용에 감당할 과목 심기를 상림원에서 건의하다
上林園啓: “本園自丙午年種楮于藏義洞, 以造進獻表箋紙, 然所植本少, 不足於用, 地且沙石, 非長久之計。 請於留後司破毁寺社基地及公處閑廣良田栽植, 幷植諸般果木, 以資國用。 本園一員往來, 與留後司祿官考察。 又京中果園, 只用昌德宮西窄地, 故諸種果木, 未得廣植, 國用不足。 請於衍禧宮、長生殿、蓮花院基地, 幷植之。 又江華府四面環海, 水氣所聚, 草木盛長, 勝於他處。 請栽柑子、柚子、石榴、木瓜等諸種果木。” 從之。

太宗 5卷, 3年(1403 癸未
命捕松蟲。 發承樞府、巡衛府、留後司、五部及軍器監匠人及百官, 隨品出人摠萬餘, 使摠制、上ㆍ大護軍分率捕蟲。 一人捕蟲三升, 許瘞之
명하여 송충(松蟲)을 잡았다. 승추부(承樞府)·순위부(巡衛府)·유후사(留後司)·오부(五部)와 군기감(軍器監)의 장인(匠人) 및 백관(百官)이 품등(品等)에 따라 사람을 내었으니, 모두 만여 명이었다. 총제(摠制)·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으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잡게 하였는데, 한 사람이 석 되[升] 정도 잡아 땅에 묻었다.

世宗 117卷, 29年(1447 丁卯 / 명 정통(正統) 12年) 8月 10日(己巳) 3번째기사
도성의 벌레 피해가 심한 소나무 대신 밤나무를 심다 
示京畿、忠淸道監司: “都城四山松木, 爲蟲所食, 易至枯朽, 欲栽栗木, 其備栗種十餘石, 送于上林園。”

태종 13권, 7년(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4월 7일(신묘) 3번째기사
각도의 수령에게 정월에 소나무를 심게 하다
命各道守令孟春栽松。 忠淸道敬差官韓雍上言: “近因兵船造作, 松木殆盡。 乞令各道各官, 松木可得成長之山, 禁火禁伐, 每當孟春, 守令親監栽植。” 從之。
각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정월[孟春]에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경차관(敬差官) 한옹(韓雍)이 상언(上言)하기를,
“근래에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로 인하여 소나무가 거의 다 되었으니, 비옵건대, 각도(各道)의 각관(各官)으로 하여금 소나무가 성장(成長)할 수 있는 산에 불을 금하고, 벌채(伐採)를 금하며, 매양 정월[孟春]을 당하면 수령이 친히 감독하여 소나무를 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24卷, 6年(1424 甲辰 / 명 영락(永樂) 22年) 4月 17日(壬戌) 3번째기사
소나무 양성 기술과 병선 수호의 방법을 상세히 갖추어 아뢰도록 명하다
傳旨于兵曹: “兵船國家禦寇之器, 其用最重, 其材須用松木。 自庚寅以後, 連年造船, 近水之地, 松木殆盡。 又因田獵之徒縱火燒焚, 不得成長, 將來可慮。 各浦兵船主守之人, 不謹守護, 不數年間, 以致朽破, 隨復改造, 非獨材木難繼, 水軍益致困苦, 予甚慮焉。 其松木養成之術、兵船守護之法, 詳具以聞。”
병조에 전지하기를,
“병선(兵船)은 국가에서 해구(海寇)를 방어하는 기구로서 그 쓰임이 가장 중한 것이다. 선재(船材)는 꼭 송목(松木)을 사용하는데, 경인년 이후부터 해마다 배를 건조해서 물과 가까운 지방은 송목이 거의 다했고, 또 사냥하는 무리가 불을 놓아 태우므로 자라나지 못하니 장래가 염려스럽다. 각 포(浦)의 병선을 주장해서 지키는 사람은 수호(守護)하는 데에 조심하지 않아서, 몇 해가 되지도 않았는데, 썩고 깨어지므로 또 다시 개조하게 되니, 비단 재목을 잇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군도 더욱 곤란하게 되니 나는 매우 염려한다. 송목을 양성하는 기술과 병선을 수호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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