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나는조선 왕조의 말기, 한국에도 이토히로부미와 같은 인물이 나와 있으면이라고 하는 상상을 한다. 혹시 망국을 막는데 기여 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공상으로다. 이토는 1841년, 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신분은 대단한 일이 없었지만, 가지고 태어난 지략과 노력으로 메이지 시대를 지지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일본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토를, 지금도 많은 일본인은‘위인’으로서 존경하고 있다. 작년 10월 26일, 도쿄 시나가와구에 있는 이토의 묘지에서는, 100 주기 추도제가 열렸다. 12월에는 고향의 야마구치현의 천문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히로후미」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국제 천문학 연합의 승인도 받았다.

  날마다쇠 떨어뜨려 가는 한반도에서이토와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안중근(안·쥬군)이 태어났다. 1879년이었다. 안의사는 30세였던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68세의 거물 정치가, 이토를 사살했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전의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처형되어 순국 했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부터 100년, 즉 1 세기가 지났다. 추도의 열기는 언제보다 뜨겁다. 나는 지금, 안의사에 대한 의례적인 추도를 넘고, 안의사를 객관화·보편화·세계화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가슴 속에 박제 상태로 남아 있던 안의사를 소생하게 하고 혈관을 통해, 숨을 불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하얼빈 거사가 한민족만의 거사가 아니고, 세계사적인 저항 운동의 하나도 정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순국 후 1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의사」가 올바른 「장군」이 올바르다는 등 말다툼 하는 유치한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안의사의 아이덴티티를 감히 「장군」으로 한정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의 사이에 그와 같아도 상관없지만, 장군의 지위에 세우고, 「동양 평화론」이 보인 혁명가·사회 개혁가·철학자적 면모를 숨기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경시할 우려가 있다.

  원로 출판인의 리기 유우(이·키운) 씨는 일생의 작업인 파주(파쥬) 출판 도시 조성의 일을 하면서, 안중근을‘마음의 스승’이라고 보았다. 리기 유우씨는 1970년대에 리은상(이·운산)이 쓴 「안중근 공판 기록」에 처음으로 만났다. 그 후, 20년간 잊고 있었지만, 출판 도시 작업이 여기저기에서 난관에 부딪치면, 또 이 책을 꺼냈다. 관료의 비협조와 「토지에서 장사를 한다」라고 하는 주위의 오해를 받았을 때였다.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만난 안중근은 리기 유우씨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09년에 사건을 일으켜, 일본인이 준비한 법정에 선 안의사는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인가. 「거기에 비교하면 나에게는 나라가 있어, 먹을 것, 입는 것도 있는 풍족한 환경이 아닌가. 나의 고난 등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나도 목숨을 걸어 주어 보자」라고 맹세했다고, 리기 유우씨는 회고 했다. 출판 도시 사업은 서서히 궤도에 올라, 리기 유우씨는 안의사의 공판 기록도 새롭게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9년, 「안중근 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하는 책이 나왔다.이씨는 출판 도시내의 6개의 다리의 쳐 가장 큰 다리에 안의사의 아명을 붙여 「응7다리(운치르교)」라고 명명했다. 오늘, 응7다리에서는 「안의사 순국 100년 기념다리 보행 행사가 열린다.

  안의사의 실적과 사상은 일부의 사람 밖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 품이 좁은가. 그렇지 않다. 특히 평화에 대한 처절한 갈망은, 우리 하기 나름으로 일본·중국을 넘어 전세계에 통할 것이다. 한일의 학계에서도, 안의사 동양 평화론을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라고 비교한 연구 성과가 나와 있다. 반면, 일본의 학자안에는 「이토가 저격 되지 않으면 한국 병합은 늦었는지, 일어나지 않았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결국은 컨텐츠다. 30세라고 하는 연령으로 순국 한 안의사를 우리가 더‘기를’필요가 있다. 일년에 한 번의 추도에 끝나서는 안 된다. 안중근과 이토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 재켄(노·제이 형) 논설위원·문화 전문 기자

 

이토히로부미의 실적은, 여러 가지 남겨지고, 그만한 평가는, 되고 있다. 거기에 비교해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데, 날조 되어 우상화 되고, 세계에····한국민 이외에 이해를 나타내는 나라는,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만세이의 논리구나.독선의 논리를 더이상 버리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스테이터스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도<암살의 타겟으로 한 이토씨>잘 모르고, 일본 정부 고관인 것만으로, 척살을 한, 인물은, 단순한 테러리스트 이외에, 평가는 하는 것인가? 알카이다의 자폭 테러와의 차이는, 찾아낼 수 있는 것인가? 

 


安義士を客観化・普遍化・世界化

  私は朝鮮王朝の末期、韓国にも伊藤博文のような人物が出ていればという想像をする。 ひょっとすると亡国を防ぐのに寄与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空想でだ。 伊藤は1841年、今の山口県で下級武士の息子として生まれた。 身分は大したことがなかったが、持って生まれた知略と努力で明治時代を支える政治家になった。 ‘日本憲法の父’と呼ばれる伊藤を、今でも多くの日本人は‘偉人’として尊敬している。 昨年10月26日、東京品川区にある伊藤の墓地では、100周忌追悼祭が開かれた。 12月には故郷の山口県の天文学者が自分が発見した小惑星に「博文」という名前を付け、国際天文学連合の承認も受けた。

  日々衰落していく韓半島伊藤のような人物は出てこなかったが、その代わりに安重根(アン・ジュングン)が生まれた。 1879年だった。 安義士は30歳だった1909年10月26日、中国ハルビン駅で68歳の大物政客、伊藤を射殺した。 そしてちょうど100年前の1910年3月26日午前10時、旅順監獄で処刑され、殉国した。

   安重根義士の狙撃から100年、すなわち1世紀が過ぎた。 追悼の熱気はいつよりも熱い。 私は今、安義士に対する儀礼的な追悼を越えて、安義士を客観化・普遍化・世界化する時だと考えている。 私たちの胸中に剥製状態で残っていた安義士をよみがえらせ、血管を通し、息を吹き込ま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してハルビン義挙が韓民族だけの巨事ではなく、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一つとして定着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 殉国後1世紀が過ぎた時点で、「義士」が正しい「将軍」が正しいなどと言い争う幼稚な水準であってはならない。 安義士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敢えて「将軍」に限定しようという理由は何か。 軍人の間でそのようでもかまわないが、将軍の地位にとどめて、「東洋平和論」が見せた革命家・社会改革家・哲学者的面貌を隠すのは、むしろ故人を軽視するおそれがある。

  元老出版人の李起雄(イ・キウン)氏は畢生の作業である坡州(パジュ)出版都市造成の仕事をしながら、安重根を‘心の師’と見なした。 李起雄氏は1970年代に李慇相(イ・ウンサン)が書いた「安重根公判記録」に初めて会った。 その後、20年間忘れていたが、出版都市作業があちこちで難関にぶつかると、またこの本を取り出した。 官僚の非協調と「土地で商売をする」という周囲の誤解を受けた時だった。 四面楚歌の状況で会った安重根は李起雄氏に大きな勇気を与えた。 1909年に事件を起こし、日本人が準備した法廷に立った安義士はどれほど厳しい状況だっただろうか。 「それに比べると私には国があり、食べるもの、着るものもある恵まれた環境ではないか。 私の苦難など何でもないことだ。 私も命をかけてやってみよう」と誓ったと、李起雄氏は回顧した。 出版都市事業は徐々に軌道に乗り、李起雄氏は安義士の公判記録も新しく翻訳し始めた。 そして99年、『安重根戦争、まだ終わっていない』という本が出た。 李氏は出版都市内の6つの橋のうち最も大きい橋に安義士の幼名を付け、「応七橋(ウンチルギョ)」と命名した。 今日、応七橋では「安義士殉国100年記念橋歩行行事が開かれる。

  安義士の業績と思想は一部の人にしか影響を及ぼさないほど懐が狭いのか。 そうではない。 特に平和に対する凄絶な渇望は、私たちしだいで日本・中国を越えて全世界に通じるはずだ。 韓日の学界でも、安義士の東洋平和論をドイツの哲学者カントの「永久平和論」と比較した研究成果が出てきている。 半面、日本の学者の中には「伊藤が狙撃されなければ韓国併合は遅れたか、起きていなかった」と主張する人も多い。 結局はコンテンツだ。 30歳という年齢で殉国した安義士を私たちがもっと‘育てる’必要がある。 一年に一度の追悼に終わってはならない。 安重根と伊藤の対決はまだ終わっていない。

  盧在賢(ノ・ジェヒョン)論説委員・文化専門記者

 

伊藤博文の実績は、数々残されて、それなりの評価は、されている。 それに比べて テロリスト安重根の背景は、何も無いのに、捏造され、偶像化されて、世界に・・・・韓国民以外に理解を示す国って、在るのだろうか?

 

ウリナラ・マンセーの論理だね。独りよがりの論理をもう捨てなくては、いつまでも、韓国と言う国家のステータスは、あがらないだろう!!

 

相手のことも<暗殺のターゲットとした伊藤氏>よく知らないで、日本政府高官であることだけで、刺殺をした、人物って、単なるテロリスト以外に、評価は在るのか? アルカイダの自爆テロとの違いは、見出せる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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