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1236~1251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고려시대때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며 인간의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8만 1258장으로, 1511종 6802권에 달한다. 이 경전들을 가로 70㎝, 세로 24㎝의 나무판에 새겼다. 모두 쌓으면 3200m에 달한다. 신분을 초월해 연간 125만 명이 제작에 참여하여 1236년부터 만들어 16년 만에 완성했다.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수는 5272만 9천 자이다. 발견된 오탈자는 5200만여 자 중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으로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을 썼는데 오탈자가 한 글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서여 민영규(閔泳珪) 박사에 의하면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이 재조대장경 조판이라고 한다. 기존 왕실과 커넥션을 가졌던 불교계를 회유하고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몽고침략때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재조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 사업이었으며, 따라서 최우는 이를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혹은 개판)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모두 정안이 투자하여 이루어졌는데, 이 정안은 당시 무신 정권의 집권지 최이의 처남이었다. 최우 자신도 생전에는 진양후에 봉해졌는데 여기서 진양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로 최씨 무신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정안 자신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데 남해와 진주, 하동은 서로 먼 거리가 아니다.
일본의 것이 될 뻔 했다.
1395년 한국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대장경 인쇄본 2질을 건네준다. 이때부터 일본은 납치한 백성들을 송환때마다 대장경 원판을 달라고 요청한다. 태종이 매번 인쇄해 주는것도 귀찮다며 일본에 기증하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한다. (일본은 태조 원년부터 중종 34년까지 87차례 대장경 서적을 요청하고, 조선은 1556년까지 약 45차례 일본에 인쇄본을 건냈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일본 호자전(呼子殿)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정성을 극진히 바치니, 그가 청하는 대장경(大藏經)을 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_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 3월 12일
1399년_일본 좌경 권대부(左京 權大夫)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일본에 잡아갔던 남녀 100명을 송환한 뒤 대장경을 줄 것을 요청. 그는 자신을 백제 후손이라고 소개했으며 대장경을 주면 조선의 골칫거리인 일본해적 소탕에도 협력하겠다고 밝힌다.
1411년_ 일본이 아주 귀한 동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 원판을 요구한다. (코끼리가 식량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고위 관리를 밟아 죽이자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태종이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하여 육지로 옮긴다. 사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 3개 지방이 돌아가며 키웠다.)
1414년_ 일본이 거듭 경판을 요청하자, 세종이 “경판을 주면 다시 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자 예조에서 “경판을 보낸다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해서 무산된다.
1946년에 해인사에서 봉행된 정대불사를 담은 사진.
정대불사
음력 3월에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행하는 종교의례.불교의식.
팔만대장경을 1년에 한번씩 햇빛을 받게 하기위해 머리에 이고 돌아다닌다.
고려시대에 시작해서 조선시대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다.
팔만대장경
(1236~1251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고려시대때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며 인간의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8만 1258장으로, 1511종 6802권에 달한다. 이 경전들을 가로 70㎝, 세로 24㎝의 나무판에 새겼다. 모두 쌓으면 3200m에 달한다. 신분을 초월해 연간 125만 명이 제작에 참여하여 1236년부터 만들어 16년 만에 완성했다.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수는 5272만 9천 자이다. 발견된 오탈자는 5200만여 자 중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으로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을 썼는데 오탈자가 한 글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서여 민영규(閔泳珪) 박사에 의하면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이 재조대장경 조판이라고 한다. 기존 왕실과 커넥션을 가졌던 불교계를 회유하고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몽고침략때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재조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 사업이었으며, 따라서 최우는 이를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혹은 개판)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모두 정안이 투자하여 이루어졌는데, 이 정안은 당시 무신 정권의 집권지 최이의 처남이었다. 최우 자신도 생전에는 진양후에 봉해졌는데 여기서 진양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로 최씨 무신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정안 자신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데 남해와 진주, 하동은 서로 먼 거리가 아니다.
일본의 것이 될 뻔 했다.
1395년 한국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대장경 인쇄본 2질을 건네준다. 이때부터 일본은 납치한 백성들을 송환때마다 대장경 원판을 달라고 요청한다. 태종이 매번 인쇄해 주는것도 귀찮다며 일본에 기증하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한다. (일본은 태조 원년부터 중종 34년까지 87차례 대장경 서적을 요청하고, 조선은 1556년까지 약 45차례 일본에 인쇄본을 건냈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일본 호자전(呼子殿)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정성을 극진히 바치니, 그가 청하는 대장경(大藏經)을 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_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 3월 12일
1399년_일본 좌경 권대부(左京 權大夫)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일본에 잡아갔던 남녀 100명을 송환한 뒤 대장경을 줄 것을 요청. 그는 자신을 백제 후손이라고 소개했으며 대장경을 주면 조선의 골칫거리인 일본해적 소탕에도 협력하겠다고 밝힌다.
1411년_ 일본이 아주 귀한 동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 원판을 요구한다. (코끼리가 식량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고위 관리를 밟아 죽이자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태종이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하여 육지로 옮긴다. 사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 3개 지방이 돌아가며 키웠다.)
1414년_ 일본이 거듭 경판을 요청하자, 세종이 "경판을 주면 다시 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자 예조에서 "경판을 보낸다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해서 무산된다.
1946년에 해인사에서 봉행된 정대불사를 담은 사진.
정대불사
음력 3월에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행하는 종교의례.불교의식.
팔만대장경을 1년에 한번씩 햇빛을 받게 하기위해 머리에 이고 돌아다닌다.
고려시대에 시작해서 조선시대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