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초가집차, 녹차도에 큰 영향」최·정암차문화 연구가
http://www.ytn.co.kr/_ln/0123_201709141115366504YTN (한국어) 2017.9.14
「녹차를 마시는 예법 중(안)에서, 「초가집차다도」의 뿌리는 우리 나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도예가이며, 차문화 연구가이기도 한 최·정암씨는, 「신라의 고승인 무상 선사가 중국에서 「선다」를 창시 해, 조선시대의 학자인 매월당(※김시습의 호)이 이것을 「한다」즉 초가집차로서 발전시키고, 일본 와비차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매월당은, 우리 나라의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최씨는 30년간, 100회 이상 중국과 일본의 현지 도서관과 박물관등을 왕래하면서 차를 연구했다. 이래, 이것을 집대성으로 한 저서 「한다문명의 동전」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씨는, 책을 통해서 「16 세기의 녹차의 정신 가운데, 와비차에 영향을 준 사람은 매월당으로, 차를 마실 때에 사용하는 그릇인 「밥공기」도 조선시대의 남부지방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니까, 우리 나라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우리 나라의 차의 정신과 찻그릇의 일부가 일본에 건너, 일본식에 재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최·정암 연구가와의 일문일답.
Q.저서를 통해서, 한일의 사이에 「다도 문화」가 경과하는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던 일과 다르다고 하는 주장을 했다. 여기서의 녹차도란, 초가집차다도 즉 선다를 의미한다.
7 세기 중순, 당대로 신라 왕자였던 무상선사로부터 발달한 선다는, 불교에 대하고 차를 마시면서 수행하는 문화다.
이후, 고려시대에 사찰을 중심으로 한 선다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선사도 선다를 발전시켜, 신라와 가야의 차에 관한 기록을 정리했다.
그 후, 조선시대의 매월당선생님에게도 선다정신이 전수되었다.선다는 「초가집차」로 다시 태어났다.
초가집차는 농민이 사는 소우카를 모체로 했다.청빈을 기초로서 15 세기 일본에 전파 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이것을 30년간 연구한 결집이 확실히 저서 「한다문명의 동전」이다.
Q.그러면, 우리 나라와 일본의 다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본 와비차는 한국의 「소우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그러나, 초기의 와비는 돈대광실과 같이 큰 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에 대해, 우리 나라의 초가집은 고즙 나무와 같이 작은 소박한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손비를 통해서 발전했다.
김시습은, 선가와 도가, 불가 사상을 토대로, 유교차의 전통에 이러한 철학적인 깊은 곳과 법식을 더했다.
Q.매월당에 의해서 「초가집차」가 일본에 전파 했다고 하는 사실은 어떻게 분명히 했는지?
연구의 시작은 35년전이다.김시습이 초가집에서 일본의 외교 사절의 승려에 철야로 초가집차의 정신 세계를 논하는 송별시를 읊은 것을 매월당문집중에서 발견했다. 1988년, 강원 대학에서 열린 매월당관계의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일본 무로마치 시대 초가집차에게 준 매월당의 영향」을 주제에 논문을 발표해 주목받았다.그 후에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Q.도예가면서, 특히 차의 문화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나의 고향인 경주시에서 신라의 차문화에 대한 인스피레이션을 받아 자연스럽게 차에 마음이 기울었다.또, 고고학자인 석당최·남쥬 선생님이 죽은 남편과 어릴 적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죽은 남편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경주시의 신라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하는 것이 항일 애국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경주시의 들판에 무너진 석탑이나 불상을 일으켜 세워 수많은 문화재를 발굴하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었다.아버지의 손을 잡아 신라의 차유적인 남산 산와령을 답사 해, 찻그릇을 구운 토기로 놀았다.또, 어릴 적부터 객실에서 차를 마시는 다도를 배우거나 했다.
「我が国の草庵茶、日本茶道に大きな影響」チェ・チョンガン 茶文化研究家
http://www.ytn.co.kr/_ln/0123_201709141115366504YTN (韓国語) 2017.9.14
「日本茶を飲む礼法の中で、『草庵茶茶道』の根は我が国から始まりました。」
陶芸家であり、茶文化研究家でもあるチェ・チョンガン氏は、「新羅の高僧である無相禅師が唐国で『禪茶』を創始し、朝鮮時代の学者である梅月堂(※金時習の号)がこれを『韓茶』すなわち草庵茶として発展させて、日本ワビ茶になった」と主張する。
梅月堂は、我が国の最初の漢文小説である「金鰲神話」の作家としてもよく知られている。
チェさんは30年間、100回以上中国と日本の現地図書館と博物館などを往来しながら茶を研究した。 以来、これを集大成にした著書「韓茶文明の東傳」は学界の注目を浴びた。
チェ氏は、本を通じて「16世紀の日本茶の精神のうち、ワビ茶に影響を与えた人は梅月堂で、茶を飲む時に使う器である「茶碗」も朝鮮時代の南部地方から伝わったものだから、我が国が日本に影響を与えたということだろう」と強調した。
我が国の茶の精神と茶器の一部が日本に渡り、日本式に再創造されたというのだ。
次はチェ・チョンガン研究家との一問一答。
Q.著書を通じて、韓日の間で「茶道文化」が移り行く過程が私たちが知っていた事と異なるという主張をした。 ここでの日本茶道とは、草庵茶茶道すなわち禪茶を意味する。
7世紀中頃、唐代で新羅王子だった無相禪師から発達した禪茶は、仏教において茶を飲みながら遂行する文化だ。
以後、高麗時代に寺刹を中心とした禪茶意識が発達し始めた。三国遺事の著者である一然禅師も禪茶を発展させ、新羅と伽耶の茶に関する記録を整理した。
その後、朝鮮時代の梅月堂先生にも禪茶精神が伝授された。禪茶は「草庵茶」へと生まれ変わった。
草庵茶は農民が住む草家を母体にした。清貧を基礎として15世紀日本に伝播されて新しい文化を作った。これを30年間研究した結集がまさに著書「韓茶文明の東傳」だ。
Q.それならば、我が国と日本の茶道の違いは何か?
日本ワビ茶は韓国の「草家」に根を置いている。しかし、初期のワビは高台広室のような大きな家から始まった。
これに対し、我が国の草庵は藁葺きのように小さい素朴な自然主義を追求するソンビを通じて発展した。
金時習は、禅家と道家、仏家思想を土台に、儒教茶の伝統にこのような哲学的な深みと法式を加えた。
Q.梅月堂によって「草庵茶」が日本に伝播したという事実はどうやって明らかにしたのか?
研究の始まりは35年前だ。金時習が草庵で日本の外交使節の僧侶に徹夜で草庵茶の精神世界を論じる送別詩を詠んだことを梅月堂文集の中から発見した。 1988年、江原大学で開かれた梅月堂関係の国際学術セミナーで、「日本室町時代草庵茶に与えた梅月堂の影響」を主題に論文を発表し注目された。その後に本格的な研究が始まった。
Q.陶芸家ながら、特に茶の文化に興味を持つようになったきっかけは何ですか?
私の故郷である慶州市で新羅の茶文化に対する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受けて自然に茶に心が傾いた。また、考古学者であった石幢チェ・ナムジュ先生が亡父と子供の頃からの影響を多く受けた。亡父は日本植民地時代に慶州市の新羅文化遺産を発掘保存することが抗日愛国だと信じていました。慶州市の野原に崩れた石塔や仏像を起こし立てて数多くの文化財を発掘して、国立慶州博物館に展示された。父の手を握って新羅の茶遺跡である南山三和領を踏査し、茶器を焼いた土器で遊んだ。また、幼い頃から広間でお茶を飲む茶道を習ったり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