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高麗王朝時代
新羅王朝の末期、豪族の一人、王健が「高麗」王朝を建国しました。918年のことです。
936年には、新羅と後百済を滅ぼし、朝鮮半島を統一しました。 首都は開京(開城)です。
建国当初の人口は210万人でした。
金属活字印刷と青磁はこの国の優れた文化を示しています。
ヨーロッパに「Korea」として紹介された国です。
● 布 貨(麻布)
朝鮮の貨幣で特色があるのは、布(素材は麻)がそのまま貨幣として機能していたことです。 しかも、19世紀ころまでの1000年以上も絶え間なく使用されていたのです。
米も貨幣の代わり使われることがありましたが、布の方が価値の変動が少なく、また保存に便利でした。
布には政府の決めた基準があり、縦糸5升(1升は縦糸80本)で長さ35尺が1反、2反で1疋(匹)でした。
この頃の奴婢の値段は、成人男子で布100疋以下、成人女子は120疋と定められていました(女性の方が高い!)。 奴婢は全人口の1割くらいいたそうです。
王朝の末期の14世紀になると、縦糸の数が少なくなり、3升布、2升布などが出現しました。 まるでガーゼのようで、本来の「布」としての機能を失い、象徴的な貨幣となりました。
● コイン鋳造の始まり
朝鮮で初めて貨幣が発行されたのは、996年のことです。 銘には、唐の貨幣の「𠃵元重宝」を使いました。 ただし、背には「東国」の文字がある鉄銭でした。
さらに、998年、唐の「開元通宝」を鋳写しました。 現在これは、「高麗開元」と呼ばれています。 アンチモニーを多く含む独特の銅銭です。
6.7g 29mm | 3.3g 25.4mm |
しかし、北方から契丹が侵入し、貨幣づくりどころではなくなりました。
● 銀 瓶
1101年、銀の貨幣「銀瓶」が発行されました。 これは結構流布したそうです。
1斤(おそらく600g) = 布100疋
でした。 しかし、14世紀になると銀不足で、小さくなり(「小銀瓶」)、民間では「砕銀」や「標銀」と呼ばれる低品質貨が発行され、だんだん使用されなくなりました。
● 再びコイン鋳造の試み
1097年に鋳銭司を設置し、1102年、東国通宝、東国重宝、三韓通宝、三韓重宝、海東通宝、海東重宝の6種類の銅貨を発行しました。
6.3g 24.4mm | 3.2g 24.5mm |
しかし発行枚数は多くなく、貴族だけの使用にとどまり、市場ではあまり流通しませんでした。
高麗時代の豪族の墓の副葬品です。 青銅の硯、刀、印などともに、 北宋の崇寧通宝、崇寧重宝(1102~06年発行)があります。 貨幣としてではなく、宝物として扱われていたようです。 (2005.5 東京国立博物館にて) |
(2) 李氏朝鮮時代
1392年、高麗王朝の将軍李成桂がクーデターを起こし、「朝鮮」王朝を建国しました。 「李氏朝鮮」とも呼ばれています。 首都は漢陽(漢城、現ソウル)でした。
17世紀には500万、18世紀には700万の人口に増加しました。
建国当初にハングル文字を創製し、また高麗青磁とならぶ李朝白磁を生み出した国です。
● 布 貨(綿布)
貨幣の主役は依然として布でした。 ただし、1364年ころ、元より木綿の製法が伝わり、素材は木綿になりました。
● 楮 貨
1391年(1401年、1410年?)、楮(こうぞ)の紙で作成された貨幣が発行されました。 「楮貨(ちょか)」と呼ばれています。 宋や元の紙幣に見習った、一辺が30~50cmの大きな紙幣だったらしいです。
当初は1張(1枚)で米2升くらいしていましたが、だんだん価値が下がり、2、30年後には1/3升くらいにまで低下しました。
楮貨は、数十年で使用されなくなりました。
● 朝鮮通宝
1425年、「朝鮮通宝」を発行しました。 書体は明の銭を真似ています。
3.4g 23.5mm |
公定価格
銅銭1枚 = 楮貨1張 = 米1升(0.9リットル)
を定めました。 しかし、銅銭1枚=米1升というのは、当時の中国や日本の物価(米1リットル=5~10文)と比べると、銅銭の価値を高く設定しすぎています。 そのためか、朝鮮通宝は長く使用されませんでした。
1429年に来日した朝鮮通信使は、その報告書の中で、
「銭が盛んに用いられ、布や米による支払いを凌駕している。だから、千里の旅をするものであっても、ただ銭貨を帯びるだけでよく、穀物を携帯しなくてよい」 (『李朝世宗実録』巻46)
と、日本で銭が盛んに利用されていることに驚いています。
● 常平通宝
1633年、「常平通宝」が発行されました。当初は無背(背に字がない)でしたが、1678年には発行所を表わす文字が1字つけられました。 ただしまだ、発行量は多くありません。
背の文字は「備」の異体字です。 鋳銭所の「備返司」を表わしています。 4.8g 25.9mm |
1679年から、当二銭が発行され、その数はこれまでとは比べ物にならないくらい大量でした。 やっとこのころから貨幣経済が発達し、鋳造貨幣の使用が一般化したのです。
1678年に政府の定めた基準では、
銀1両(37g) = 銭400文 = 白米100升
(1) 고려 왕조 시대
신라 왕조의 말기, 호족의 한 명, 왕건이 「고려」왕조를 건국했습니다.918년의 일입니다.
936년에는, 신라와 후 (쿠다라)백제를 멸해,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수도는 개경(개성)입니다.
건국 당초의 인구는 210만명이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와 청자는 이 나라가 뛰어난 문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럽에 「Korea」로서 소개된 나라입니다.
● 포화(삼베)
조선의 화폐로 특색이 있다의는, 옷감(소재는 삼)이 그대로 화폐로 해서 기능하고 있던 것입니다. 게다가, 19 세기무렵까지의 1000년 이상도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옷감에는 정부가 결정한 기준이 있어, 날실 5승(1승은 날실 80개)으로 길이 35자가 1반, 2반으로 1필(마리)이었습니다.
요즘의 노비의 가격은, 성인 남자로 옷감 100필이하, 성인 여자는 120필과 정해져 있었습니다(여성이 높다!). 노비는 전인구의 1할애하는들 좋은 싶다고 합니다.
왕조의 말기의 14 세기가 되면, 날실의 수가 적게 되어, 3승포, 2승포등이 출현했습니다. 마치 가제같고, 본래의 「옷감」으로서의 기능을 잃어, 상징적인 화폐가 되었습니다.
● 코인 주조의 시작
조선에서 처음으로 화폐가 발행된 것은, 996년의 일입니다. 명에는, 당의 화폐의 「원귀중한 보물」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키에는 「동국」의 문자가 있다 철전이었습니다.
6.7g 29mm | 3.3g 25.4mm |
그러나, 북방에서 계단이 침입해, 화폐 만들기할 경황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 은병
1101년, 은의 화폐 「은병」이 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유포했다고 합니다.
1근(아마 600 g) =옷감 100필
(이었)였습니다. 그러나, 14 세기가 되면 은부족하고, 작아져( 「소은병」), 민간에서는 「쇄은」이나 「표은」이라고 불리는 저품질화가 발행되어 점점 사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다시 코인 주조의 시도
6.3g 24.4mm | 3.2g 24.5mm |
그러나 발행 매수는 많지 않고, 귀족만의 사용에 머물러, 시장에서는 별로 유통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의 호족의 무덤의 부장품입니다. 청동의 연, 칼, 표등 함께, 북송의 숭녕옛날 화폐의 면에 새긴 글, 숭녕귀중한 보물(110206년 발행)이 있어요. 화폐로서가 아니고, 보물로서 다루어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2005.5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
(2) 이씨 조선 시대
1392년, 고려 왕조의 장군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왕조를 건국했습니다. 「이씨 조선」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수도는 한양(한성, 현서울)이었습니다.
17 세기에는 500만, 18 세기에는 700만의 인구에게 증가했습니다.
건국 당초에 한글 문자를 창제해, 또 고려청자와 나란히 서는 이조 백자를 낳은 나라입니다.
● 포화(면포)
화폐의 주역은 여전히 옷감이었습니다. 다만, 1364년무렵, 원부터 무명의 제법이 전해져, 소재는 무명이 되었습니다.
● 저화
당초는 1장(1매)으로 미 2승 정도 하고 있었습니다만, 점점 가치가 내려, 2, 30년 후에는 1/3승정도까지 저하했습니다.
저화는, 수십년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조선 옛날 화폐의 면에 새긴 글
1425년, 「조선 옛날 화폐의 면에 새긴 글」을 발행했습니다. 서체는 명의 전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3.4g 23.5mm |
공정가격
동전 1매 =저화 1장 =미 1승(0.9리터)
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전 1매=미 1승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중국이나 일본의 물가(미 1리터=510문)와 비교하면, 동전의 가치를 너무 높게 설정해서 있습니다. 그 때문일까, 조선 옛날 화폐의 면에 새긴 글은 길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1429년에 일본 방문한 조선 통신사는, 그 보고서속에서,
「전이 활발히 이용되어 옷감이나 미에 의한 지불을 능가하고 있다.그러니까, 천리의 여행을 하는 것이어도, 단지 금전을 띠는 것만으로 자주(잘), 곡물을 휴대하지 않아 좋다」 ( 「이조 세종 실록」권 46)
과 일본에서 전이 활발히 이용되고 있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 상히라도리보물
1633년, 「상히라도리보물」이 발행되었습니다.당초는 무키(키에 글자가 없다)였지만, 1678년에는 발행소를 나타내는 문자가 1자 붙여졌습니다. 다만 아직, 발행량은 많지 않습니다.
키의 문자는 「비」의 이체자입니다. 주조해 전소의 「비반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4.8g 25.9mm |
1679년부터, 당2전이 발행되어 그 수는 지금까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대량이었습니다. 겨우 요즘부터 화폐 경제가 발달해, 주조 화폐의 사용이 일반화했습니다.
1678년에 정부가 정한 기준에서는,
은1량(37g) =전 400문 =백미 100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