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前回のスレ『大寺のまろき柱の月影を』より派生して、ジョン君による「新羅は百済の建築を継承していない」という主張について。

“高麗と三国時代の関係を考慮する上で、三国は新羅によって統一されていることから、統一新羅の文化は基本的に新羅系のものと考えるのが妥当なの。
さて、その場合、高麗に引き継がれるのは、「統一新羅」あるいは、「高句麗の末裔」を自認する高麗としては、復古したとしても百済ではなく、「高句麗」の文化に向かうの。 百済、出番なし。w”



論点は明快である。 新羅は百済の建築文化を摂取したか。 私の主張はYES。 その根拠として私は、三国時代における(1)出土遺物(瓦当、鴟尾)の様式的類似、(2)皇龍寺造営にかかる百済工匠将来の記録、そして統一新羅における(3)百済石塔形式の摂取を挙げた。 これに対するジョン君の反論は以下の通り。

”「新羅は統一直後の感恩寺石塔から早々にこの百済の形式を用いており、これが以降の主流形式となってゆくのである。」(キリッ
ええ、7世紀前半(百済滅亡直前)に出来た定林寺石塔が起源となって、7世紀後半に文武王(在位661年~681年)が建立した感恩寺の石塔ができた? マ ジ で す か ? (藁
片方を「660年以前」と書き、片方を「7世紀末」と書いて、ビミョーに時間差をイメージさせる姑息さが素敵ですねw これって、7世紀中葉、同時代の石塔なんじゃないですか?(笑い)

※ ちなみに、所謂「百済系」の石塔と、「新羅系」の石塔は、「屋根部分の反り」及び「基壇の構造」等で区分されております。hinomotoちゃんの分類区分はどこのものとも知れません。おそらく、単に外形的な高さなどから言っているんだと思います。

ええ、申し訳ありません・・・東京工大系のサイトなんですけどね・・・
http://www1.hst.titech.ac.jp/~nakanisi/k_archi/k112.html
『慶州近くの感恩寺跡に立つ東西二基の石塔である。二基の塔は同形同大の典型的な新羅様式の石塔であり、このような石塔様式が完成したもっとも早い時期の石塔の一つである。』
定林寺石塔と同時代の典型的な新羅様式の石塔を百済式認定w
hinomotoちゃん、パねーっすね!w”





正直、読んでしばらく絶句した。 ここまで頭の悪い人間もいるものか、と。

「新羅様式だから百済と関係ない」――たとえるならこの主張は、奈良・平安時代の日本建築様式は「和様」だから中国と関係ない、と言うようなものだ。 和様は、奈良時代に唐様式を導入して形成された。 では石塔の「新羅様式」とはいつ形成されたのか? 統一新羅時代である。 どのように形成されたのか? 百済石塔形式の受容によって、である。

ジョン君みずからが「東工大系のサイト」と自信満々に掲げた文の執筆者、中西章氏。 氏はその著書『朝鮮半島の建築』(1989年)のなかでこう記す。

「統一新羅の石塔は三国時代からの石塔の伝統を継承し、さらに発展させたものであるが、三国時代の石塔には百済の弥勒寺跡石塔や定林寺跡五層石塔のような木造塔葉の形を模したものと、古新羅の芬皇寺石塔のように塼塔の様式をまねてつくられたものがあった。統一新羅の石塔はこの二つの伝統を融合し、独特な新羅式の石塔様式を完成した。」


これが、ジョン君がドヤ顔で引用したところの、「新羅式石塔」の謂いである。 もはや笑う気力も起きない。 




ここで終わっても良いのだが、ついでに新羅石塔の様式形成について多少説明しておけば、諸氏の正確な理解に資する意義もあろうかと思う。

東アジアの塔婆建築のルーツは、もちろん中国にある。 中国寺院における塔婆建築はほんらい木造だったが、6世紀からストゥーパを模した密檐式仏塔や、亭子状の亭閣式仏塔などにおいて塼(レンガ)や石などの無機材料を用いて建てるものが現れ、さらに隋唐代にいたって楼閣式仏塔(いわゆる層塔)にも塼造のものが出現した。現存例を下に列挙すれば、524年崇岳寺塔(密檐式塼塔、現存最古)、6C佛光寺祖師塔(亭閣式塼塔)、611年神門寺四面塔(亭閣式石塔)、652年慈恩寺大雁塔(楼閣式塼塔)など。これらの塼塔・石塔はいずれも組積式の構法によるもので、直方体に成型されたレンガや石材を多数積み重ねる構造を基本とする。

   


さて、4世紀から6世紀にかけて中国から寺院建築技術を受容した韓三国も、当初はもっぱら木造塔を建てていたが、7世紀に入って、百済では弥勒寺と定林寺、新羅では芬皇寺に石塔が建てられた(高句麗では八角七層の石塔が建てられた記述が三国遺事に見えるが、未詳)。この羅済両国の石塔形式は、多くの点で好対照をなす。



新羅芬皇寺の石塔(634年、慶州)は、いっけん塼塔のように見えるが、じつは百科事典大に切り出された石板を積み重ねてつくられた、「模塼石塔」である。唐代以降に中国で盛行した楼閣式塼塔の姿を石でもって表現したもので、この時代の新羅の唐文化に対する強い志向をうかがわせる。模塼石造という構造上の大きな特徴に加え、意匠上の特徴としては、組積式構造の帰結としての階段状の屋根上面や、直線的な浅い軒、楼閣式塼塔の特徴である広い単層基壇、初層に設けられた龕室などが挙げられる。



これに対し百済の石塔は、木造層塔のすがたを石材によって表現したもので、柱・壁・横架材・軒下の斗栱・屋根といった木造建築の各部をかたどった部材を個々に成型し、これを組み立ててつくられる。中国にも先行例のないこうした形式を生み出したのは、百済の自国文化に対する自信のあらわれと見ることもできるだろう。 

2基のうち、より始原的な形態と見られる(つまり、より直接的に木造建築が参照されている)弥勒寺石塔(600-640年、益山)では、木造建築意匠の表現が礎石・長押・小壁、さらには心柱にまで及んでいるが、定林寺石塔(660年以前、扶余)ではこれらの表現は省略され、すでに石塔固有の様式を形成しつつある。 意匠上の特徴としては、柱石と面石とでつくられる塔身の構造、石を成型してつくる平滑な屋根面、および反りを持った深い軒、木造塔の基壇を反映した狭い二重基壇などを記憶しておいていただきたい。

さて、ここまでが三国時代の状況である。こののち660年に百済が、668年に高句麗が滅び、676年には唐軍も撤退して、統一新羅の時代が始まる。



統一新羅初期は、様式の模索の時代である。この時期の石塔からは、百済の「木造塔を模した石塔」と、古新羅の「模塼石塔」の諸要素が遺構ごとに異なる配合で混用されている状況が看取できる。そこではすでに木造塔や塼塔は直接の参照の対象ではない。



感恩寺址三層石塔(682年、慶州)は狭い二重基壇の上に別材で柱石を立て、面石で壁面を作り、階段状の持ち送りの上に平滑な屋根面をいただくなど、構造形式は定林寺石塔に倣っている。ただ、より骨太なプロポーションを採る点では新羅独自のアレンジと見ることもできるし、軒下の持送りを等間隔で5段につくる点は、模塼石塔の意匠を取り入れたのかも知れない。高仙寺石塔(686年以前)もその構造意匠はほぼ感恩寺と等しいが、初層塔身に龕室をかたどった線刻がある点で模塼石塔の名残りを留める。

 


これに対し義城塔里五層石塔(700年頃)は、柱石と面石で塔身を構成する点では前2者と等しいが、階段状の屋根面広い単層基壇初層屋身の龕室といった模塼石塔の特徴をより色濃く受け継いでいる。




こうした統一新羅初期の模索を経て、結局主流の地位を占めることとなったのは感恩寺石塔の様式であった。その柱石と面石による塔身構造二重基壇平滑な屋根5段の持送りなどの諸要素は、塔身部や持送り部分を一体成型する、石造に合わせた簡略化を経て、様式の完成を見る。 これが、いわゆる「新羅様式」である。羅原里五層石塔(写真左、8世紀、以下同じ)、慶州千軍里三層石塔(写真中央)、述亭里三層石塔(写真右)など多くの遺構があるなかで、仏国寺釈迦塔(写真左下、8世紀後半)はその最高傑作とされる。


 


以上のような新羅様式の石塔は、さらに時代がくだると規模の低小化と表現の省略とが進み、宝林寺三層石塔(870年)に見られるように、基壇の形式も簡略化されてゆく。また様式の完成にともない、定型からの逸脱が試みられ、仏国寺多宝塔(8世紀後半、写真右上)のような個性的な形式の石塔が行われたり、或いは完成した様式の上に彫刻などの装飾でおおうことが盛んに行われた。 こうした例としては、遠願寺三層石塔、陳田寺三層石塔、実相寺百丈庵三層石塔などが挙げられる。 これらの形式が高麗時代へ、新羅様式として受け継がれてゆくことになる。



なお、古新羅の模塼石塔系の要素を留めたものも、少数派ながら存在することは言い添えておこう。たとえば階段状の落水面を持つ南山里東三層石塔(8世紀、慶州)がそうだし、また華厳寺四獅子三層石塔(8世紀)では、獅子像の上に乗る石塔はやはり新羅様式を基本としつつ初層塔身に龕室が彫り込まれている。また統一新羅後期になると実際に塼を用いたものも現れる。 安東新世洞七層塼塔(9世紀)、松林寺五層塼塔(9世紀)などがその遺構である。

 


さらに高麗時代になると、石塔様式は統一新羅時代の定型を脱し、地方ごとの分化を見せるようになる。首都開城を中心には浅い軒の出厚い軒先を特徴とする「高麗式」の石塔が分布するいっぽう、忠清・全羅道など百済の故地には深い軒の出薄い軒先大きな逓減率など、百済石塔に類似した意匠を持つ「百済式石塔」が、北部には高句麗の木造塔で好まれた多角形平面を持つ石塔形式が、それぞれいとなまれている。高麗時代の「新羅式石塔」が、これらに対して、新羅の中心地である慶尚道地方に受け継がれた形式のことであるのは、言うまでもない。 

ここまでの話を理解した方には、この高麗時代の区分を以って「新羅石塔は百済と関係ない」と自信満々に主張するジョン君の文を読んだときの、私の脱力を共有していただけることだろう。




しかし、新羅が統一後早々に、百済の石塔形式に若干の改変を加えただけの感恩寺石塔の形式を、主流形式として選択したのはなぜなのだろう。 古新羅の模塼石塔や、それと百済石塔との折衷である義城塔里石塔のような形式、或いは塼塔そのものを主流としても良かったのではないか。

考えてみると、新羅はまず唐と連合して百済・高句麗を滅ぼしたが、その後は唐軍との戦争に8年を費やして統一を果たしている。石材で塼塔を真似ようとするほど、唐文化への強い憧れを見せていた古新羅に比べて、統一新羅が、少なくともその初期において、唐とその文化に対する冷めた視線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しても、不思議はない。統一新羅が、百済の作り出した独自の石塔形式を引き継いだことは、8世紀に唐様式を受容しつつもエンタシスという三国時代以来の要素を固持したことと、意識において通底するものがあるかも知れない。




なお、エンタシスに関する議論については、前回のスレ『大寺のまろき柱の月影を』を改めて参照されたい。


신라 석탑의 계보

전회의 스레 「오테라나무기둥의 달빛을」 보다 파생하고, 존군에 의한 「신라는 (쿠다라)백제의 건축을 계승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고려와 삼국시대의 관계를 고려하는데 있어서, 삼국은 신라에 의해서 통일되고 있는 것부터, 통일 신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신라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그런데, 그 경우, 고려에 인계되는 것은, 「통일 신라」있다 있어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인하는 고려로서는, 복고 했다고 해도 (쿠다라)백제가 아니고, 「고구려」의 문화로 향해. (쿠다라)백제, 기회없음.w”


논점은 명쾌하다. 신라는 (쿠다라)백제의 건축 문화를 섭취했는지. 나의 주장은 YES. 그 근거로서 나는, 삼국시대에 있어서의(1) 출토 유물(문양이 있는 면, 치미)의 님 식적 유사, (2) 황룡사 축조에 걸리는 (쿠다라)백제 공장 장래의 기록, 그리고 통일 신라에 있어서의(3) (쿠다라)백제 석탑 형식의 섭취를 들었다. 이것에 대한 존군의 반론은 이하와 같다.

” 「신라는 통일 직후의 감은사 석탑으로부터 서서히 이 (쿠다라)백제의 형식을 이용하고 있어 이것이 이후의 주류 형식이 되어 가는 것이다.」(키릭
예, 7 세기 전반((쿠다라)백제 멸망 직전)에 할 수 있던 죠린지 석탑이 기원이 되고, 7 세기 후반에 문무왕(재위 661년 681년)이 건립한 감은사의 석탑이 생겼어? 진짜입니까 ? (짚
다른 한쪽을 「660년 이전」이라고 써, 다른 한쪽을 「7 세기말」이라고 쓰고, 비묘 시간차이를 이미지 시키는 고식적임이 멋지네요 w 이것은, 7 세기 중엽, 동시대의 석탑이 아닙니까?(웃음)

※ 덧붙여서, 소위 「(쿠다라)백제계」의 석탑과 「신라계」의 석탑은, 「지붕 부분의 휘어진 상태」및 「기단의 구조」등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hinomoto 의 분류 구분은 어디의 것과도 알려지지 않습니다.아마, 단지 외형적인 높이등에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 죄송합니다···도쿄 공대계의 사이트입니다만···
http://www1.hst.titech.ac.jp/nakanisi/k_archi/k112.html
「경주 가까이의 감은사지에 서는 동서2기의 석탑이다.2기의 탑은 동형 같은 대학의 전형적인 신라 님 식의 석탑이며, 이러한 석탑 님 식이 완성한 가장 빠른 시기의 석탑의 하나이다.」
죠린지 석탑과 동시대의 전형적인 신라 님 식의 석탑을 (쿠다라)백제식 인정 w
hinomoto , 파군요-입니다!w”




정직, 읽어 당분간 절구했다. 여기까지 머리의 나쁜 인간도 있던 것일까, 라고.

「신라 님 식이니까 (쿠다라)백제와 관계없다」――비유한다면 이 주장은, 나라·헤이안 시대의 일본 건축 님 식은「일본풍」이니까 중국과 관계없는, 이라고 하는 물건이다. 일본풍은, 나라시대에 중국 양식식을 도입해 형성되었다. 그럼 석탑의「신라 님 식」이란 언제 형성되었는지? 통일신라시대이다.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쿠다라)백제 석탑 형식의 수용에 의해서, 이다.

존군 스스로가 「동쪽 공대계의 사이트」라고 자신만만하게 내건 문장의 집필자, 나카니시 아키라씨. 씨는 그 저서 「한반도의 건축」(1989년) 속에서 이렇게 적는다.
「통일 신라의 석탑은 삼국시대로부터의 석탑의 전통을 계승해,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지만, 삼국시대의 석탑에는 (쿠다라)백제의 미로쿠지자취 석탑이나 죠린지자취5층 석탑과 같은 모`리조탑엽의 형태를 본뜬 것과 코신라의 분황사석탑과 같이 탑의 님 식을 흉내내 만들어진 것이 있었다.통일 신라의 석탑은 이 두 개의 전통을 융합해, 독특한 신라식의 석탑 님 식을 완성했다.」

이것이, 존군이 드야얼굴로 인용한 (곳)것의,「신라식 석탑」의 이유 있어이다. 이미 웃는 기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끝나도 좋지만, 하는 김에 신라 석탑의 님 식 형성에 대해 다소 설명해 두면, 여러분의 정확한 이해에 이바지하는 의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의 불사리를 안치하는 탑 건축의 루트는, 물론 중국에 있다. 중국 사원에 있어서의 불사리를 안치하는 탑 건축은 책등 있어 목조였지만, 6 세기부터 스트파를 본뜬 밀담식 불탑이나, 정자장의 정각식 불탑 등에 있어(벽돌)나 돌등의 무기 재료를 이용해 세우는 것이 나타나 한층 더 수당대에 이르러 누각식 불탑(이른바 층탑)에도 조의 것이 출현했다.현존예를 아래에 열거하면, 524년숭악사탑(밀담식탑, 현존 최고), 6 C불광사조사탑(정각식탑), 611 오곡을 지키는 신문사사면탑(정각식 석탑), 652년 지온사대안탑(누각식탑) 등.이러한 탑·석탑은 모두 조적식의 구법에 따르는 것으로, 직방체에 성형된 벽돌이나 석재를 다수 겹쳐 쌓는 구조를 개구리 `□{(으)로 한다.

   


그런데, 4 세기부터 6 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사원 건축 기술을 수용한 한삼국도, 당초는 오로지 목조탑을 짓고 있었지만, 7 세기에 들어가고, (쿠다라)백제에서는 미로쿠지와 죠린지, 신라에서는 분황사에 석탑이 지어졌다(고구려에서는 야스미7층의 석탑이 지어진 기술이 삼국유사로 보이지만, 미상).이 라제양국의 석탑 형식은, 많은 점으로 호대조를 이룬다.



신라 분황사의 석탑(634년, 경주)은, 언뜻 보기에 탑과 같이 보이지만, 실은 백과사전대에 잘라진 석판을 겹쳐 쌓아 만들어진, 「모석탑」이다.당대 이후에 중국에서 성행한 누각식탑의 모습을 돌에서도는 표현한 것으로, 이 시대의 신라의 당문화에 대한 강한 지향을 엿보게 한다.모석조라고 하는 구조상의 큰 특징에 가세해 생각상의 특징으로서는, 조적식 구조의 귀결로서의계단상의 지붕 표면이나,직선적인 얕은 채, 누각식탑의 특징인넓은 단층기단, 첫층에 설치된감실등을 들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쿠다라)백제의 석탑은,목조층탑의 모습을 석재에 의해서 표현한 것으로, 주·벽·횡가재·처마 밑의 두·지붕이라고 하는 목조 건축의 각부를 본뜬 부재를 개개에 성형해, 이것을 조립해 만들어진다.중국에도 선행 예가 없는 이러한 형식을 낳은 것은, (쿠다라)백제의 자국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기 가운데, 보다 시원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는(즉, 보다 직접적으로 목조 건축이 참조되고 있다) 미로쿠지 석탑(600-640해, 마스야마)에서는, 목조 건축 생각의 표현이 초석·중인방·소벽, 또 심주에까지 미치고 있지만, 죠린지 석탑(660년 이전, 부여)에서는 이러한 표현은 생략 되어 벌써 석탑 고유의 님 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각상의 특징으로서는,주석과 면석으로 만들어지는 탑신의 구조, 돌을 성형해 만드는평활한 지붕면, 및휘어진 상태를 가진 깊은 채, 목조탑의 기단을 반영한좁은 이중기단등을 기억해 두어 주셨으면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삼국시대의 상황이다.이 후 660년에 (쿠다라)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해 676년에는 당군도 철퇴하고, 통일 신라의 시대가 시작된다.



통일 신라 초기는/`A 님 식의 모색의 시대이다.이 시기의 석탑에서는, (쿠다라)백제의「목조탑을 본뜬 석탑」이라고, 코신라의「모석탑」의 제요소가 옛날 건축의 잔존물 마다 다른 배합으로 혼용되고 있는 상황을 간취 할 수 있다.그곳에서는 벌써 목조탑이나 탑은 직접적인 참조의 대상은 아니다.



감은사지3층 석탑(682년, 경주)은좁은 이중기단 위에별재로 주석을 세워 면석으로 벽면을 만들어, 계단상의 까치발 위에평활한 지붕면을 받는 등, 구조 형식은 죠린지 석탑에 모방하고 있다.단지, 보다 뼈 굵은 프로포션을 뽑는 점에서는 신라 독자적인 어레인지라고 볼 수도 있고, 처마 밑의 지송를 등간격으로 5단에 만드는 점은, 모석탑의 생각을 도입했을지도 모르다.고선테라이시탑(686년 이전)도 그 구조 생각은 거의 감은사와 동일하지만, 첫층 탑신에감실을 본뜬 선각이 있다 점으로 모석탑의 아쉬움을 둔다.

 


이것에 대해의성탑리5층 석탑(700년경)은, 주석과 면석으로 탑신을 구성하는 점에서는 전 2자와 동일하지만,계단상의 지붕면,넓은 단층기단,첫층 가게 몸의 감실이라고 하는 모석탑의 특징을 보다 현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 신라 초기의 모색을 거치고, 결국 주류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감은사 석탑의 님 식이었다.그주석과 면석에 의한 탑신구조,이중기단,평활한 지붕,5단의 지 보내등의 제요소는, 탑신부나 지 보내 부분을 도대체 성형하는, 석조에 맞춘 간략화를 거치고, 님 식의 완성을 본다. 이것이, 이른바「신라 님 식」이다.나원리 오층석탑(사진왼쪽, 8 세기, 이하 같다), 경주천군리3층 석탑(사진 중앙), 술정리3층 석탑(사진 오른쪽) 등 많은 옛날 건축의 잔존물이 있다 (안)중으로, 불국사 석가탑(사진 좌하, 8 세기 후반)은 그 최고 걸작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신라 님 식의 석탑은, 한층 더 시대가 구다 와 규모의 저소형화와 표현의 생략이 진행되어, 타카라바야시절3층 석탑(870년)으로 보여지도록(듯이), 기단의 형식도 간략화되어 간다.또 님 식의 완성에 따라, 정형으로부터의 일탈이 시도되어 불국사 다보탑(8 세기 후반, 사진 우상)과 같은 개성적인 형식의 석탑을 하거나 혹은 완성한 님 식 위에 조각등의 장식으로 감싸는 것이 활발히 행해졌다. 이러한 예로서는, 원원사3층 석탑, 진타데라3층 이시토우, 지츠소우지백장암3층 석탑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이 고려시대에, 신라 님 식으로서 계승해져 가게 된다.



덧붙여 코신라의 모석탑계의 요소를 둔 것도, 소수파면서 존재하는 것은 덧붙여 두자.예를 들어계단상의 낙수면을 가지는 남산리동3층 석탑(8 세기, 경주)이 그렇고, 또 게곤절4 사자3층 석탑(8 세기)에서는, 사자상 위를 타는 석탑은 역시 신라 님 식을 기본으로 하면서첫층 탑신에 감실이 조각하고.또 통일 신라 후기가 되면 실제로를 이용한 것도 나타난다. 안도 아라타세동7층탑(9 세기), 쇼린지5층탑(9 세기)등이 그 옛날 건축의 잔존물이다.

 


한층 더 고려시대가 되면, 석탑 님 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벗어나, 지방마다의 분화를 보이게 된다.수도 개성을 중심으로는얕은 채의 출·두꺼운 처마끝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식」의 석탑이 분포하는 한편, 충청·전라도 등 (쿠다라)백제의 고지에는깊은 채의 출·얇은 처마끝큰 체감율등, (쿠다라)백제 석탑에 유사한 생각을 가지는 「(쿠다라)백제식 석탑」이, 북부에는 고구려의 목조탑에서 선호된다각형 평면을 가지는 석탑 형식이, 각각 영위해지고 있다.고려시대의「신라식 석탑」이, 이것들에 대해서, 신라의 중심지인 경상도 지방에 계승해진 형식으로 있다의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이해한 (분)편 , 이 고려시대의 구분으로 「신라 석탑은 (쿠다라)백제와 관계없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존군 문장을 읽었을 때의, 나의 탈진을 공유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 후 서서히, (쿠다라)백제의 석탑 형식에 약간의 개변을 더했을 뿐의 감은사 석탑의 형식을, 주류 형식으로서 선택한 것은 왜일 것이다. 코신라의 모석탑이나, 그것과 (쿠다라)백제 석탑과의 절충인 의성탑리석탑과 같은 형식, 혹은 탑?`후의 것을 주류라고 해도 좋았기 때문에는 없는가.

생각해 보면, 신라는 우선 당과 연합 해 (쿠다라)백제·고구려를 멸했지만, 그 다음은 당군과의 전쟁에 8년을 소비해 통일을 이루어 있다.석재로 탑을 흉내내려고 하는 만큼, 당문화에의 강한 동경을 보이고 있던 코신라에 비해, 통일 신라가, 적어도 그 초기에 있고, 당과 그 문화에 대한 식은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신기하다는 없다.통일 신라가, (쿠다라)백제가 만들어 낸 독자적인 석탑 형식을 계승한 것은, 8 세기에 중국 양식식을 수용하면서도 엔타시스라고 하는 삼국시대 이래의 요소를 고집한 것과 의식에 대해 통저 하는 것이 있다일지도 모르다.


덧붙여 엔타시스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전회의 스레 「오테라나무기둥의 달빛을」을 재차 참조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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