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1、初代・東本願寺御影堂(1604年完成)

 

1602年、本願寺は東西に分裂した。

前回、1604年建立の御影堂は伏見城の遺構を改造したと書いたが、真宗本廟造営史では、それを示す資料がないとしている。

 

 

 

造営史に書かれた1604年建造御影堂(初代・東本願寺御影堂)の想像平面図

 

京大本「洛中絵図」によると、1604年御影堂は正面22間半、側面18間と記されているらしい。

とすれば、幅は1間6.5尺なら44m、奥行きは35mとなり、大通寺本堂よりずっと大きくなる。

縁側や落縁を抜いても正面は16間あるから、Gejinには4つの柱列が通っていた可能性が高くなり、西本願寺に先駆けてGejin5区分制を採用した、ということにもなる。

 

また、上の平面図からすると、Gejin内の柱がかなり省略されているので、各Gejin柱を繋ぐのは飛貫ではなく大虹梁だった可能性が出てくる。

ただ、こうなると、大通寺本堂が元・東本願寺の御影堂という話はどうなるのだろうか。

 

 

 

 

2、2代目・東本願寺御影堂(1658年完成、1788年焼失)

 

御影堂が現在の大きさになるのは2代目からである。

2代目御影堂は、桁行207尺、梁行149尺。要するに62.7m×45mである。

これに向拝や落縁、後堂を含めると数値はさらに拡大する。

現在の御影堂とほぼ同じ規模となった。

 

 

2代目御影堂及び阿弥陀堂の平面図

 

この図から分かるのは、柱間を大幅に拡大したことである。

従来までの御影堂は柱間6尺5寸をかなり忠実に守っていたが、2代目は縁側を除く正面11間のうち、中央7間が各16尺(約4.8m)、その左右2間もそれぞれ14尺。梁行の柱間も各18尺(5.45m)、矢来間が21尺(6.36m)と、非常に広い。

そして、この平面図を見れば、寸法だけでなく柱の位置も現在の御影堂とほぼ同じである。

 

要するに2代目御影堂は、規模や様式においてその後の御影堂のモデルになったことが分かる。

 

 

 

それでは、どうしてこのような巨大な建物を建てたのだろうか?

 

 

西本願寺御影堂、1636年

 

若くして東本願寺の法主となった宣如は、早くから大伽藍造営に熱意を持っていたようだ。

宣如は大伽藍造営の趣旨を「多くの人間が聴聞に訪れることが出来る場所を作ること、そして親鸞上人の御恩に報いる為であること」としている。

特に彼は熱心な親鸞信者だったらしく、親鸞を阿弥陀如来の化身だと考え、阿弥陀堂そっちのけで御影堂の造営に取り組んだ。

 

だが、初代でも44m×35mあったわけだから、これでも十分に大きい。

もしかすると、西本願寺がさらに大きな御影堂を建てたことに対抗心を燃やしたのかもしれない。

わざわざ西本願寺より大きな建物を建てているわけだから。

 

 

 

 

3、3代目東本願寺御影堂(1801年完成、1823年焼失)

 

2代目御影堂は、天明大火(1788年1月)によって焼失してしまった。残ったのは宝蔵と御蔵だけだったという。しかし、早くも3月には再建に向けて動き出した。

 

3代目御影堂は、再建の資料が非常に多く残されている。

 

 

 

「寛政度用材運搬図屏風」

 

 

1788年の暮れに再建計画が練られ、翌年に幕府と折衝して幕府直轄林の寄進を受けることも決定。1790年に地築が始まって再建が本格化した。

しかし、東本願寺が再建を本格化する前から、日本全国の門徒が再建に向けて動き出している。

 

東本願寺では、定期的に「御書」という文書を日本全国に発し、地方の門徒はそれを受け取って講読する「」が早くから発展していたが、伽藍焼失した際も、日本全国の門徒は直ちにそれを知った。

そして御書には、伽藍の再建は単に建物を再建することが重要ではなく、それを縁として信心を獲得することが重要だと書かれていた。

「今回の未曾有の災害は、迷いの凡愚を憐れんで悟りの道に至らせようという、仏の巧妙な方便である」と説かれ、再建に向けて積極的な支援を訴えたのであった。

 

 

 

「日向国楠子山・御牛木浜出行程之図」の一部

 

 

日本全国の門徒は、再建に向けて積極的に活動し、支援した。

木材の伐採や運送、資金面での支援。実際に全国から京都の本山に来る人も多く、焼けた伽藍跡には多くの信者が小屋を建てて寝泊りし、再建活動に身を捧げた。彼らの数は4000人にも達したという。

しかも、その4000人は、大工や石工などの職人を含まない数である。

 

伐採活動でも門徒が大活躍した。

これだけの用材の確保は遠山に分け入ることなしに不可能だったが、日本全国の門徒は進んでそれを引き受けた。それらの図や記録が残されているだけでなく、遠山奇談のように「門徒が遠山で大蛇と戦った」とか珍な記録も存在する。それだけ日本全国の注目を集めた再建だったと言えよう。

 

 

 

3代目御影堂側面図

 

 

 

「寛政6年御影堂柱出来図」、1794年1月作成

 

御影堂の柱の産地を記し、色分けして加工の状況を記録している。

赤く塗られたものは、既に加工が完了したことを意味する。

 

 

 

「寛政度御影堂虹梁出来図」

 

虹梁の産地と加工状況を記録した図である。

 

 

 

「寛政度御影堂小屋伏図」

 

土居桁、牛引梁、束踏、はね木の伐採地を記録している。産地のみを記した部分は、まだ木材が届いていないことを意味している。

 

 

つづく

 

 

 

 


동 혼간지 미카게당의 역사, 그 2

 

 

1, 초대·동 혼간지 미카게당(1604년 완성)

 

1602년, 혼간지는 동서로 분열했다.

전회, 1604년 건립의 미카게당은 후시미성의 옛날 건축의 잔존물을 개조했다고 썼지만, 마무네본묘축조사에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고 하고 있다.

 

 

 

축조사에 쓰여진 1604년 건조 미카게당(초대·동 혼간지 미카게당)의 상상 평면도

 

쿄토대책 「낙중 그림」에 의하면, 1604년 미카게당은 정면 22간반, 측면 18간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폭은 1간 6.5자라면 44 m, 깊이는 35 m가 되어, 오도리 테라모토당보다 훨씬 커진다.

툇마루나 락연을 뽑아도 정면은 16간 있으니까, Gejin에는 4개의 주렬이 다니고 있던 가능성이 높아져, 니시혼간지에 앞서 Gejin5 구분제를 채용했다는 일로도 된다.

 

또, 우에노타이라면도로부터 하면, Gejin내의 기둥이 꽤 생략 되고 있으므로, 각 Gejin기둥을 연결하는 것은 비관은 아니고 대홍량이었던 가능성이 나온다.

단지, 이렇게 되면, 오도리 테라모토당이 원·동 혼간지의 미카게당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 2대째·동 혼간지 미카게당(1658년 완성, 1788년 소실)

 

미카게당이 현재의 크기가 되는 것은 2대째로부터이다.

2대째 미카게당은, 도리 간수 207자, 량행 149자.요컨데 62.7 m吩 m이다.

이것에 향배나 락연, 후당을 포함하면 수치는 한층 더 확대한다.

현재의 미카게당과 거의 같은 규모가 되었다.

 

 

2대째 미카게당 및 아미다도우의 평면도

 

이 그림으로부터 아는 것은, 건축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큰폭으로 확대한 것이다.

종래까지의 미카게당은 건축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 6자 5치수를 꽤 충실히 지키고 있었지만, 2대째는 툇마루를 제외한 정면 11간 가운데, 중앙 7간이 각 16자( 약 4.8 m), 그 좌우 2간도 각각 14자.량행의 건축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도 각 18자(5.45 m), 울짱간이 21자(6.36 m)로 매우 넓다.

그리고, 이 평면도를 보면, 치수 뿐만이 아니라 기둥의 위치도 현재의 미카게당과 거의 같다.

 

요컨데 2대째 미카게당은, 규모나 양식에 대해 그 후의 미카게당의 모델이 된 것을 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러한 거대한 건물을 짓는 것일까?

 

 

니시혼간지 미카게당, 1636년

 

젊게 해 동 혼간지의 법주가 된 선여는, 일찍부터 대가람 축조에 열의를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선여는 대가람 축조의 취지를 「많은 인간이 청문에 방문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 그리고 신란 고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때문에(위해)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열심인 신란 신자라면 까는, 신란을 아미타 여래의 화신이라고 생각해 아미다도우 무시로 미카게당의 축조에 임했다.

 

하지만, 초대라도 44 m吟 m 있던 것이니까, 이것이라도 충분히 크다.

어쩌면, 니시혼간지가 한층 더 큰 미카게당을 세웠던 것에 대항심을 태웠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니시혼간지보다 큰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니까.

 

 

 

 

3, 3대째동 혼간지 미카게당(1801년 완성, 1823년 소실)

 

2대째 미카게당은, 텐메이 대화재(1788년 1월)에 의해서 소실해 버렸다.남은 것은 보장과 미쿠라 뿐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이미 3월에는 재건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3대째 미카게당은, 재건의 자료가 매우 많이 남아 있다.

 

 

 

「너그러운 정치도용재 운반도 병풍」

 

 

1788 연말에 재건 계획이 가다듬어져 다음 해에 막부와 절충 해 막부 직할숲의 기부를 받는 일도 결정.1790년에 지축이 시작되어 재건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동 혼간지가 재건을 본격화하기 전부터, 일본 전국의 문도가 재건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동 혼간지에서는, 정기적으로 「」라고 하는 문서를 일본 전국에 출발해, 지방의 문도는 그것을 받아 강독하는 「」이 일찍부터 발전하고 있었지만, 가람 소실했을 때도, 일본 전국의 문도는 즉시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서에는, 가람의 재건은 단지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인연으로서 신앙심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쓰여져 있었다.

「이번 전대미문의 재해는, 미혹의 범저를 불쌍히 여겨 깨달음의 길에 이르게 하자고 하는, 프랑스의 교묘한 방편이다」라고 말해져 재건을 향해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한 것에서 만났다.

 

 

 

「양지국남자산·우시기빈출행정지도」의 일부

 

 

일본 전국의 문도는, 재건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해, 지원했다.

목재의 벌채나 운송, 자금면에서의 지원.실제로 전국에서 쿄토의 모토야마에 오는 사람도 많아, 탄 가람자취에는 많은 신자가 오두막을 지어 숙박해, 재건 활동에 몸을 바쳤다.그들의 수는 4000명에게도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4000명은, 목수나 석공등의 직공을 포함하지 않는 수이다.

 

벌채 활동에서도 문도가 대활약했다.

이만큼의 용재의 확보는 토야마로 나누어 들어오는 것 없이 불가능했지만, 일본 전국의 문도는 진행되고 그것을 맡았다.그러한 그림이나 기록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토야마 괴담과 같이 「문도가 토야마로 큰뱀과 싸웠다」라고인가 진인 기록도 존재한다.그 만큼 일본 전국의 주목을 끈 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자.

 

 

 

3대째 미카게당측면도

 

 

 

「너그러운 정치 6년 미카게당주 할 수 있어 그림」, 1794년 1월 작성

 

미카게당의 기둥의 산지를 적어, 분류 해 가공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붉게 칠해진 것은, 이미 가공이 완료한 것을 의미한다.

 

 

 

「너그러운 정치도 미카게당홍량 할 수 있어 그림」

 

홍량의 산지와 가공 상황을 기록한 그림이다.

 

 

 

「너그러운 정치도 미카게당오두막복도」

 

도이 자리수, 우인량, 속답, 쳐 나무의 벌채지를 기록하고 있다.산지만을 적은 부분은, 아직 목재가 도착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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