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さて、阿弥陀如来をじっくりと拝見した後、入口付近に置いてあった本や冊子を手にとって読んでいた。

すると、住職さんが出てこられ「もう拝観されないんですか?」と言って、やや強制的に扉を閉じられた。

 

立ち読みに気分を害されたのだろうが、こちらもあまり気分が良くない。

 

 

 

阿弥陀堂の前に薬師堂がある。

因みに、法界寺の本尊は阿弥陀如来ではなく、薬師如来。

従って、法界寺の本堂は薬師如来を安置する薬師堂である。

このお寺が「日野薬師」と呼ばれる所以だ。

 

 

 

「薬師堂」(本堂)、1456年の建立で重要文化財

 

この建物は、明治時代に奈良の伝燈寺本堂を移築したものである。

元の薬師堂は阿弥陀堂の東側に建っていたらしいが、早くに焼失している。

 

 

 

   薬師堂の平面図

 

薬師堂は幅5間、奥行き4間のオーソドックスな建築である。

手前1間をgejinとし、厨子が安置されるnaijinと厳重に仕切っている。

奥行きの浅い建物ながら、内部を密教仏堂的に仕切る仏堂は、奈良にいくつか見られる。

 

 

 

 

   

「薬師如来立像」、1051年の作品で重要文化財

 

法界寺の本尊。

創建当初は、この薬師如来像の体内(胎内)に、9cmの小さな薬師如来像を納めていた。

その小さな薬師像は最澄が自ら刻んだ像と伝えられ、日野家に相伝したものだったという。

 

その霊験あらたかな小さな薬師像を包み込む形で、この薬師如来像が造立されたのである。

当時は霊験を帯びた像を仏像の体内に入れたり、厨子に永久に閉じ込めておくことで、さらに霊験が増すと信じられていた。簡単に拝見できるのでは駄目なのである。

 

また、仏像を体内に入れているためか、この仏像は古くから女性の信仰を集めてきた。

安産への祈りだけでなく、母乳が出なくて悩む女性も、この仏像を熱心に信仰すれば母乳が出るとも言い伝えられ、「乳薬師」という名前も付けられた。

 

 

 

薬師如来立像の材質はサクラ。

サクラを使うのは清涼寺・釈迦如来の影響らしい。

頭部、体部ともに前後に割り矧ぎ、内部を内刳りして9cmの薬師像を入れる棚を設けている。

顔は穏やかで、11世紀の和様仏像風だが、衣の襞に鋭い鎬が残り、古風な所も見える。

 

・・・と言っても実際に見た訳ではなく、現在でもこの仏像は開かれる事がない厨子に安置されており、拝観する事が出来ない。

今も秘仏として霊験を保っているのである。

 

 

 

「日光・月光菩薩立像」、14世紀初頭の作品

 

これはどう見ても創建当初(1051年)の仏像ではない。

目に玉眼を嵌め込み、金箔ではなく金泥で仕上げる。

玉眼に金泥の組み合わせは快慶が始めたものだが、服装は賑やかで如何にも宋風、鎌倉時代後期の作風が顕著に現れている。

薬師堂は1215年と1301年に燃えたらしく、日光月光菩薩は1301年に焼失してしまったのだろう。

因みに、この仏像も厨子に安置され、秘仏となっている。

 

 

 

「十二神将立像」、鎌倉時代前期の作品で重要文化財

 

写真は十二神将の一部。

元の十二神将は1215年の火災で焼失したらしい。

作風は動きが激しく、表情が豊かだが、やや誇張気味である。

胴長短足の像が多いのは、当時の日本人の体つきを忠実に表しているからだという。

 

十二神将も秘仏である。

 

 

さて、法界寺の伽藍をもう一度。

 

阿弥陀堂や薬師堂の手前に池が広がるが、何か中途半端である。

薬師堂も本来は境内の東にあって、現在のように阿弥陀堂の前に窮屈に立っているのは不自然だ。

もしかすると、阿弥陀堂建立当時、池は阿弥陀堂の前面を覆っていたのかも知れない。

そうであれば、阿弥陀堂が水面に映り、極楽浄土の雰囲気も出てくるだろう。

 

今は極楽浄土ではなく、ひっそりと阿弥陀堂と薬師堂が佇む田舎の寺院として、法界寺は存在していた。

 

 

終わり

 

 

 


호우카이지, 그 3

 

그런데, 아미타 여래를 차분히 본 후, 입구 부근에 놓여져 있던 책이나 책자를 집어 읽고 있었다.

그러자(면), 주직씨가 나와져서 「더이상 배관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고, 약간 강제적으로 문을 닫혀졌다.

 

서서 읽음에 기분을 해쳐졌을 것이다가, 이쪽도 너무 기분이 좋지 않다.

 

 

 

아미다도우의 앞에 약사당이 있다.

덧붙여서, 호우카이지의 본존은 아미타 여래가 아니고, 약사 여래.

따라서, 호우카이지의 본당은 약사 여래를 안치하는 약사당이다.

이 절이 「히노 약사」라고 불리는 소이다.

 

 

 

「약사당」(본당), 1456년의 건립으로 중요문화재

 

이 건물은, 메이지 시대에 나라의 전등사 본당을 이축한 것이다.

원래의 약사당은 아미다도우의 동쪽으로 세워지고 있던 것 같지만, 빨리에 소실하고 있다.

 

 

 

   약사당의 평면도

 

약사당은 폭 5간, 깊이 4간의 전통적인 건축이다.

앞 1간을 gejin로 해, 두개의 문짝이 달린 궤가 안치되는 naijin와 엄중하게 나누고 있다.

깊이의 얕은 건물이면서, 내부를 밀교 불당적으로 나누는 불당은, 나라에 몇개인가 볼 수 있다.

 

 

 

 

   

「약사 여래 입상」, 1051년의 작품으로 중요문화재

 

호우카이지의 본존.

창건 당초는, 이 약사 여래상의 체내(태내)에, 9 cm의 작은 약사 여래상을 납입하고 있었다.

그 작은 약사상은 최징이 스스로 새긴 상과 전해져 히노가에 상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영험 뚜렷한 작은 약사상을 감싸는 형태로, 이 약사 여래상이 조립 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영험을 띤 상을 불상의 체내에 들어갈 수 있거나 두개의 문짝이 달린 궤에 영구히 가두는 것으로, 한층 더 영험이 늘어난다고 믿을 수 있고 있었다.간단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안된다.

 

또, 불상을 체내에 넣고 있기 위해인가, 이 불상은 옛부터 여성의 신앙을 모아 왔다.

순산에의 기원 뿐만이 아니라,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하는 여성도, 이 불상을 열심히 신앙하면 모유가 나온다고도 전해져 「젖약사」라고 하는 이름도 붙일 수 있었다.

 

 

 

약사 여래 입상의 재질은 사쿠라.

사쿠라를 사용하는 것은 세이료지·샤카 여래의 영향인것 같다.

머리 부분, 체부 모두 전후로 나누어 신, 내부를 안파임 해 9 cm의 약사상을 넣는 선반을 마련하고 있다.

얼굴은 온화하고, 11 세기의 일본풍 불상풍이지만, 옷의 벽에 날카로운 호가 남아, 고풍스러운 곳도 보인다.

 

···이렇게 말해도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현재에도 이 불상은 열리는 것이 않는 두개의 문짝이 달린 궤에 안치되고 있어 배관 할 수가 없다.

지금도 밀교로서 영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닛코·월광 보살 입상」, 14 세기 초두의 작품

 

이것은 어떻게 봐도 창건 당초(1051년)의 불상은 아니다.

눈에 옥안을 끼워넣어, 금박은 아니고 금니로 마무리한다.

옥안에 금니의 편성은 쾌경이 시작한 것이지만, 복장은 떠들썩하고 과연 송풍,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작풍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약사당은 1215년과 1301년에 불탄 것 같고, 닛코 월광 보살은 1301년에 소실해 버렸을 것이다.

덧붙여서, 이 불상도 두개의 문짝이 달린 궤에 안치되고 밀교가 되고 있다.

 

 

 

「십이신장 입상」,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중요문화재

 

사진은 십이신장의 일부.

원래의 십이신장은 1215년의 화재로 소실한 것 같다.

작풍은 움직임이 격렬하고, 표정이 풍부하지만, 약간 과장 기색이다.

몸통 장단다리의 상이 많은 것은, 당시의 일본인의 몸매를 충실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이신장도 밀교이다.

 

 

그런데, 호우카이지의 가람을 한번 더.

 

아미다도우나 약사당의 앞에 연못이 퍼지지만, 무엇인가 어중간하다.

약사당도 본래는 경내의 동쪽에 있고, 현재와 같이 아미다도우의 앞에 거북하게 서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아미다도우 건립 당시 , 연못은 아미다도우의 전면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다.

그렇다면, 아미다도우가 수면에 비쳐, 극락 정토의 분위기도 나올 것이다.

 

지금은 극락 정토가 아니고, 적막하게 아미다도우와 약사당이 잠시 멈춰서는 시골의 사원으로서 호우카이지는 존재하고 있었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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