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まずこの写真で得ることができる情報はまず下の説明にまず 1904年 近くのソウルというのが分かる.

写真だけ見て凡そ 得る ことがあることは

 

1. 遠くソウルの西の方山である仁王山があるので仁王山から洞方へかなり落ちた場所.

2. 瓦屋根が密集したソウルの中心場所である可能性が高い. 説明の ¥“near center¥”

3. 取った場所はテラスがある洋式建物, 丘でも建物でも高い場所.

4. 何より重要なことは 指標になる人工的な建築物. すなわち景福宮なのに 一番高い建物である光化門と勤政殿が見えている. 屋根の形態を見れば対角線と見える姿を見せている. 目で大まかに測定すれば 45度内外だ.

 

 

 

 

 次は北岳山まで出る写真.

 この写真には光化門がやっぱりほとんど同じな角度で見えているし屋根の選科旗竿を基準で周辺の瓦屋根の形態が同じことで見てこの写真は上の写真のような場所に取ったことだと 推測される.  ただカメラが志向する方向だけちょっと違うだけだ.

 

 

 

 

 

明洞聖堂建設当時の写真.

 写真を撮った場所は南山が始まる坂近くで取ったようなのに 2番(回)写真に見える北岳山に比べて上の写真はもうちょっと正面に近い. もちろん明洞聖堂南側で取ったことではあるが明洞聖堂で取っても大きい違いはなさそうだ. もちろん人の目には限界があるのでこれだけで 100%と言わない.

 

 

 

 

 同じ場所で取ったことで見当がつく 1, 2番(回)写真で推測した光化門で約45度で引き継いだ線は波瀾 三角形の対角線部分だ.

 

 

 赤い船は光化門で明洞聖堂で引き継いだ線だ. もし明洞聖堂で北岳山を眺めたらもうちょっと正面的な姿であるはずで青い対角線近くで見ればもうちょっと側面積な姿であるでしょう. 2番(回)写真と 3番(回)写真を比べると 3番(回)写真の北岳山がずっと遠く見えてもっと正面に近い姿だ. 南山近くで撮った写真だということを勘案しても言葉だ.

 

 

 

 

 写真は明洞聖堂の北面だ. nisiokatuyosiが 3928番(回)掲示物に出した明洞聖堂写真は この写真の 反対側だ. 北岳山を眺めることができる方向はこちらだ. 洋式建物という条件には当たるがまずここにテラスが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ず左側の明洞聖堂本館は構造上可能性が低い.

 

 

 右側の部属建物は可能性があったように見えるが角に柱がある. そして写真に切られた部分もあるがこの部属建物が対称構造を見せているので角に柱があるでしょう. 側面も思うことができるが側面に決まった間隔で柱が見える. あり得る可能性なら欄干が突き出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たぶんこの建物みたいなのに今の残っている建物が補修などで構造がちょっと変わっても突き出欄干である可能性はよほど稀薄に見える.

 

 そして下に開かれた瓦屋根たちがなければならないが写真にはバッガッは空所も見えてわらぶきも見える. もし写真の切られた部分で撮ったらこの写真ではわからないが町内がぽつりぽつりと空所にわらぶきがある途中急に密集した瓦屋根が開かれないだろう.

 

 

 

 

 

 

 この写真で見れば瓦屋根たちも見えるが明洞聖堂前に横町ではない結構広い道が過ぎ去る. 問題になった 1, 2番(回)写真にこの位広さの道は見えない.

 

 

 

 

 明洞聖堂が立てられる前の姿で部属建物である師弟官だけある状態だ. まん前ではやっぱり空所が多くて屋根たちも 1, 2番(回)写真のような伝統韓屋構造の屋根たちではない. この写真では全然密集された韓屋瓦屋根たちが見える写真の場面を演出することができない.

 

 

 

 

 

 写真は明洞聖堂南側なのに日本人家屋たちで見える. 当時ソウルの都市構造を考えて見たら西の方で東に流れる清渓川を基準で北を北村, 南側を南村だと呼んだ. 今の景福宮と昌徳宮の間の坂面には高位官僚たちの住いが形成されていて景福宮先方には官庁が密集された六朝距離(通り)が形成されていて都市の中央に鍾樓がある. その周辺では商業地区が形成されている.

 

 清渓川南側である南村には沒落両班や零細な庶民が住んだ. 今の明洞は畑みたいな空き地が多かったが日本人たちがこれを買い入れて自分たちの住いを形成し始めた. 明洞聖堂周辺は南大門と繋がれた道は結構煩雑だがどの位南大門と距離(通り)があることで写真の密集した韓屋を形成する可能性が低い.

 

明洞聖堂である可能性の低い理由は

 

1. 景福宮や北岳山が見える距離(通り)と方向と違う.

2. 明洞聖堂構造上写真のようなテラスが設置されにくい.

3. 当時明洞は密集した韓屋屋根を形成しにくい外れ地域だ. 写真でも確認になる.

 

 


명동성당이 아닌 이유

 

 

 우선 이 사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우선 밑의 설명으로 우선 1904년 근처의 서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만 보고 대충 얻어낼 수 있는 것은

 

1. 멀리 서울의 서쪽 산인 인왕산이 있으므로 인왕산으로부터 동쪽으로 꽤 떨어진 장소.

2. 기와지붕이 밀집한 서울의 중심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설명의 "near center"

3. 찍은 장소는 테라스가 있는 서양식 건물, 언덕이든 건물이든 높은 장소.

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표가 되는 인공적인 건축물. 즉 경복궁인데 가장 높은 건물인 광화문과 근정전이 보이고 있다. 지붕의 형태를 보면 대각선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눈으로 대충 측정하면 45도 안팎이다.

 

 

 

 

 다음은 북악산까지 나오는 사진.

 이 사진에는 광화문이 역시 거의 같은 각도에서 보이고 있고 지붕의 선과 깃대를 기준으로 주변의 기와지붕의 형태가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위의 사진과 같은 장소에 찍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만 카메라가 지향하는 방향만 약간 다를 뿐이다.

 

 

 

 

 

명동성당 건설 당시의 사진.

 사진을 찍은 장소는 남산이 시작되는 비탈 근처에서 찍은 것 같은데 2번 사진에 보이는 북악산에 비해 위의 사진은 좀 더 정면에 가깝다. 물론 명동성당 남쪽에서 찍은 것이기는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찍어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것으로만 100%라고 하지는 않겠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것으로 짐작되는 1, 2번 사진으로 추측한 광화문에서 약45도로 이은 선은 파란 삼각형의 대각선 부분이다.

 

 빨간선은 광화문에서 명동성당에서 이은 선이다. 만약 명동성당에서 북악산을 바라본다면 좀 더 정면적인 모습일 것이고 파란 대각선 근처에서 보면 좀더 측면적인 모습일 것이다. 2번 사진과 3번 사진을 비교하면 3번 사진의 북악산이 훨씬 멀어보이고 더 정면에 가까운 모습이다. 남산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사진은 명동성당의 북쪽면이다. nisiokatuyosi가 3928번 게시물에 낸 명동성당 사진은 이 사진의 반대편이다. 북악산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이쪽이다. 서양식 건물이라는 조건에는 맞지만 우선 여기에 테라스가 있어야 한다. 우선 좌측의 명동성당 본관은 구조상 가능성이 낮다.

 

 우측의 부속건물은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모서리에 기둥이 있다. 그리고 사진에 잘린 부분도 있지만 이 부속건물이 대칭구조를 보이고 있으므로 모서리에 기둥이 있을 것이다. 측면도 생각할 수 있지만 측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보인다.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난간이 돌출하고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 건물같은데 지금의 남아있는 건물이 보수 등으로 구조가 약간 바뀌었더라도 돌출 난간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해 보인다.

 

 그리고 밑에 펼쳐진 기와지붕들이 있어야 하겠지만 사진에는 밭같은 공터도 보이고 초가집도 보인다. 만약 사진의 잘린 부분에서 찍었다면 이 사진으로는 알 수 없지만 동네가 드문드문 공터에 초가집이 있다가 갑자기 밀집한 기와지붕이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진으로 보면 기와지붕들도 보이지만 명동성당 앞으로 골목길이 아닌 제법 넓은 길이 지나간다. 문제가 되었던 1, 2번 사진에 이 정도 넓이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명동성당이 세워지기 전의 모습으로 부속건물인 사제관만 있는 상태다. 바로 앞으로는 역시 공터가 많고 지붕들도 1, 2번 사진과 같은 전통 한옥구조의 지붕들이 아니다. 이 사진으로는 전혀 밀집된 한옥 기와지붕들이 보이는 사진의 장면을 연출할 수 없다.

 

 

 

 

 사진은 명동성당 남쪽인데 일본인 가옥들로 보인다. 당시 서울의 도시 구조를 생각해 본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비탈면에는 고위 관료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고 경복궁 앞쪽에는 관청이 밀집된 육조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도시의 중앙에 종각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청계천 남쪽인 남촌에는 몰락 양반이나 영세한 서민이 살았다. 지금의 명동은 밭 같은 빈 땅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이것을 매입하고 자신들의 주거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명동성당 주변은 남대문과 연결된 길은 제법 번잡하겠지만 어느 정도 남대문과 거리가 있는 것이고 사진의 밀집한 한옥을 형성할 가능성이 낮다.

 

명동성당일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1. 경복궁이나 북악산이 보이는 거리와 방향과 틀리다.

2. 명동성당 구조상 사진과 같은 테라스가 설치되기가 어렵다.

3. 당시 명동은 밀집한 한옥지붕을 형성하기 어려운 변두리 지역이다. 사진으로도 확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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