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灰被天目 銘 虹

黒釉陶器の碗(中国、13・14世紀の作品)

 

中国・唐の時代、青磁や白磁が最高の焼き物とされ、黒釉陶器はもっぱら庶民の日常器であった。

ところが、次の五代や宋の時代になると、「茶を嗜むには黒釉碗が最高である」という新しい価値観が

出現した。

その黒釉碗は、福建省の建安を第一として中国各地で作られ、曜変天目のような素晴らしい茶碗も

出現するに至る。

 

 

ファイル:Eisai.jpg

栄西(1141年生まれ、1215年没)

 

ところで、日本に喫茶の習慣を伝えたのは、栄西のような中国に渡った僧侶だった。

時あたかも南宋の時代、中国で黒釉碗がもてはやされていた時代だった。

このような黒釉陶器は日本にも大量にやってくることになったが、黒釉碗の最高峰とされる

曜変天目も、鎌倉時代末期には既に知られていた。

(平安時代初期から中期の頃も、中国から喫茶の法が伝えられていたようであるが、

内容を深く知る事はできない)

 

 

国宝「曜変天目」

 

現在、黒釉碗の最高峰とされた「曜変天目」が存在するのは世界に3個(もしくは4個)だけであり、

その全部が日本に存在し、中国には1つも存在しない。

 

曜変天目は室町時代、日本で最高の価値を獲得した茶碗である。

黒の中に星状の斑点が浮かび、その周囲に瑠璃色や紅色の光沢が取り巻く、まるで宇宙の景色の

ような外観を特徴とし、見る者を碗の中に引き込む魔力を秘めている。

 

曜変天目の再現は永らくうまくいかなかったが、最近、福建省の建陽市(建安)の土を使用したところ、

かなり近いものが出来たらしい。

 

 

 

曜変天目以外にも、油滴・禾目・灰被などの天目がある。

(用語の分類は難しい。中世ではKensan、天目、茶碗という分類が使われ、Kensanが最も

ランクが高く、それに天目、茶碗が続いた。曜変はKensanの中でも最高ランクにされている。

因みにKensanの名前は福建省・建安で焼かれた碗から来ている。)

 

 

Kensanの1つに数えられた油滴

 

 

吉州窯のTaihi天目は建安の窯のものではないが、中世の分類ではこれもKensanに分類された。

 

ところが、1550年代から70年代にかけて、価値観が大きく変わる。

今まで曜変、油滴などのKensanを最上としていたのが、中ランクに位置していた天目(今で言う

灰被天目など)が最高ランクに抜擢されたのである。

 

「灰被天目」、写真は伊達政宗が所持していた碗

 

この時代(16世紀半ば)、Kensanは評判を落とし、逆に写真のような灰被天目がもてはやされる

ようになる。中には5000貫文(現在では5億円位か)で取引された物も出現する始末だった。

 

どうしてこのような質素な天目が注目されたのか?

それは、わび・さび的な茶の湯(わび茶)の台頭を抜きには語れないだろう。

15世紀には村田珠光が、16世紀前半には武野紹鴎が登場し、質素で静粛な中に美を求める

気運が高まりつつあった。

 

ファイル:TakenoJoo.jpg

武野紹鴎(1502年生まれ、1555年没)

 

 

わび茶が16世紀から台頭するにつれ、一躍価値を認められたものがある。

それは、葉茶を入れる保存容器の壺(大壺)や、抹茶を入れる小壺である。

 

写真は中国の壺で、ただの日常生活上の雑器に過ぎなかったものである。

このような壺は中世の日本に大量に輸入され、葉茶の保存容器として使用された。

初めは1個1貫文から3貫文の値段で取引されたが、16世紀末には1個10000貫文の茶壷まで

登場したという。

 

 

 

 

書院飾りでも、茶壷は重視される(写真は今井町の古民家)。

葉茶の保存容器にも、美的価値が見出されたのである。

 

 

小さな壺は抹茶を入れる容器(茶入)として使われたが、これにも容器以上の価値が見出され、

16世紀に価格が急上昇する。

蓋は日本で付けられたもので、象牙が使われた。

 

 

 

ただし、注意すべきは、1580年代前半までは「唐物絶対主義」が横行していたこと。

要するに中国製品(主に宋・元の時代の製品)が専ら尊重され、日本製品は全く重視されなかった。

天目も瀬戸で焼かれたが、主役に登場することはなく、せいぜい名主クラスの人間が使用する

程度のものだった。

茶壷や茶入も、中国の物であればこそ、価値が与えられたのであった。

 

それが完全に覆されたのが、1586年である。

1586年、どういうわけか中国の製品が脇に追いやられ、変わって日本製や朝鮮製のものが

尊重され出したのである。

それを先導したのが千利休であり、豊臣秀吉もこの流れを支持したのだ。

 

千利休(1522年生まれ、1591年没)

 

1586年以降、Kensan、天目、茶碗のうち、最もランクが低いとされた茶碗が最高ランクに

到達する(ただし、灰被天目も引き続き重要視された)。

中でも、高麗茶碗の1つである「井戸茶碗」と、初代長次郎が創出した「楽茶碗」が評価された。

 

 

陶製茶碗 銘筒井筒

井戸茶碗「銘 筒井筒」

 

豊臣秀吉は朝鮮の井戸茶碗を愛用した。写真の筒井筒は実際に秀吉が使用したものである。

 

 

黒楽茶碗「銘 大黒」、16世紀末の作品で重要文化財

 

茶碗が最高ランクに到達し、それまで脇に追いやられていた日本製の焼き物も、

一気に主役に躍り出たのであった。

 

この後、単にわび・さびに留まらない、遊び心とエネルギーに溢れた桃山時代の焼き物文化が

花開くのである。

 

 

 

終わり

 


중세 일본의 밥공기의 변천

회피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명 홍

흑유도기의 완(중국, 13·14 세기의 작품)

 

중국·당나라 시대, 청자나 백자가 최고의 구이로 여겨져 흑유도기는 오로지 서민의 일상기였다.

그런데 , 다음의 고다이나 송의 시대가 되면, 「차를 즐기려면 흑유완이 최고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출현했다.

그 흑유완은, 푸젠성의 건안을 제일로서 중국 각지에서 만들어져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과 같이 훌륭한 밥공기도

출현하기에 이른다.

 

 

파일:Eisai.jpg

요우사이(1141 년생, 1215년몰)

 

그런데, 일본에 끽다의 습관을 전한 것은, 요우사이와 같은 중국에 건넌 승려였다.

시 마치 남송의 시대, 중국에서 흑유완이 칭찬받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흑유도기는 일본에도 대량으로 오게 되었지만, 흑유완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도,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중기의 무렵도, 중국으로부터 끽다의 법이 전하고 있던 것 같지만,

내용을 깊게 아는 일은 할 수 없다)

 

 

국보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현재, 흑유완의 최고봉으로 여겨진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이 존재하는 것은 세계에 3개(혹은 4개) 뿐이어서,

그 전부가 일본에 존재해, 중국에는 1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은 무로마치 시대, 일본에서 최고의 가치를 획득한 밥공기이다.

흑안에 성장의 반점이 떠올라, 그 주위에 유리색이나 홍색의 광택이 둘러싼다, 마치 우주의 경치의

같은 외관을 특징으로 해, 보는 사람을 완안으로 끌여들이는 마력을 은밀한이라고 있다.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의 재현은 오랫동안 잘 되지 않았지만, 최근, 푸젠성의 건양시(건안)의 흙을 사용했는데,

꽤 가까운 것을 할 수 있던 것 같다.

 

 

 

요변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이외에도, 기름 방울·화목·회피등의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이 있다.

(용어의 분류는 어렵다.중세로는 Kensan,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밥공기라고 하는 분류가 사용되어 Kensan가 가장

랭크가 높고, 거기에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밥공기가 계속 되었다.요변은 Kensan 중(안)에서도 최고 랭크로 되고 있다.

덧붙여서 Kensan의 이름은 푸젠성·건안으로 구워진 완으로부터 와있다.)

 

 

Kensan의 하나로 꼽힌 기름 방울

 

 

길주 가마의 Taihi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은 건안의 가마의 것은 아니지만, 중세의 분류에서는 이것도 Kensan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 15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치고, 가치관이 크게 바뀐다.

지금까지 요변, 기름 방울등의 Kensan를 최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 안랭크에 위치하고 있던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지금에 말한다

회피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등)이 최고 랭크에 발탁 되었던 것이다.

 

「회피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사진은 다테 마사무네가 소지하고 있던 완

 

이 시대(16 세기 중반), Kensan는 평판을 떨어뜨려, 반대로 사진과 같은 회피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이 칭찬받는다

같게 된다.안에는 5000관문(현재는 5억엔정도인가)으로 거래된 것도 출현하는 시말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검소한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이 주목받았는가?

그것은, 사죄해·녹슬어적인 다도(사죄차)의 대두를 빼기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5 세기에는 무라타 주코가, 16 세기 전반에는 다케노 조오가 등장해, 검소하고 정숙한 안에 미를 요구한다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파일:TakenoJoo.jpg

다케노 조오(1502 년생, 1555년몰)

 

 

사죄차가 16 세기부터 대두하는 것에 따라, 일약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엽차를 넣는 보존 용기의 항아리(대항아리)나, 가루차를 넣는 소항아리이다.

 

사진은 중국의 항아리로, 단순한 일상생활상의 잡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있다.

이러한 항아리는 중세의 일본에 대량으로 수입되어 엽차의 보존 용기로서 사용되었다.

처음은 1개 1관문으로부터 3관문의 가격으로 거래되었지만, 16 세기말에는 1개 10000관문의 차 단지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서원 장식에서도, 차 단지는 중시된다(사진은 이마이쵸의 고민가).

엽차의 보존 용기에도, 미적 가치가 찾아내졌던 것이다.

 

 

작은 항아리는 가루차를 넣는 용기(다입)로서 사용되었지만, 이것에도 용기 이상의 가치가 찾아내져

16 세기에 가격이 급상승한다.

뚜껑은 일본에서 붙일 수 있던 것으로, 상아가 사용되었다.

 

 

 

다만, 주의 해야 할 것은, 1580년대 전반까지는 「외국 도자기나 직물 절대 주의」가 횡행하고 있던 것.

요컨데 중국 제품(주로 송·원의 시대의 제품)이 오로지 존중되어 일본 제품은 전혀 중시되지 않았다.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도 세토로 구워졌지만, 주역에게 등장할 것은 없고, 겨우 훌륭한 군주 클래스의 인간이 사용한다

정도의 것이었다.

차 단지나 다입도, 중국의 물건이기 때문에, 가치가 주어진 것에서 만났다.

 

그것이 완전하게 뒤집어졌던 것이, 1586년이다.

1586년, 어찌 된 영문인지 중국의 제품이 겨드랑이에 쫓아 버려져 바뀌어 일본제나 조선제의 것이

존중되어 냈던 것이다.

그것을 선도했던 것이 센리큐우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흐름을 지지했던 것이다.

 

센리큐우(1522 년생, 1591년몰)

 

1586년 이후, Kensan, 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 밥공기 가운데, 가장 랭크가 낮다고 여겨진 밥공기가 최고 랭크에

도달한다(다만, 회피다도에서 가루차를 마시는 찻잔도 계속해 중요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 밥공기의 하나인 「고려의 밥공기의 하나」라고, 초대 쵸지로가 창출한 「락밥공기」가 평가되었다.

 

 

도제

고려의 밥공기의 하나 「명관우물의 안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고려의 밥공기의 하나를 애용했다.사진의 관우물의 안벽은 실제로 히데요시가 사용한 것이다.

 

 

흑락밥공기 「명대흑」, 16 세기말의 작품으로 중요문화재

 

밥공기가 최고 랭크에 도달해, 그것까지 겨드랑이에 쫓아 버려지고 있던 일본제의 구이도,

단번에 주역에게 뛰어 오른 것에서 만났다.

 

이 후, 단지 사죄해·녹에 머물지 않는, 놀고 싶은 마음과 에너지에 흘러넘친 모모야마 시대의 구이 문화가

꽃 벌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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