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歴史を正しく伝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心盛られて…お父さんも被害者

(ソウル=連合ニュース) ハンミフィ記者 = ¥“1938年 2月 21日. 今日楽しい外出だ. 石川と二人で先に朝鮮征伐に行く. 順序では四番目だった…昔の恋人に似ているチオコを尋ねた. 泣いて本当に悲しく見えた.¥”

¥“1938年 3月 13日. 外出行く楽しい日だ. 先に仲間と慰安所に行った. 日本, 中国, 朝鮮を征伐して帰る. おでん店でお酒を飲んで酔った.¥”

2次大戦に参戦した日本陸軍第6社団所属のMutoあき理(1915年生まれ) 分隊長の日誌(日記帳)だ. 彼は日本軍慰安所へ行く事を ¥”楽しい外出¥”で, 慰安婦女性を犯す事を ¥”征伐¥”で表現した.

Mutoあき理さんは 2007年 92歳の年で世を去った. それから 3年後, 息子である市民活動家田中Nobuyuki(59) さんがこのおこるのを入って玄海灘を渡った. 韓国従軍慰安婦問題対策協議会が建立を推進する ¥”戦争と女性人権博物館¥”に寄贈するためだ.

17日挺身隊対策協事務室で会った田中さんは父親のおこるのを含めて浮び上がったブチンイフソングされた時戦場の仲間から受けた 300余通義手紙と写真などを取り出しておいた.

Mutoさんが息子におこるのを初めて見せてくれたことは 1995年. 田中さんは私に見せてくれればどうなるか分かりながらそんなになさったことはこのおこるのを (世の中に) 公開しても良いという意味で受け入れたと言った.

1970年代私が大学を通う時有名なルポライターが使った ¥”日本軍¥”という本を読みました. あの時までお父さんは自分が戦争に出て良いことをしたと言ったが, 日本が侵略したと言うその本を読み上げたら ¥”もしお父さんもそうするのではないか¥” と思う考えをするようになったんです.

田中さんはあの時から現在慰安婦問題解決のための運動をする妹さんとお父さんと一緒に日本の戦争責任に対する話をたくさん交わしたと言った.

彼はお父さんは ¥”どうして侵略戦争に加わったか¥”と言う言葉を聞けば人間として不正あう感じを受けていらっしゃったとどうしてそうだったかと計算するよりお父さんは戦争に出る前にどんな人生を暮したかったのか問ったと言った.

お父さんはプロレタリア文学をたくさん読んだしファシズム反対活動もしました. 兵士になってから憲兵に監視もたくさん受けたと言ったんです. お父さんが元々持っていた考えが分かるようになりながら私も反転運動に参加したからお互いに理解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私は ¥”お父さんの戦争責任を一緒に負うこと¥”と宣言したし, その話を聞いておこるのを見せてくれたようです.

彼は幼い頃はお父さんが軍隊経験をよく話したし, 息子として私はそれが誇らしかった. 私も中学校の時まではミリタリズム少年だったと回想した

 

 

 

田中さんが日本の侵略歴史と韓日関係に対して関心を置くようになったことは 1970年代在日海外同胞であるギムウチォル・李哲兄弟スパイ事件だった. 彼は兄弟救援の集まりに参加して兄弟が北へ行ったと言う日熊本デパートで時計を買ったという証拠を韓国に送ったりした.

それとともに在日韓国人と分かるようになったし南北分断に日本の責任があり歴史をまた思うようになったと言った.

以後 1997年始まった日本の歴史歪曲教科書問題に関心を置いて, 中学校教科書に慰安婦に対する技術を削除しなさいという熊本県議の決定に対立して姉妹都市である忠清南道市民と一緒に活動して結局削除しない教科書を守り出した.

彼の名刺には ¥”危ない教科書を子供達に与えない県民連絡係事務局長¥”, ¥”平和憲法をいかす県民の集まり事務局次長¥”, ¥”明成皇后を思う集まり¥”, ¥”独立記念館歴史研修ツアー施行委員会代表¥” など四種類肩書きが書かれている.

彼はお父さんが直接的に表現しなかったが, 自分がいつ死ぬかも知れないからこの資料を後世に伝えなくちゃいけないと言うメッセージを私に送ったと歴史を正しく伝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心がここに盛られていると思うと言った.

多くの日本人はその時期には仕方なかったと話すが私はその言葉が嫌です. お父さんも戦争を否定する時期があったと信じたんです. 彼はプロレタリア文学を読んで世の中を変えたがりました. お父さんも歴史の被害者であることですよ. お父さんの若い時期に私が一緒にいたらそんな考えを広げることができたでしょうにそうでないのが惜しいです.


`위안소 정벌" 부친 일기 기증한 일본인

"역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마음 담겨…아버지도 피해자"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1938년 2월 21일. 오늘 즐거운 나들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에 간다. 순서는 네 번째였다…옛 연인을 닮은 치오코를 찾아갔다. 울어서 정말 슬퍼 보였다."

"1938년 3월 13일. 나들이 가는 즐거운 날이다. 먼저 동료와 위안소로 갔다. 일본, 중국, 조선을 정벌하고 돌아간다. 오뎅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 육군 제6사단 소속의 무토 아키이치(1915년생) 분대장의 일지(일기장)다. 그는 일본군 위안소에 가는 일을 "즐거운 나들이"로, 위안부 여성을 범하는 일을 "정벌"로 표현했다.

무토 아키이치 씨는 2007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들인 시민운동가 다나카 노부유키(59) 씨가 이 일지를 들고 현해탄을 건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건립을 추진하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서다.

17일 정대협 사무실에서 만난 다나카 씨는 부친의 일지를 비롯해 부상한 부친이후송됐을 때 전장의 동료로부터 받은 300여 통의 편지와 사진 등을 꺼내 놓았다.

무토 씨가 아들에게 일지를 처음 보여준 것은 1995년. 다나카 씨는 "나한테 보여주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 일지를 (세상에) 공개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1970년대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유명한 르포라이터가 쓴 "일본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자신이 전쟁에 나가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었는데, 일본이 침략했다고 말하는 그 책을 읽고 나니 "혹시 아버지도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다나카 씨는 그때부터 현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는 여동생과 아버지와 함께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왜 침략 전쟁에 가담했느냐"는 말을 들으면 인간으로서 부정 당하는 느낌을 받고 계셨다"며 "왜 그랬냐고 따지기보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는지 물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많이 읽었고 파시즘 반대 활동도 하셨습니다. 병사가 되고 나서 헌병한테 감시도 많이 받았다고 했죠. 아버지가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알게 되면서 저 역시 반전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전쟁 책임을 같이 질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일지를 보여주신 것 같아요."

그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군대 경험을 자주 이야기했고, 아들로서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군국주의 소년이었다"며 회상했다

 

 

 

다나카 씨가 일본의 침략 역사와 한일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970년대 재일교포인 김우철ㆍ이철 형제 간첩사건이었다. 그는 형제 구원 모임에 참여해 형제가 북에 갔다고 하는 날 구마모토 백화점에서 시계를 샀다는 증거를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재일교포들과 알게 됐고 남북 분단에 일본의 책임이 있으며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1997년 시작된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삭제하라는 구마모토 현의회의 결정에 맞서 자매도시인 충청남도 시민과 함께 활동하며 결국 삭제하지 않은 교과서를 지켜냈다.

그의 명함에는 "위험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주지 않는 현민 연락계 사무국장", "평화헌법을 살리는 현민 모임 사무국 차장",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독립기념관 역사 연수 투어 시행위원회 대표" 등 네 가지 직함이 적혀 있다.

그는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 자료를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메시지를 나한테 보내셨다"며 "역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많은 일본인은 그 시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 말을 싫어합니다. 아버지도 전쟁을 부정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믿었죠.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읽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역사의 피해자인 거죠. 아버지의 젊은 시기에 내가 같이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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