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昔の 慶州に 大城という息子を 持った女人が住んでいた. 家が非常に貧しくてその息子は金持ちで仕事をして畑を得て生活した. ある日金持ちに僧侶が来て施主に切って 50匹をもらって行きながらその金持ちに満杯の福を得て安楽を享受するようになるものと言った. それを見た息子はお母さんを説得して貧しい暮しに持った畑を施主したしいくら後その息子は死んだ.

 その晩国の宰相ギムムンリャング家に空でその子供が生まれるはずだという話が聞こえた. ギムムンリャングは人を送って確認するから果してその子供は死んだし奥さんは姙娠して子供を生んだら名前を 大城といったし貧しい前世のお母さんを家に連れて来て暮すようにした.

 子供は大人になった後狩りが好きだった. ある日山で熊を狩って夜に近くの村に泊まるようになったが夢にその熊が現われて殺そうと思って過ちを謝るとそれなら自分のために寺を作ってくれと言ってした. その後熊のために寺を作って狩りをしなかったし 仏心が深くなった.  そして現在の親のために仏国寺を建てて前世の親のために石窟庵を建てた.  

 

 

 

 751年に仏国寺を創建し始めて 774年金大星が死んで以後国で工事を終えた. この内容は高麗時代の僧侶一然がつけた三国有史に出る ので彼は仏国寺の陸橋と石塔はその木と石に刻んだ努力が 東都の多くの査察の中でいずれよりすぐれると言った.

 朝鮮時代にも何回も補修に対する記録が出て学者キムシスッブ(1435〜1493)は ‘仏国寺’という 詩の一句節で “石整えて作った階段小さな池押すように, 高くて低い樓閣たち 蓮池にアロングジだね.”と歌ったし, 1580年競走を旅行したイドックホングは “岩の上に 蓮池があって, 池北に木雨どいの卑賎が修理を流れて 石槽に落ちていた. 卑賎を越して陸橋に至ったらアイロンをかける石を削って虹のようだった. 門に立ち入ったら 殿閣と石塔と昔の仏像などが千態万象で奇妙なのに皆新羅の遺物だ.”と 少なかった.  

 

 

 1593年 5月競走にこちらに侵入した日本軍が 地蔵殿に朝鮮軍が隠しておいた弓と刀を見て火をつけて 2000間の建物と宝物たちは大部分火に燃えてしまった. 戦争以後 1604年に復旧が始まって以後記録にだけ 40余順番が超える創建と補修に対したことを少ない. 1767年朴種が仏国寺を参拜しながら記録を残したが  ...完全ではなくて, やっとその制度だけ残っているが技巧がすごかったことを分かる. 石物, 樓閣, 仏殿が 10分の 1万残っている. 残ったことがこのように奇妙で美しいから, 新羅がこれを初めて創建した当時の文物はいくらきらめき輝いて美しかっただろうか? たいてい想像するのに十分であることがある. と言った.

 

 火に燃えた以後王妃といろいろな人たちの後援に倦まず弛まず再建されて来たが 1805年の 毘廬殿 重修 記録を終りに  記録に登場しないで以後何の事があったのかわからない.

 

 

 以後仏国寺は日本人たちがよく引用する写真で見るように廃墟に変わったし日帝時代日本人が観光地で開発しながら前に鉄道ホテルを建てて何回も仏国寺を修理したが調査, 研究が不十分な状況での土木工事で部分的に変形をもたらした. 以後独立になって朴正煕大統領が 集権しながら本格的に仏国寺復元計画を建てるようになる.

 朴正煕は 慶州で遠くない欧米出身で 慶州によほど関心を持ったようだ. 63年大統領選挙開票当時とどまっていた所が前に言及した仏国寺ホテル(鉄道ホテル)だったし在職当時古墳発掘を指示して観光地で開発したし政策的に文化事業を後援した. しかし当時国が貧しかったから費用問題でコンクリートで作ることを指示したが学者たちが日本の 四天王寺 などを踏査してコンクリート復元の問題点を持って反対して木造で修復することに決めたし 1969年から復元事業が進行されて 1973年に完成した.

 元々 80ヨドングの建物があったと言うのに今の姿はよほど規模が小くなった姿だ. 今の姿でもまたは復元される前でもあばらな姿でも仏国寺の 大石壇とドルゾガックドルは残って全盛期新羅の 文化を想像するのにそんなに難しさがない. 個人的な考えでは 復元をしなくても仏国寺の姿はその姿どおり価値があったはずだ. 廃墟であるパルテノン神殿を修復すればこそギリシアの文化を感じ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そうに破壊された姿でもそれなりどおり価値があって想像力だけで満たすことができる部分もあるからだ.

 

 

 

 仏国寺は義務教育を受けた韓国人なら大部分分かっている韓国の代表的な漬けてユネスコ世界遺産だ. 韓国人には学生時代修学旅行で先生に引っぱれて ¥”優秀な¥” 韓国の文化を確認する 所で ここに日本人たちには廃墟になった仏国寺で朝鮮の仏教弾圧の象徴で ¥”劣等な¥” 朝鮮の文化を確認する所でもある. こんな視覚では仏国寺の価値をまともに盛り出すことができない. 分かる位見えるもので無条件的な讃揚でも無条件的な卑下彼 どれでも作品を鑑賞する正しい姿勢になることができずに本質で遠くなるのだ.

 

 

 仏国寺の木造建築は朝鮮時代の物とか現代に復元されたことなのに問題点がないのではないが復元も大きく無理がなくて朝鮮時代建物も無難だ. しかし仏国寺で目を注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木造建物ではない石で作られた彫りたち科絶義全体的な構成, 象徴性だと言える. 仏国寺を初めて建立する時金大星の意図は仏国土を建築的に再現することでこれは西洋の教会平面が十字架模様をしていることのように教理を象徴的に具現するため どの宗教建築でも見られる悩みの跡たちだ.

 

 

 仏国寺の中心領域である大雄殿領域 庭先には二つの石塔がある. 塔は元々は部処の墓で祈ることで部処を象徴する. この二つの搭は 妙法蓮華経の 見宝塔品に出る話を建築的に表現したことで西の方の釈迦塔は釈迦如来を, 東の多宝塔は多宝如来を象徴して大雄殿には釈迦部処があって三つの構造物が経典の内容どおりお互いを証明している. 多宝塔の姿が経典に派手で複合的に表現されているのによほど複雑な内容を複合したイメージで現わしたのが多宝塔で韓国の他の塔にはない唯一で特殊な 様式をあげている.

 これと反対に釈迦塔は新羅が統一を した後 初めて石塔の典型が確立された以後比例と工法の実験を繰り返えして作られた完成された典型的な新羅塔の完成型だと言える. こんな古典と浪漫, 規範と個性, 形式と自由, 抽象と構想, 男性と女性などに表現される極端的要素たちが一つの庭先で統合されたことは当時新羅が文化的に最前性器にあったから可能だったろう.

 

 

 大雄殿領域西の方には西側極楽世界を駐在する阿彌陀如来の面倒を見た極楽殿領域があるのに大雄殿領域に比べて規模が小さくて庭先には石燈一つだけ何らの 塔が立てられていない. ここの主人は華厳経に登場する 阿彌陀仏で涅槃に入らなかったから墓だと言える塔がある数 ない.  

 

 

 極楽殿領域を上がる階段は蓮華橋と七宝橋でその上の正門である 安養門を連結しているのに 安養は極楽のもう一つの名前だ. 蓮華橋と七宝橋という名前は極楽世界が蓮華と七宝で飾られていることを意味するのに実際に階段に蓮華切れが今も鮮明だ.

 

 

 

 仏国寺の 大石壇は山が始まる緩い坂に建物をあげるための機能的な側面もあるが象徴的には天上の世界に入る壁でその正常が 須彌山なのに 泛影樓がこれを意味する.  須彌梵鐘閣とも言ってその頂上の樓閣には 108人が座ることができると言ったし 108はすぐ白八煩悩を意味する. それを差している須彌山柱は木造建物の恐怖を石という材料の特性に相応しくされた高度の抽象的な形態なのによほど独特だ. 天上に上がる階段は青雲橋と白雲橋で 33階段は 33天の世界を意味する.

 

 

 観音殿領域は東一番高い所に位してここで眺めれば多宝塔と歩廊で分けられた大雄殿領域と講堂が見える. 法華経に基づいて中国大陸の東にあるという 補陀落山 世界を現わしたし 毘廬殿 領域は華厳経によって 蓮華蔵 世界を現わした. 今の仏国寺は大雄殿領域, 極楽殿領域, 観音殿領域, 毘廬殿 領域で分けることができるがもっと多い領域が存在したし歩廊で分けられているそれぞれ閉鎖的な部分領域たちは自主的に完結された一つの建築で表現した経典だったしそれが集まって一つの大きな部処の国, 仏国寺を成していた.

 

 

 

 仏国寺の最大の特徴だと言える 大石壇は浮石寺や他の住んでから査察でも見られるが大きい冷たくは仏国寺は人工美を適切に具現したことなのに 石を木のように 長く整えて合わせてネモカンを作ってその中に他の大きさの自然石を満たした. 南側の階段部分は精巧に整えた石で合わせて人工美を具現したし大雄殿領域の前の石段には自然石を積んでその上のデコボコした 模様に合わせて削った人工席で挟んで下の団を完成して人工美と自然美が調和を成すようにしたし極楽殿領域とレベルの差を置いて 泛影樓の突き出させて立体的に構成しながら単純な中変化を与えて絢爛たる感じを与えるがよくよく見れば全体的に整然としている感じを与える.

 大石壇 の前には極楽浄土思想によって人間が来世に極楽にある池を通じて 9個の等級に往生するという 九品蓮池があったが今は補われた状態だ. 吐含山から流れて来た水は 2番(回)写真に出た施設物と違う木官で池に流れこんだし朝に池で立ち上る霧の上に浮かんでいる仏国寺は言葉とおり仏国土だったろう.

 

 

 

 


부처의 나라, 불국사

 옛날 慶州에 大城이라는 아들을 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그 아들은 부잣집에서 일을 하여 밭을 얻어 생활하였다. 어느날 부잣집에 승려가 와서 시주로 베 50필을 받아가면서 그 부자에게 만배의 복을 얻고 안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것을 본 아들은 어머니를 설득하여 가난한 살림에 가진 밭을 시주하였고 얼마 뒤 그 아들은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 집에 하늘에서 그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문량은 사람을 보내 확인하니 과연 그 아이는 죽었고 부인은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大城이라 하였고 가난한 전생의 어머니를 집에 데려와 살게 하였다.

 아이는 어른이 된 뒤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날 산에서 곰을 사냥해 밤에 근처의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꿈에 그 곰이 나타나 죽이려고 하여 잘못을 빌자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그 뒤 곰을 위해 절을 짓고 사냥을 하지 않았으며 佛心이 깊어졌다.  그리고 현재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  

 

 

 751년에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774년 김대성이 죽고 이후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이 내용은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그는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은 그 나무와 돌에 새긴 노력이 東都의 여러 사찰 중 어느 것보다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여러차례 보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학자 김시습(1435∼1493)은 ‘불국사’라는 詩의 한 구절에서 “돌 다듬어 만든 계단 작은 연못 누르듯, 높고 낮은 누각들 蓮池에 아롱지네.”라고 노래하였고, 1580년 경주를 여행한 이덕홍은 “바위 위에 蓮池가 있고, 연못 북쪽에 나무 홈통의 비천이 수리를 흘러 石槽에 떨어지고 있었다. 비천을 넘어 구름다리에 이르니 다리는 돌을 깎아 무지개와 같았다. 문으로 들어서니 殿閣과 석탑과 옛 불상 등이 천태만상으로 기이한데 모두 신라의 유물이다.”고 적었다.  

 

 

 1593년 5월 경주에 이 곳에 침입한 일본군이 地藏殿에 조선군이 숨겨둔 활과 칼을 보고 불을 질러 2000칸의 건물들과 보물들은 대부분 불에 타 버렸다. 전쟁 이후 1604년에 복구가 시작되어 이후 기록에만 40여 차례가 넘는 창건과 보수에 대한 것을 적고 있다. 1767년 박종이 불국사를 참배하면서 기록을 남겼는데 " ...온전하지 못하고, 겨우 그 제도만 남아 있지만 기교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石物, 누각, 佛殿이 10분의 1만 남아 있다. 남은 것이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우니, 신라가 이를 처음 창건한 당시의 문물은 얼마나 찬란했을까? 대개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 하였다.

 불에 탄 이후 왕비와 여러사람들의 후원으로 꾸준히 재건되어 왔지만 1805년의 毘盧殿 重修 기록을 끝으로  기록에 등장하지 않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후 불국사는 일본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사진에서 보듯 폐허로 변하였고 일제시대 일본인이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앞에 철도호텔을 세우고 여러 차례 불국사를 수리하였는데 조사, 연구가 불충분한 상황에서의 토목공사로 부분적으로 변형을 초래하였다. 이후 독립이 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국사 복원계획을 세우게 된다.

 박정희는 慶州에서 멀지않은 구미 출신으로 慶州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63년 대통령 선거 개표 당시 머무르고 있었던 곳이 앞에 언급한 불국사호텔(철도호텔)이었고 재직 당시 고분발굴을 지시하고 관광지로 개발했으며 정책적으로 문화사업을 후원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비용문제로 콘크리트로 만들 것을 지시했지만 학자들이 일본의 四天王寺 등을 답사하고 콘크리트 복원의 문제점을 들어 반대하여 목조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였고 1969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1973년에 완성하였다.

 원래 8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모습은 상당히 규모가 작아진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이라도 또는 복원되기 전이라도 황폐한 모습이라도 불국사의 大石壇과 돌조각들은 남아 전성기 신라의 문화를 상상하는데 그렇게 어려움이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원을 안 해도 불국사의 모습은 그 모습대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폐허인 파르테논 신전을 복원해야만 그리스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파괴된 모습이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상상력으로만 채울 수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불국사는 의무교육을 받은 한국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절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한국인에게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에서 선생님에게 끌려다니며 "우수한" 한국의 문화를 확인하는 곳이며 여기 일본인들에게는 폐허가 된 불국사로 조선의 불교탄압의 상징으로 "열등한" 조선의 문화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으로는 불국사의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무조건적인 찬양이든 무조건적인 비하 그 어떤 것이든 작품을 감상하는 올바른 자세가 되지 못 하고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불국사의 목조건축은 조선시대의 것이거나 현대에 복원된 것인데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원도 크게 무리가 없고 조선시대 건물들도 무난하다. 하지만 불국사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목조건물이 아닌 돌로 만들어진 조각들과 절의 전체적인 구성,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국사를 처음 건립할 때 김대성의 의도는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이것은 서양의 교회 평면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교리를 상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어느 종교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고민의 흔적들이다.

 

 

 불국사의 중심영역인 대웅전 영역 마당에는 두 개의 석탑이 있다. 탑은 원래는 부처의 무덤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부처를 상징한다. 이 쌍탑은 妙法蓮華經의 見寶塔品에 나오는 이야기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서쪽의 석가탑은 석가여래를, 동쪽의 다보탑은 다보여래를 상징하고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있어 세 구조물이 경전의 내용대로 서로를 증명하고 있다. 다보탑의 모습이 경전에 화려하고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복합한 이미지로 나타낸 것이 다보탑으로 한국의 다른 탑에는 없는 유일하고 특수한 樣式을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석가탑은 신라가 통일을 한 뒤 처음 석탑의 전형이 확립된 이후 비례와 공법의 실험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완성된 전형적인 신라탑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고전과 낭만, 규범과 개성, 형식과 자유, 추상과 구상, 남성과 여성 등으로 표현되는 극단적 요소들이 하나의 마당에서 통합된 것은 당시 신라가 문화적으로 최전성기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대웅전 영역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전 영역이 있는데 대웅전 영역에 비해 규모가 작고 마당에는 석등 하나 뿐 아무런 탑이 세워져 있지 않다. 여기의 주인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아미타불로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탑이 있을 수 없다.  

 

 

 극락전 영역을 오르는 계단은 연화교와 칠보교로 그 위의 정문인 安養門을 연결하고 있는데 安養은 극락의 또다른 이름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라는 이름은 극락세계가 연꽃과 칠보로 장식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계단에 연꽃조각이 지금도 선명하다.

 

 

 불국사의 大石壇은 산이 시작되는 완만한 비탈에 건물을 올리기 위한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며 그 정상이 須彌山인데 泛影樓가 이를 의미한다.  須彌梵鐘閣이라고도 하고 그 정상의 누각에는 108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고 108은 곧 백팔번뇌를 의미한다. 그것을 받치고 있는 수미산 기둥은 목조건물의 공포를 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진 고도의 추상적인 형태인데 상당히 독특하다.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은 청운교와 백운교로 33계단은 33天의 세계를 의미한다.

 

 

 관음전 영역은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여기서 바라보면 다보탑과 회랑으로 나뉘어진 대웅전 영역과 강당이 보인다. 法華經에 의거하여 중국대륙의 동쪽에 있다는 補陀落山 세계를 나타내었고 毘盧殿 영역은 화엄경에 의해 蓮華藏 세계를 나타내었다. 지금의 불국사는 대웅전 영역, 극락전 영역, 관음전 영역, 毘盧殿 영역으로 나눌 수 있지만 더 많은 영역이 존재하였고 회랑으로 나뉘어져 있는 각각 폐쇄적인 부분 영역들은 자체적으로 완결된 하나의 건축으로 표현한 경전이었으며 그것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부처의 나라, 불국사를 이루고 있었다.

 

 

 불국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大石壇은 부석사나 다른 산지 사찰에서도 볼 수 있지만 큰 차이는 불국사는 인공미를 적절하게 구현한 것인데 돌을 나무처럼 길게 다듬어 짜맞추어 네모칸을 만들고 그 속에 다른 크기의 자연석을 채웠다. 남쪽의 계단부분은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맞추어 인공미를 구현하였고 대웅전 영역 앞의 석단에는 자연석을 쌓고 그 위의 울퉁불퉁한 모양에 맞추어 깎은 인공석으로 끼워 아랫단을 완성하여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를 이루게 했고 극락전 영역과 레벨의 차이를 두고 泛影樓의 돌출시켜 입체적으로 구성하면서 단순한 가운데 변화를 주어 현란한 느낌을 주지만 잘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정연한 느낌을 준다.

 大石壇 앞에는 극락정토사상에 따라 인간이 내세에 극락에 있는 연못을 통해 9개의 등급으로 왕생한다는 九品蓮池가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진 상태이다. 토함산에서 흘러온 물은 2번 사진에 나온 시설물과 다른 나무관으로 연못에 흘러들었고 아침에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위에 떠있는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불국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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