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경성 일보 1917.2.3-1917.2.4(타이쇼 6)
조선의 소방은 이렇게 진보했다 [(1・2)]

[(1)]옛날 사용한 기발한 도구는 겸, 겸, 두레박
메이지 40년( 구한국륭희원년) 헌병 고문 마루야마겹šœ씨가 한국 궁중에 소방대를 편성했을 때까지는 조선에는 소방대 또는 소방조 되는 것은 없었던 우도 당시 일본인 측에는 경성, 인천, 부산, 목포, 히로시양, 원산, 대구, 신의주등에 이사청소속의 소방조가 있었지만 어느 쪽도 자국 거류민만의 화재 예방 기관인에 지나지 않았던 그 후 협약에 의해라고 일한 경찰 기관 합일 해 헌병 고문 중지할 수 있어서 한국내부 헌병국이 전국의 경찰 사무를 처리하는 것처럼 되었을 때 지금의 아이치현 지사 마츠이 시게루씨가 부산 이사관보다 헌병 국장에 전임 하고 처음으로 소방 조직을 각지방에 장려해 기설 이사청소방조에 대해서는 설비의 개선을 재촉하고 있던 동안 또 들일한 협정의 결과 소방 사무의 주관은 헌병 총감부가 되었지만 총감부는 헌병국 시대 이상으로 설치와 개선을 장려해 민중도 점구다른 필요를 느껴 와 의 것으로 총감부 개시 당시는 전도 통해 근에 39조의 소방조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로는 7백십5조의 다수에 이른 그렇게 해서 종래의 소방조는 부락의 조합 조직이었지만 작년 총독부령의 소방조규칙이 발포되고 나서 지등은 모두 헌병 부장의 직권에 의는 설치된 경찰의 기관이 되어 헌병 총감부가 전체를 통일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소방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구한국 시대 의 한국인은 어떤 소화 방법을 해 있었는지와 말하는에 기록의 징 해야 하는 것은 없지만 전설이나 유물에 의는 왼쪽의 여러 가지 점이 엿봐진다

군대 화재 경방
이조 개국의 처음부터 화재에는 군대를 출동일이 되어 있어 개국4백 78년(메이지 3년) 훈련도감, 금위영, 영청총융영, 용호영등의 군대에 겸, 초, 인강, 통, 두레박등의 소방도구를 갖추었지만 출동에 즈음해서는 많은 상관을 거쳐 허가를 유리한 차면 되지 않는 것으로다른 사이에는 화재는 사라지면 말하는 시말이므로 한번도 출동한 일이 없다고 한다 또 오른쪽등의 군대중에 순찰군과 말하는 것이 있어 경성 시내를 아즈마, 니시, 미나미, 키타쥬우의 5구에 나누어 야간 10시 후 각 구를 순찰 하고 비상을 훈계해 및 인민의 멋대로 외출하는을 금지했다고 말하는 일이다

왕궁 화재 예방 설비
왕궁내에 무예소 되는 것이 있어 궁전의 수위지에 둔 해 전기 군대와 같은 방화도구를 준비 위병과 아이스는 왕궁의 화재 예방에 임명했지만 하등인가의 사정으로 화재가 있어도 실제 활동한 일은 없었다고 하는 헌병청시대 개국 5백1년(메이지 21년) 포도청을 대신해 헌병청이 설치되어 경성 시내의 헌병서에 방화도구로서 겸, 초등 갖출 수 있었던 지는 순검(순경)을 해 사용괄이었지만다른 대칼집 무게가 순검 혼자서는 취급 겸했으므로 사용하지 않았던 (와)과 말하는 일인다른 유물은 지금 헌병부 상비 소방대에 보존되어 있다(계속된다)

[(2)] 화재를 막은 급수군의 단대 =경기도 헌병부 소방 주임 오구마 경부의 담=

조선의 궁전
관아기외대 되는 건물의 구내에는 하스이케라고 칭해 주위를 돌에서 쌓아 올린 (분)편 형태의 연못이 있는 지는 악수 배제 (위해)때문에 째라고 말해 또 방화용으로 마련한 저수지라고도 말하지만 후자의 분 적당한 것 같고 실제로 륭희2년(메이지 41년) 한국도 지부 건축소의 화재에 지금의 상비 소방대가 이지수에 의는 대 되는 편의를 얻은 창덕궁 구내에는 옛날 그대로의 이하스이케가 남아 있어 또 경기도청구내에도 간직해 있지만 도청은 지에 가공해 정지로서 풍치를 더해 있는 조선의 관변으로의 방화 계획은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연등은 인민은 어째서 화재를 막았지만과 말하는에 시가지에는 급수군과 말하는 물긷기 인부의 단체가 있어 각 거래처의 줄장을 소유다른 줄장내의 화재에는 물을 참작해 공급 하지 않으면 안되는과 말하는 자연의 제도가 완성되어 있던 거기서 재가 수준으로다른 부근은 급수군에서 물을 얻어 통의 같은 것으로 지를 불 속에 걸쳐 안에는 전을 철 있어 급수군의 물을 독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하는 일인 어떤에 이시대포도청에 포도군관(형사)과 말하는 것이 있어 화재장에 임해 양민(백성)을 방화 혐의자로서 체포해 뇌물의 다과에 의는 방면을 여 파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모처럼 소방 해 있는 인민도 포도군관의 그림자를 보면 화재현장을 버려 도망쳐 끝났다고 말하는 일인 또 한국인에게는 운`호재때 부인의 단(속옷)을 간장에 담그어 지를 옥상에 거절해 회와 연소해 오지 않는과 말하는 미신이 있다고 하지만 지는 전혀 미신은 아니어서 소금이나 불을 지우는 자연의 리의 기부를 실제 한 것이다고 생각하는 일본인급시나인의 소방도 처음은 자국 거류민 보호를 위해서 마련했지만 마침내는 국별로 상관하지 않고 화재 있으면 출동하게 된 약 해 이시 조선 측에 소방 설비가 있었다면 외국인이 자신의 영토에 소방 경찰을 거절해 회일에 첨부라고 이의를 신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당시 일청과도 소방 기구는 완용 펌프에 지나지 않았지만 부산키는 증기펌프2대 갖추어 있던 옛날 경성의 일본 공사관에 대비한 구식 소화 펌프형의 펌프가 이마홈마치 경찰서에 유는 있지만 옆측에 일본 공사관과 대자의 조각이 있고 당시를 이야기해 있는 한국인의 소방 조직을 창의 것은 전술대로(광무 11년 메이지 40년) 5궁소방대의 편성인 당시 궁중호충대보다 60명을 선발해 소방손으로 해 기구는 수년 와 궁중에 격납되어 있던 내지제완용 펌프를 수리하고 지에 충당한 당시는 수리하는 공장도 직공도 없기 때문에 주임 경부 스스로 혹대장장이 공장으로 향해 가 수리한 다음으로 제복도 할 수 있어 훈련도 1으로 대로 베풀었지만 궁중에 허있어 실제의 훈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임 경부가 인솔 해 시중의 화재에 출동하는 일이 된 최초로 시전`봉후 소방에 종사한 것은 메이지 42년 미나미야마쵸국취루의 화재때에 이시 시작해 한국인의 당상소방대 되는 것이 있는 것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후 헌병 고문 중지할 수 있어서 궁중 소방대가 경시청의 소관이 되고 나서는 시내의 화재 경방이 본무가 되어다른 활동하는에 따라 기세 의용 소방조로 충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처음은 대부분(거의) 출동마다 충돌해 상비대의 지휘관은 신변을 호위 다투어져서 개개지휘한 일도 있었지만 그 후당비대는 총감부의 직속이 되어 경성 소방조도 총감부의 소관이 되어 일치하고 일에 맞는 것처럼 되고 나서는 경성 소방조에는 총감부 직할의 상비대를 마련해 또 총감부 상비대도 신에 내지인 소방 손봐 또 내선인 소방손을 증원 그 후 각 대조와도 훈련 및 기구의 개량을 저울질이라고 차례차례 발전해 경기도 헌병부 소관의 현금으로는 경성 후나이의 소방은 상비 소방수힐소 시치카소 인원백십삼명의용소방조5조3백 38명으로 해 소화 기계는 증기펌프 발동기 펌프 각 1대 수관 마차2대 기계 마차 1대 기계 사다리2대 그 외 수관차약간을 비 팔기에 이른 소방의 성적은 헌병 총감부 개시 당시의 화재보험료율 천엔에 첨부 23엔이든지 하지도의 점차 체 내려 현금은 6엔의 저율을 나타낼 정도의 좋은 성적을 나타내기에 이른 병 해 경성 시내는 날에 늘어나 다이켄축물 증가해 내지식 취약 가옥의 집단지도 역증운`치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현금의 소방 성적을 유지에는 출동 간편하게 해 도저 신속히 한편 사용 간단한 소화 기계를 더욱 속에 준비급수도 이외의 수리도 준비때문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고심인 인천은 메이지 39년 이래 몇 년간 대화재 빈출 해 한때는 사종에도 화재일까하고 놀라 화재보험 회사는 인천의 보험은 인수하지 않는과까지 말했을 정도에서 만났지만 메이지 42년 서장 미야다테 경시는 취임 제일저에 소방의 개량을 기도 해 예도다른 계획에 참가를 명령받아 먼저 증기펌프를 구입해 다음으로 저수지를 마련해 결국 상비대를 두는 일이 되어 오늘로는 시민은 대부분(거의) 화재를 잊어 화재보험율도 경성과 동률이 되었지만 상비대의 인원인가 매우 적기 때문에 아직도 안심과는 말해질 수 없는 이호카히라양, 부산, 목포등에는 상비 소방대의 서로 마련해 또 부산원산에는 증기펌프의 설비가 있지만 부산은 소방으로부터 보면 위험 가옥의 집단지이기 때문에 지금 일단 소방 설비를 진보필요가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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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왕조 실록으로「궁전」의 화재는 80회 정도,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넷에서 보았다).에도성그 자체의 화재는 36회.후리소데(예복) 화재 이후는 거의 작은 불로 멈추고 있지만.

왕궁이라든지의 기록이라면 실록으로 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A도시 전체의 재해까지 조사하는 것은 만드크세.앞으로 , 1930년대라면 동아일보의 DB에 신문 기사가 상당히 남아 있지만 읽는 것도 만드크세.
원래, 한국측의 자료는 파랑 ID가 찾아 와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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