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ここに来ることは誰しも知っていたと思う。でもね、ここは寒風吹きすさぶ荒野だったのだ。


では孤盲猫を撫でる、第1 塀の話10 半島の塀
 

塀(へい)とは、家や敷地などにおいて、他との境界に設置する囲いのこと。


 異民族から命と財産を守るための外壁と塀。城壁にしろ家の門塀にしろ考え方に相違はない。これが異民族のいる地域の塀というものの根元的理念。日本の場合は海という巨大な外壁に閉ざされていたため「異民族」という概念に乏しく、むしろ風雪に対する防護等という概念の方が塀そのものには強く見られる。今回は話に入れなかったが、日本における竹垣や生け垣、防風林などを見ると日本人の塀に対する考え方は見て取れる。
 少なくとも海外では「ひょいと乗り越えられるとか中を割って入り込める」という塀は庭園以外には一般的ではない。これは現代社会においても同様で、日本には町の区画を塀で囲み門番が鍵を開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住宅地域にはまずお目にかかれないが、世界的にはよく見られるものである。中国や東南アジアでよく見られるマンションの入り口の物々しさや、鉄格子の扉付の家と言うのも日本ではなかなか見られない。
 日本において「鍵」というものの概念が世界的なそれから見た場合、全く異なるというのもそういうことだと思っている。

 では隣の半島はどうなのか。これが実はさっぱり分からない。

 例えば築地。これは日本では初期寺院の一部として半島経由で入って来たものと推測されるが、泗泚都城の発掘(申鍾国氏論文等)ではこうしたものはちょっと見あたらない。煉瓦(磚)基壇や回廊跡は存在しているが、寺や施設をぐるっと築地(版築)で囲んでいるようには見えなかった。扶蘇山城などでは版築土塁も見られるので、こうした技術がなかったわけではなく、遺構として未発見か、存在していなかった、としか言えない。この遺跡群に属する定林寺は金堂や回廊、中門・南門が確認されているが、塀で囲んでいた跡は見られない。
 だが、観光地としての定林寺はぐるっと塀で囲まれている。こうした問題は日本にもあって苦々しい限りであるが、この時点で『建っているもの』は定林寺も墨俣城のお友達でしかない、と断定できる。

 土塀A。あるといえばあるが工法に進化したところは見受けられない。土塀Bに相当するものは見あたらない。練塀A。極めて似たものはあるが表面に磚を貼っただけのもであり、構造的には全く異なる。練塀Bに相当するものは寺院から両班の住居や郷校など、広く見られる。
 表面のデザインという点では多少のバリエーションがあるものの、半島の塀は中国の都城外壁の縮小版と、練塀B、そしてそれに多少装飾を施した磚貼り塀程度しか見られなかった。見た目練塀Aに似ているものがある程度である。この磚貼りについては明らかに中国から入って来たものであろうし、中国の彩釉磚に比較したときに極めて劣化している。青磁の塀や白磁の塀でもあればまた見方も変わるところであるが、そういったものは見つからなかった。

 また今回捜してみた塀も多くが「いつ・どのような状況で作られ、その後どう維持されたか」が不明である。一部の例外を除き「18-19Cのものがあるかもしれない」が限界で、ほとんど19-20C、李朝末から大韓帝国、総督府時代に作られたものと、戦後1980年代になってから急激に整備されたもの(定林寺のようなケンナチャヨ仕様)と考えている。結果中国と結ぶ線も日本への影響とおぼしき線もほぼ結ぶことはできなかった。半島でのこうした建築に対する研究が進むことを切に願って止まない。
 もちろん三国時代の城壁など、数少ない例があることは承知しているが、この時代にはこういうスタイル、この頃に外国からこういう影響があった、こういう影響を外国に与えた、と言ったものはほぼ壊滅である。
 
 塀そのものについていえば王宮はさすがに多少物々しいが高いとは言えず、支配層も塀は持つが極めて貧弱であり、そもそも住居の防衛という点では極めて低いレベルにある。これは城壁、と言う範囲に広げても同様で、外壁を乗り越えられてしまえば王宮中心までほぼ一直線に都市攻略が出来、実に心許ない。兵が強かったと青ID諸氏は主張するかもしれないが、歴史的に見て異民族からの攻撃を外壁によって防衛したというのもあまり知らない。半島における「塀」はまさに他との区画としての用以外、ほとんど実効が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る。少なくともその高さや規模は比較される中国のそれに比べ著しく劣り、下手をすると日本の塀よりも貧弱であったりする。外壁は防衛という点に特化した日本城郭との比較でいえば、落第である。寺院などには壮大な築地はまず見られず、建築を伝えたと胸を張る割には何も残っていない。
 なおかつ、半島においては塀に関する記述は極めて乏しかった。古い小説まで当たれば少しは出てくるのかもしれないが、判断するための資料が乏しすぎる。王宮の建築物はいつ焼けた、いつ修繕したというところは何とか分かるが、その時に塀はどうしたのか、燃えたのか?修復したのか?修復内容は?焼失前の状況を知る絵図面は?となると五里霧中である。塀そのもにに対する規定もあるのかもしれないが、こちらは不勉強のため発見できなかった。


 さて、それでもいくつか興味深い物を上げておこう。



1903の写真1


1903の写真2
これらは結婚式の写真のようだが、後に版築系もしくは猫積の塀と、練塀B(祝島と類似)が見える


1905の写真
型枠を作り版築をしている写真だが、背後との位置から見て「やらせ」写真だろう。1903-1と同様に背後の塀は藁かけである。


李氏朝鮮時代の絵
塀は猫積か石積のようである。家屋の土が剥がれ木舞が露出しているのが分かる


藁かけの土塀(現代)
日干し煉瓦(左側のこけむしている部分)を基礎にして版築をした塀だと思われる
念のため全くメンテナンスをしていない猫塀なら、50年もすればこのようになる。


河回村の塀端部
表土を塗って仕上げているが、上の写真と同じ工法だと思われる


良洞民俗村の塀
瓦を斜めに貼り込んで装飾にしているが、端部を見ると練塀Aと違いみっちり瓦を入れていないことが分かる。これは系統からいうと練塀Bに類するものである。


浮石寺の塀
おそらくこれも磚を貼り込んだだけだと思う。半島の磚貼り塀の特徴として、磚一枚が長い、と言うのがある。屋根瓦と比較してもらうとよく分かると思う。この辺は半島的。


昌徳宮土塀1
五段あるうちした二つはおそらく西洋煉瓦、真ん中は古い時代に復元しているが磚、上二つはかなり最近の復元と思われる。


昌徳宮土塀2坂道の塀
とても不思議な塀である。坂道の奥から同じ高さで装飾部分がつなげてあり、最後は装飾をカットしている


昌徳宮土塀2坂道の塀拡大
以前「煉瓦にセメントじゃねーの?」という発言があったが、確かにこれは西洋煉瓦にセメント、しかも装飾部は貼っただけっぽい。



楽善斎の塀
おおよその時代が分かる数少ない例。今の楽善斎が19C中期建設なので、おそらく塀もそのころ以降のものと思われる。磚貼り漆喰仕上げで、もしかしたら磚は釉薬がかけてあるタイル状のものかもしれない。



光州の寺院(場所不明)の塀
瓦のみを積んだ変わったもの。塀と言えるか微妙だが、いっそすがすがしい。



ということで、結論から言うと「調べてみたけど半島の塀は何も分からなかった」である。技術的な流れも見あたらないし、大体中国の宋-元代に来た技術が劣化した状態でずっと残っていたと言う感じである。特に復元によってノイズが激しく評価できない塀ばかりであった。技術という切り口だと、どうも李氏朝鮮時代に何もかもが劣化していく、と言う気がしてならないのだが、それはまたの機会にでも。


さて、今回はここで話を一旦終わります。この長々しい話を最後まで我慢して読み続けてくださった諸氏、資料提供をしてくださった皆様にお礼を申し上げます。


次回は…宿題からかなぁ。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10 반도의 담

여기에 오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여기는 찬바람 불어 거칠어지는 황야였던 것이다.


그럼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10 반도의 담
 

담(에 있어)이란, 집이나 부지 등에 있고, 외와의 경계에 설치하는 울타리.


 이민족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외벽과 담.성벽으로 해라 집의 문담으로 해라 생각에 상위는 없다.이것이 이민족이 있는 지역의 담이라는 것의 근원적 이념.일본의 경우는 바다라고 하는 거대한 외벽 에 갇히고 있었기 때문에「이민족」라고 하는 개념이 부족하고, 오히려 풍설에 대한 방호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담그 자체에는 강하게 볼 수 있다.이번은 이야기에 넣지 않았지만, 일본에 있어서의 대 울타리나 울타리, 방풍림등을 보면 일본인의 담에 대한 생각은 간파할 수 있다.
 적어도 해외에서는「갑자기 넘을 수 있다든가 중을 나누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라고 하는 담은 정원 이외에는 일반적이지 않다.이것은 현대 사회에 있어도 같이로, 일본에는 마을의 구획을 담으로 둘러싸 문지기가 열쇠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주택지역에는 우선 뵐 수 없지만, 세계적으로는 잘 볼 수 있는 것이다.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잘 볼 수 있는 맨션의 입구의 삼엄함이나, 철격 아이의 비부의 집이라고 하는 것도 일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일본에 있어「열쇠」라는 것의 개념이 세계적인 그리고 보았을 경우,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근처의 반도는 어떤가.이것이 실은 전혀 모른다.

 예를 들면 츠키지.이것은 일본에서는 초기 사원의 일부로서 반도 경유로 들어 온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사泚미야코노죠의 발굴(신종국씨 논문등 )에서는 이러한 것은 조금 눈에 띄지 않는다.벽돌(전) 기단이나 회랑자취는 존재하고 있지만, 절이나 시설을 빙빙 츠키지(판축)에서 둘러싸고 있도록(듯이)는 안보였다.부소산성등에서는 판축토루도 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기술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옛날 건축의 잔존물로서 미발 봐인가, 존재하지 않았다, 로 밖에 말할 수 없다.이 유적군에 속하는 죠린지는 금당이나 회랑, 중문・남문이 확인되고 있지만, 담으로 둘러싸고 있던 자취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관광지로서의 죠린지는 빙빙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이러한 문제는 일본에도 있어 불쾌할 따름이지만, 이 시점에서『세워지고 있는 것』는 죠린지도 스노마타성의 친구에 지나지 않는, 으로 단정할 수 있다.

 흙벽 A.있다고 하면 있지만 공법으로 진화한 곳은 보여지지 않는다.흙벽 B에 상당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련담A.지극히 닮은 것은 있지만 표면에 전을 붙였을 뿐 것도여,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련담B에 상당하는 것은 사원으로부터 양반의 주거나 향교 등, 넓게 볼 수 있다.
 표면의 디자인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다소의 바리에이션이 있지만, 반도의 담은 중국의 미야코노죠 외벽의 축소판과 련담B, 그리고 거기에 다소 장식을 가한 전 붙여 담정도 밖에 볼 수 없었다.외형련담A를 닮아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이다.이 전 붙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일 것이고, 중국의 도자기 표면에 유약을 바르는 것전과 비교했을 때에 지극히 열화 하고 있다.청자의 담이나 백자의 담이기도 하면 또 견해도 바뀌는 (곳)중에 있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 이번 찾아 본 담도 많게가「언제・어떠한 상황으로 만들어져 그 후 어떻게 유지되었는지」가 불명하다.일부의 예외를 제외해「18-19 C의 것이 있을 지도 모르는」가 한계에서, 거의 19-20 C, 이조말부터 대한제국, 총독부 시대에 만들어진 것과 전후 1980년대가 되고 나서 급격하게 정비된 것(죠린지와 같은 켄나체요 사양)라고 생각하고 있다.결과 중국과 묶는 선도 일본에의 영향과 사계선도 거의 묶을 수 없었다.반도에서의 이러한 건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 그치지 않다.
 물론 삼국시대의 성벽 등, 얼마 안되는 예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스타일, 요즘에 외국으로부터 이런 영향이 있던, 이런 영향을 외국에게 주었다, 라고 말한 것은 거의 괴멸이다.
 
 담그 자체에 대해 집왕궁은 과연 다소 삼엄하지만 높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지배층도 담은 가지지만 지극히 빈약하고, 원래 주거의 방위라고 하는 점에서는 지극히 낮은 레벨에 있다.이것은 성벽, 이라고 하는 범위에 넓혀도 같이로, 외벽을 넘을 수 있어 버리면 왕궁 중심까지 거의 일직선에 도시 공략을 할 수 있어 실로 심허 없다.군사가 강했다고 파랑 ID여러분은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봐 이민족으로부터의 공격을 외벽에 의해서 방위했다는 것도 별로 모른다.반도에 있어서의「담」는 확실히 외와의 구획으로서의 용 이외, 거의 실효가 없었기 때문에는 없는지, 라고 생각하고 있다.적어도 그 높이나 규모는 비교되는 중국의 거기에 비교해 현저하게 뒤떨어져, 잘못하면 일본의 담보다 빈약하고 있기도 한다.외벽은 방위라고 하는 점에 특화 한 일본 성곽이라는 비교로 말하면, 낙제이다.사원등에는 장대한 츠키지는 우선 보지 못하고, 건축을 전했다고 가슴을 펴는 비교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반도에 있어 담에 관한 기술은 지극히 부족했다.낡은 소설까지 성공을 거두면 조금은 나올지도 모르지만, 판단하기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왕궁의 건축물은 언제 탄, 언제 수선 했다고 하는 곳은 어떻게든 알지만, 그 때에 담은 왜인가, 불탔는가?수복했는가?수복 내용은?소실전의 상황을 아는 평면도는?그렇게 되면 오리무중이다.담 그도에에 대한 규정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쪽은 힘써 공부하지 않음이기 때문에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몇개인가 흥미로운 것을 올려 두자.



1903의 사진 1


1903의 사진 2
이것들은 결혼식의 사진같지만, 후에 판축계 혹은 묘적의 담과 련담B(이와이시마와 유사)가 보인다


1905의 사진
거푸집을 만들어 판축을 하고 있는 사진이지만, 배후와의 위치로부터 봐「강요」사진일 것이다.1903-1과 같게 배후의 담은 짚내기이다.


이씨 조선 시대의 그림
담은 묘적이나 이시즈모리같다.가옥의 흙이 벗겨져 목무가 노출하고 있는 것을 안다


짚내기의 흙벽(현대)
일조 벽돌(좌측이 이끼가 끼고 있는 부분)을 기초로 해 판축을 한 담이라고 생각된다
만약을 위해 전혀 멘테넌스를 하고 있지 않는 고양이담이라면, 50년정도 하면 이와 같이 된다.


하회촌의 담단부
표토를 발라 마무리하고 있지만, 위의 사진과 같은 공법이라고 생각된다


양동민속촌의 담
기와를 비스듬하게 붙여 장식으로 하고 있지만, 단부를 보면 련담A와 달라 단단히 기와를 넣지 않은 것이 밝혀진다.이것은 계통으로부터 말하면 련담B에 비슷하는 것이다.


부석사의 담
아마 이것도 전을 붙였을 뿐 라고 생각한다.반도의 전 붙여 담의 특징으로서 전한 장이 긴, 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지붕 기와와 비교해 주면 잘 안다고 생각한다.이 근처는 반도적.


창덕궁 흙벽 1
5단 있을 때 한 둘은 아마 서양 벽돌, 한가운데는 낡은 시대에 복원하고 있지만 전, 상둘은 꽤 최근의 복원이라고 생각된다.


창덕궁 흙벽 2 비탈길의 담
매우 이상한 담이다.비탈길의 안쪽으로부터 같은 높이로 장식 부분이 연결해 있어, 최후는 장식을 컷 하고 있다


창덕궁 흙벽 2 비탈길의 담확대
이전「벽돌에 시멘트그럼-의?」라고 하는 발언이 있었지만, 확실히 이것은 서양 벽돌에 시멘트, 게다가 장식부는 붙였을 뿐 같다.



락선재의 담
대체로의 시대를 알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예.지금의 락선재가 19 C중기 건설이므로, 아마 담도 그 당시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전 붙여 회반죽 마무리로, 혹시 전은 유약이 걸려 있는 타일장의 것일지도 모른다.



광주의 사원(장소 불명)의 담
기와만을 쌓은 바뀐 것.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묘하지만, 차라리 시원하다.



그렇다고 하는 것으로, 결론으로부터 말하면「조사해 보았지만 반도의 담은 아무것도 몰랐다」이다.기술적인 흐름도 눈에 띄지 않고, 대개 중국의 송-원대에 온 기술이 열화 한 상태로 쭉 남아 있었다고 하는 느낌이다.특히 복원에 의해서 노이즈가 격렬하게 평가할 수 없는 담만에서 만났다.기술이라고 하는 단면이라고, 아무래도 이씨 조선 시대에 모두가 열화 해 나간다, 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라도.


그런데, 이번은 여기서 이야기를 일단 끝납니다.이 장 들주위이야기를 끝까지 참고 계속 읽어 주신 여러분, 자료 제공을 해 주신 여러분에게 답례를 말씀드립니다.


다음 번은…숙제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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