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구국성전(救國聖戰)에 뛰어든 의병대장들.

이번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의병대장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곽재우(郭再祐)는 1552년에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이고, 부친은 의주목사와 황해감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다. 곽재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서 배우고 34세에 과거를 보아 2등으로 합격했지만 답안지에 임금의 비위를 건드리는 대목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곧 무효가 되었다. 초야에 운둔하여 풍류를 즐기던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열흘만인 4월 22일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5월 4일 거름강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일본군의 척후대를 전멸시켰고, 이어서 5월 6일에는 군선 11척으로 침범해오는 일본군을 물리쳤다.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그의 군사는 갈수록 늘어났다. 괙재우는 6월 6일 의령 정암진에서 안고쿠지 에게이[安國寺惠瓊]가 거느린 군사 2만여명을 격퇴시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현풍, 창녕, 영산 등지에서 특유의 유격전으로 적군을 무찔렀고, 9월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관군으로 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서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초야로 돌아가 운둔하다가 1617년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면(金沔)은 1541년에 고령에서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낸 김세민(金世民)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밑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음직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를 뒤따라 5월 11일에 고령, 거창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김천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그 공로로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고 또 경상도 의병도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지 않았고, 크고 작은 전투를 40여 차례나 치렀다. 그 사이에 만석꾼이던 가산은 거덜나고 처자는 문전걸식을 하는데 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전쟁터만 돌아다녔다. 김면은 성주성전투(成周城戰鬪)가 끝난 뒤 전염병에 걸려 1593년 3월 금릉군의 한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최경회(崔慶會)는 본관이 해주이다. 1532년 나주에서 태어나 36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43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가 형조좌랑(刑曹佐郎)을 거쳐 옥구현감(沃溝縣監), 장수현감(長水縣監), 영암군수(靈巖郡守),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다.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르던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고경명(高敬命)이 처음에 의병을 일으킬 때 동참을 권유했으나 상중인데 시묘살이로 건강이 악화되어 조카인 최홍재(崔弘宰)를 대신 내보냈다. 그러나 고경명이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전사하고 호남이 위험하게 되자 마침내 몸을 일으켜 의병항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1592년 7월 26일에 의병을 모집하여 화순과 능주의 의병을 지휘하는 전라우도의병장을 맡았다.

8월에는 남원으로 이동해 군사를 증원하고, 다시 장수를 거쳐 9월에는 무주 싸움에서 승리하고, 10월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서도 외곽에서 적군을 무찔러 공훈을 세웠다. 이듬해 4월에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었으며, 6월에 운명의 장소인 진주성으로 입성해 장렬히 순국했다. 그가 순국한 뒤 둘째형 최경장(崔慶長)이 의병대장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큰형 최경운(崔慶雲)도 의병을 일으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진주성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한 유명한 의기(義妓) 논개(論介)는 바로 이 최경회의 소실이었다. 최경회와 더불어 진주성에 순국한 김천일(金千鎰)은 1537년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언양인데 산림에 묻혀 사는 인재를 등용하는 유일(遺逸)로 벼슬길에 올라 임실현감(任實縣監), 순창군수(淳昌郡守), 담양부사(潭陽府使) 등을 지낸 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여 수원 독산성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펼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평양 조정과 전라도 사이의 연락을 맡았으며, 조정으로부터 판결사로 임명되고 창의사 칭호를 받았다. 서울에 결사대를 투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적정을 수집하다가 이듬해 4월에 퇴각하는 적군을 뒤쫓아 경상도로 내려갔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 참가하여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순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응수(權應銖)는 안동 권씨로 1546년에 영천에서 태어나 39세 때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 속해 있었다. 전란이 터지자 좌수사 박홍이 달아나고 수군이 저절로 무너지는 바람에 소속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경상좌도 의병대장으로 임명되어 의병 3천 5백여명을 모았다. 그는 군수였던 김윤국을 별장으로 삼고 7월 24일에 영천성을 공격했다. 여기에는 동생 권응평(權應平)도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합세했다. 27일까지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인근 신녕, 의흥, 의성, 안동까지 차례로 수복됨에 따라 이 지역 적군은 모두 경주성으로 퇴각했다. 이 전공으로 권응수는 방어사에 기용되었다.

◆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전라도와 경상도에 이어 중부 이북 지방에서도 의병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이정암(李廷菴)은 154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21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양주목사(楊州牧使), 연안부사(延安府使), 동래부사(東萊府使) 등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일처리가 공평무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노모와 가족을 데리고 황해도로 피난했다가 8월 22일 배천에서 김덕상, 박춘영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연안부성으로 이동해 송덕윤, 조광정, 장응기 등과 합류해 500여명의 의병을 모았다.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로 임명했다.

8월 28일, 해주에 사령부를 두고 군정(軍政)을 펴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 제3군이 연안성을 공격했다. 29일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9월 2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일본군은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달아나고 말았다. 승전보(勝戰報)를 받은 의주의 선조는 이정암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1520년에 평안도 안주에서 최세창(崔世昌)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속명은 여신(汝信)이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손에서 자랐으며, 유학을 공부하다가 15세에 지리산에서 출가했다. 33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했고, 38세에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정진했다.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혐의가 벗겨져 석방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의 부탁으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을 맡아 의승군(義僧軍)의 총지휘를 맡았으니 그때 선사의 세수(歲壽) 73세였다.

휴정은 그때 선조에게 “공을 세운 승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차별을 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으로 의승군을 조직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으로 궐기토록 했다. 이에 따라 처영(處英)이 호남에서, 유정이 관동에서, 영규(靈圭)는 호서에서, 해안(海眼)은 영남에서 각각 승군(僧軍)을 조직하였다. 휴정 자신도 문도 5천여명을 모아 관군, 또는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일본 침략군과 싸웠다. 특히 평양성탈환전(平壤城奪還戰)에서 공을 세웠다.

휴정은 노령을 사유로 묘향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의승군(義僧軍)을 둘로 나누어 북방군은 유정에게, 남방군은 처영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수행하다가 1605년에 세수(歲壽) 85세로 입적했다.

영규도 처영, 유정과 더불어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였다. 충청도 공주 출신인 그는 휴정에게서 불법(佛法)을 배운 뒤 계룡산 갑사에서 제자들을 기르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청련암에서 승려 1천명을 보아 의승군을 조직하여 의병대장 조헌(趙憲)과 더불어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곧 이어 벌어진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순국했다. 처영은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휴정의 가르침을 받은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에서 의승군 1천여명을 모집하여 권율을 도와 이치의 싸움과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1544년 경상도 밀양에서 태어났는데, 속성명은 임응규(任應奎)였다. 13세 때까지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6세 때 부모를 여의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김천 황악산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18세 때 서울 봉은사에서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32세에 모든 승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찾아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그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승인 휴정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갇힌 몸이 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그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가지 유점사에서 주석했다. 휴정의 격문을 받은 유정은 승려 1천 7백여명을 모아 스승의 휘하로 달려가 이때부터 13년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그리고 이율곡(李栗谷)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휴정은 유정보다 24세, 이율곡은 유정보다 8세 연상이었다. 율곡은 조선왕조 5백년사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운 비상한 천재였지만 젊은 시절에는 불우한 가정사를 한탄하고 세상사를 비관하여 금강산에 입산하여 마하 연사에서 의암(義菴)이란 법명으로 3년간 불도를 닦다가 환속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은 휴정, 유정과도 교분이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뜨기 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한 것도 사실은 휴정의 지시를 받은 유정이 당시 조정에 있던 율곡으로 하여금 건의토록 한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지만 경위야 어떻든 그때 십만양병설이 채택되어 자주국방이 실현되었더라면 임진왜란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휴정 아래서 실전을 지휘하는 의승도대장을 맡은 유정은 평양성과 서울 탈환에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어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다. 또 휴정이 물러난 뒤에는 그 자리를 맡아 승군을 총지휘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동안 승군장(僧軍將)으로 활약하면서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수많은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적진에 당당히 들어가 가토가 “귀국에서 제일가는 보물이 무엇이오?”라고 묻자 서슴없이, “당신의 수급(首級)이 천금의 상금과 만호의 벼슬이 걸렸으니 가장 큰 벼슬이오. 만일 당신의 수급(首級)을 얻어 우리 주상(主上)께 바친다면 이 전쟁은 빨리 끝날 것이니 그것보다 더 좋은 보물이 어디에 있으리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도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왜군 진영에 사자로 갔는데 왜장들이 신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유정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울산 전투와 순천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표창을 받았고, 국왕 선조로부터 “지금 정세를 생각하여 환속한다면 삼군을 통솔할 벼슬을 주겠다.”는 제의까지 받았다. 그는 또 전란이 끝난 직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고 끌려갔던 포로 3천여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노년에 유정은 합천 해인사 들머리에 홍제암이란 작은 암자를 짓고 조용히 보내다가 1610년에 세수(歲壽) 67세로 입적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진중산 기슭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공훈과 유덕을 기리는 표충비(表忠碑)가 서 있다. 1742년에 유정의 5세 법손인 남붕(南鵬)이 표충사(表忠祠)를 중건하면서 세운 이 비석은 “땀 흘리는 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석이 세워진 이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적게는 몇 되에서 많게는 일곱 말이나 되는 “진땀”을 흘리는 신기한 현상을 보여 그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유정의 우국충정이 지하에서도 변함없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7.의병부대의 선전(善戰) (2)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구국성전(救國聖戰)에 뛰어든 의병대장들.

이번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의병대장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곽재우(郭再祐)는 1552년에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이고, 부친은 의주목사와 황해감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다. 곽재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서 배우고 34세에 과거를 보아 2등으로 합격했지만 답안지에 임금의 비위를 건드리는 대목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곧 무효가 되었다. 초야에 운둔하여 풍류를 즐기던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열흘만인 4월 22일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5월 4일 거름강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일본군의 척후대를 전멸시켰고, 이어서 5월 6일에는 군선 11척으로 침범해오는 일본군을 물리쳤다.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그의 군사는 갈수록 늘어났다. 괙재우는 6월 6일 의령 정암진에서 안고쿠지 에게이[安國寺惠瓊]가 거느린 군사 2만여명을 격퇴시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현풍, 창녕, 영산 등지에서 특유의 유격전으로 적군을 무찔렀고, 9월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관군으로 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서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초야로 돌아가 운둔하다가 1617년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면(金沔)은 1541년에 고령에서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낸 김세민(金世民)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밑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음직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를 뒤따라 5월 11일에 고령, 거창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김천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그 공로로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고 또 경상도 의병도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지 않았고, 크고 작은 전투를 40여 차례나 치렀다. 그 사이에 만석꾼이던 가산은 거덜나고 처자는 문전걸식을 하는데 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전쟁터만 돌아다녔다. 김면은 성주성전투(成周城戰鬪)가 끝난 뒤 전염병에 걸려 1593년 3월 금릉군의 한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최경회(崔慶會)는 본관이 해주이다. 1532년 나주에서 태어나 36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43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가 형조좌랑(刑曹佐郎)을 거쳐 옥구현감(沃溝縣監), 장수현감(長水縣監), 영암군수(靈巖郡守),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다.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르던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고경명(高敬命)이 처음에 의병을 일으킬 때 동참을 권유했으나 상중인데 시묘살이로 건강이 악화되어 조카인 최홍재(崔弘宰)를 대신 내보냈다. 그러나 고경명이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전사하고 호남이 위험하게 되자 마침내 몸을 일으켜 의병항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1592년 7월 26일에 의병을 모집하여 화순과 능주의 의병을 지휘하는 전라우도의병장을 맡았다.

8월에는 남원으로 이동해 군사를 증원하고, 다시 장수를 거쳐 9월에는 무주 싸움에서 승리하고, 10월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서도 외곽에서 적군을 무찔러 공훈을 세웠다. 이듬해 4월에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었으며, 6월에 운명의 장소인 진주성으로 입성해 장렬히 순국했다. 그가 순국한 뒤 둘째형 최경장(崔慶長)이 의병대장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큰형 최경운(崔慶雲)도 의병을 일으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진주성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한 유명한 의기(義妓) 논개(論介)는 바로 이 최경회의 소실이었다. 최경회와 더불어 진주성에 순국한 김천일(金千鎰)은 1537년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언양인데 산림에 묻혀 사는 인재를 등용하는 유일(遺逸)로 벼슬길에 올라 임실현감(任實縣監), 순창군수(淳昌郡守), 담양부사(潭陽府使) 등을 지낸 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여 수원 독산성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펼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평양 조정과 전라도 사이의 연락을 맡았으며, 조정으로부터 판결사로 임명되고 창의사 칭호를 받았다. 서울에 결사대를 투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적정을 수집하다가 이듬해 4월에 퇴각하는 적군을 뒤쫓아 경상도로 내려갔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 참가하여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순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응수(權應銖)는 안동 권씨로 1546년에 영천에서 태어나 39세 때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 속해 있었다. 전란이 터지자 좌수사 박홍이 달아나고 수군이 저절로 무너지는 바람에 소속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경상좌도 의병대장으로 임명되어 의병 3천 5백여명을 모았다. 그는 군수였던 김윤국을 별장으로 삼고 7월 24일에 영천성을 공격했다. 여기에는 동생 권응평(權應平)도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합세했다. 27일까지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인근 신녕, 의흥, 의성, 안동까지 차례로 수복됨에 따라 이 지역 적군은 모두 경주성으로 퇴각했다. 이 전공으로 권응수는 방어사에 기용되었다.

◆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전라도와 경상도에 이어 중부 이북 지방에서도 의병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이정암(李廷菴)은 154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21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양주목사(楊州牧使), 연안부사(延安府使), 동래부사(東萊府使) 등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일처리가 공평무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노모와 가족을 데리고 황해도로 피난했다가 8월 22일 배천에서 김덕상, 박춘영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연안부성으로 이동해 송덕윤, 조광정, 장응기 등과 합류해 500여명의 의병을 모았다.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로 임명했다.

8월 28일, 해주에 사령부를 두고 군정(軍政)을 펴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 제3군이 연안성을 공격했다. 29일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9월 2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일본군은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달아나고 말았다. 승전보(勝戰報)를 받은 의주의 선조는 이정암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1520년에 평안도 안주에서 최세창(崔世昌)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속명은 여신(汝信)이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손에서 자랐으며, 유학을 공부하다가 15세에 지리산에서 출가했다. 33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했고, 38세에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정진했다.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혐의가 벗겨져 석방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의 부탁으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을 맡아 의승군(義僧軍)의 총지휘를 맡았으니 그때 선사의 세수(歲壽) 73세였다.

휴정은 그때 선조에게 "공을 세운 승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차별을 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으로 의승군을 조직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으로 궐기토록 했다. 이에 따라 처영(處英)이 호남에서, 유정이 관동에서, 영규(靈圭)는 호서에서, 해안(海眼)은 영남에서 각각 승군(僧軍)을 조직하였다. 휴정 자신도 문도 5천여명을 모아 관군, 또는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일본 침략군과 싸웠다. 특히 평양성탈환전(平壤城奪還戰)에서 공을 세웠다.

휴정은 노령을 사유로 묘향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의승군(義僧軍)을 둘로 나누어 북방군은 유정에게, 남방군은 처영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수행하다가 1605년에 세수(歲壽) 85세로 입적했다.

영규도 처영, 유정과 더불어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였다. 충청도 공주 출신인 그는 휴정에게서 불법(佛法)을 배운 뒤 계룡산 갑사에서 제자들을 기르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청련암에서 승려 1천명을 보아 의승군을 조직하여 의병대장 조헌(趙憲)과 더불어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곧 이어 벌어진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순국했다. 처영은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휴정의 가르침을 받은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에서 의승군 1천여명을 모집하여 권율을 도와 이치의 싸움과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1544년 경상도 밀양에서 태어났는데, 속성명은 임응규(任應奎)였다. 13세 때까지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6세 때 부모를 여의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김천 황악산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18세 때 서울 봉은사에서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32세에 모든 승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찾아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그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승인 휴정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갇힌 몸이 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그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가지 유점사에서 주석했다. 휴정의 격문을 받은 유정은 승려 1천 7백여명을 모아 스승의 휘하로 달려가 이때부터 13년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그리고 이율곡(李栗谷)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휴정은 유정보다 24세, 이율곡은 유정보다 8세 연상이었다. 율곡은 조선왕조 5백년사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운 비상한 천재였지만 젊은 시절에는 불우한 가정사를 한탄하고 세상사를 비관하여 금강산에 입산하여 마하 연사에서 의암(義菴)이란 법명으로 3년간 불도를 닦다가 환속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은 휴정, 유정과도 교분이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뜨기 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한 것도 사실은 휴정의 지시를 받은 유정이 당시 조정에 있던 율곡으로 하여금 건의토록 한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지만 경위야 어떻든 그때 십만양병설이 채택되어 자주국방이 실현되었더라면 임진왜란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휴정 아래서 실전을 지휘하는 의승도대장을 맡은 유정은 평양성과 서울 탈환에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어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다. 또 휴정이 물러난 뒤에는 그 자리를 맡아 승군을 총지휘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동안 승군장(僧軍將)으로 활약하면서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수많은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적진에 당당히 들어가 가토가 "귀국에서 제일가는 보물이 무엇이오?"라고 묻자 서슴없이, "당신의 수급(首級)이 천금의 상금과 만호의 벼슬이 걸렸으니 가장 큰 벼슬이오. 만일 당신의 수급(首級)을 얻어 우리 주상(主上)께 바친다면 이 전쟁은 빨리 끝날 것이니 그것보다 더 좋은 보물이 어디에 있으리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도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왜군 진영에 사자로 갔는데 왜장들이 신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유정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울산 전투와 순천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표창을 받았고, 국왕 선조로부터 "지금 정세를 생각하여 환속한다면 삼군을 통솔할 벼슬을 주겠다."는 제의까지 받았다. 그는 또 전란이 끝난 직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고 끌려갔던 포로 3천여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노년에 유정은 합천 해인사 들머리에 홍제암이란 작은 암자를 짓고 조용히 보내다가 1610년에 세수(歲壽) 67세로 입적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진중산 기슭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공훈과 유덕을 기리는 표충비(表忠碑)가 서 있다. 1742년에 유정의 5세 법손인 남붕(南鵬)이 표충사(表忠祠)를 중건하면서 세운 이 비석은 "땀 흘리는 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석이 세워진 이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적게는 몇 되에서 많게는 일곱 말이나 되는 "진땀"을 흘리는 신기한 현상을 보여 그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유정의 우국충정이 지하에서도 변함없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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