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キム・デジュン前大統領が行って一週間目である 8月 25日だった. 家に持って行って食べるつもりでファーストフード店で注文した食べ物が出るのを待っていた. 人々がたくさん集まる所だから騷音がかなりひどかった. 長く竝んだ列, 人々の対話, 流れ出る歌声.



私の手には一時事週刊誌が握られていた. その表には明るく笑って大衆を向けて両手をぴかっと持った, 今はこの地にない黒白の一若い政治家があった. 瞬間我知らず胸で何かがむかっとして上って来た. そして眉間をいっぱいしかめたままひそめて目頭を赤くした. あ, この人はどうしてそのように, なぜ, どうしてそんなに大変に……



内世代はキム・デジュンとは少し距離が遠い. 正確に言わばキム・デジュンの年がお亡くなりになったお爺さんより一歳少ないから私にはかなり遠い存在の政治家であるわけだ. しかし私において彼は私の人生の一番目政治家だった.



個人的な経験のせいに私は幼い時から TVが好きではなかった. そして友達と一緒に暮した時を除けばおよそ 10年の間家に TVを置いた事がない. 論述を準備するために時事常識をふや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うるさかった高等学校の時も TVと新聞は私にあまりにも遠い存在だった. 今考えて見ればそれはかなり良い選択だったようだ.



代わりに幼い時から何か読む行為が好きだった. 家の前の本屋おじさんと気が合うせいに見たい本はどんな本でも求めることができた. もちろんすべての帳付け祈るご両親が負担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一度も私に掛け金で怒った事はなかった.



中学校に入った頃, 本当に魅力的な著者一人に会うのに彼がまさに姜ジュンマンだ. 今もそれほど均衡取れた批判をする同時に人間に対する暖かい視線を捨てない知識人は珍しいと思う. その時期の私は彼が書いたすべての著書に魂を漏らすほど抜けていた.



キム・デジュン. 姜ジュンマンの一著書に書かれているその名前を始まりに私はこの政治家に落ちこんだ. 掘り下げると気が済む性格のせいに彼に係わる本を収集したし当時まで彼が書いたすべての著書を読んだ.



キム・デジュン殺しの代表的な偽書で選ばれる ‘東橋洞 24時’などはノ・テウ候補が無差別で撒布を一おかげさまなのか家でも易しく求めることができた. 代代孫孫慶尚道で出て育った地付きである私は運が良くも自らの政治観を誰に頼るとか強要されないで確立することができたわけだ.



たとえ幼い年令に過ぎなかったが圧倒的にその量が多かった非難一色の書籍の中でも彼と彼が属した地域に対する限りをどの位読めたようだ.



あの時頃私はさまざまな家の秘密が分かるようになる. お爺さんは選挙でキム・デジュン以外の他の候補をただ一度も選択したことがないということ. 慶尚道で, それも子子孫孫その所で住んだお爺さん世代の人々にそれは本当に珍しくて変な事だ.



お爺さんも彼と同じく一生胸に恨みを抱いて暮す人中の一つだった. 高祖父と曽祖父は代を引き継いで抗日運動をしたが特に曽祖父は一方手が書く事ができない位ひどい顧問を受けた. 当時の独立運動家たちがそのように自ら正しいと信じる事に関してはあまりにも易しく命をほうり出す人々だったから曽祖父もそうだったみたいだ.



しかし李承晩は権力維持のために親日派を処断しなかったしそれほど生き返えた人々は政権の岡っ引きになって逆に独立運動家たちを処断した. 当然多い独立運動家たちが李承晩政権に反旗をあげたし戦争の慌しい振ることは彼ら皆を共産主義者で作って殺すのに大変良い時期だった.



祖父は一生を独立に身を捨てたのに共産主義者に追われて死んだお父さんを見て死より加えた悲しみを味わう. 祖父はそんなに悔しく死んだ人々のために代表で合同葬式を行うがクーデターを起こした朴正煕はその悔しい人々の畝をフォークレーンで全部伏せてしまった. ノ・ムヒョン前大統領が言った 5.16の実体(参加政府第 5年の記録 5部)という言葉はまさにこの事件を置いて言った言葉だ.



自分のお父さんを悔しく殺したことも帽子だとその遺骨まで目の前でごま砕いてしまうことをなんと表現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 祖父はお父さんの遺骨を収まる時間もなしに 444番(回)と言う(のは)番号表をつけて西大門刑務所に入る. 罪目は共産主義者. 当時政権の ‘革命裁判’と言うのにはこんな事は日常に過ぎなかった.



キム・デジュンがお爺さんがいる西大門刑務所に入って来たこともあの時頃引き継いだ. クーデターは自分に反対する, または反対するに値するすべての人を次から次へ拷問して殺した. 祖父は悪名高かった西大門刑務所同期のキム・デジュンに対してどんな切ない感情を持っていたようだ. 限りを持った人々だけが感じることができる同志意識で, しこりを抱いて暮す人だけが感じることができる連帯意識で, 悔しい人々の心を担った人だけが分かるその何で.



私がまだ何も分からなかった時, 祖父はこんなものを言った. ‘その人は監獄で見て出来をよく分かる. 該博で絶えず研究する, 実に彼ほどの人いない.’ 政治に対してはあまり口を割らなかった祖父が一政治家を誉めることを理解するには, 幼い時から秀才に名前を揚げた祖父が上古出身の一政治家をおだてることを理解するにはそのように長年の時間がかからなかった.



キム・デジュン前大統領の業績に対してはみんなよく分かっているでしょう. 彼が何をしたしどんな死ぬ峠を越したしどんな生を暮したのか. しかし私が一番注目することはその人が一生担って行った限りない人々の恨みと涙だ.



父親は幼い時, 世の中のすべてのお父さんたちは眠る時毎日大声を出すかと思ったと言う. ところで友達家から寝て来たらそうではなかったそうだ. 私にお爺さんは善良で慈しみ深くて優しい人だったが, 夜さえなれば死とも同じだった顧問の悪夢で一生肉体的な後遺症と精神的な苦痛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人でもあったのだ.



キム・デジュン前大統領もそうだったから話だけではない全身でその痛みと苦痛を理解する何ならない人だった.. キム・デジュンは信念を捨てないせいに一生を自宅軟禁と顧問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大部分の人々はその物物しい苦痛と家族たちの涙のため声を落とすしかなかった.



しかし彼らには胸一隅疲れくすぶったしこりがある. 私は光州民主化運動を経験した全羅道人々の恨みがそんなことだから見る. どんな罪もなしに死んだがその悔しさを訴えれば共産主義者になってしまう世の中. 悔しさを訴えれば差別して無視して踏み付ける世の中. キム・デジュン名前三字を言えば共産主義者になるのに先生と呼びながらかたずをのまなければならない世の中. やっと吐いた先生と言う(のは)一単語もスンサングニムと言いながらおちゃらかしながら踏み付ける世の中. そんな世の中でキム・デジュンは彼らに唯一の代弁人と同時に自尊心だったろう.



まだ朴正煕, 全斗換政権の時当ぎり人々をインタビューしに行けば大部分が拒絶をする. 世の中が変わったと思って言ったらその次の政権が来て捕えて連れ行ってまた世の中が変わったと思って言ったらまた捕えて連れ行って顧問をしたら, もうその恐れのため誰も信じ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のだ.





その恐れと限りが去る 10年の間に少しはとけることができた. もしその 10年がなかったら敢えていち国民なんかが政府を相手で悔しい死と虐殺を話すことができただろうか. 2011年からは済州 4.3事件を政府歴史教科書執筆基準から除くというこの時点でまた悔しくて限りを持った人々が増えるか心配であまり胸が痛い.



補修たちが御兄さんのようによる国アメリカ. そしてそのアメリカに認められるために言論操作まで躊躇しなかった過去独裁政権. しかし実際に最高の相性だったと知られたことと違って全斗換政権を脅威してまで(ソンソックフィの視線集中 8月20字インタビュー専門参照)求めようと思った人がキム・デジュン前大統領という事実を果して何人も分かっているか.



世界強大国たちが皆集まるエイペックやASEMみたいな国際会議でアジア辺方の一大統領がまず発言権を持つのが当たり前の国際雰囲気はいつ頃また見られるか. フランスの総理が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力と同時に道徳的師匠だと言ってドイツとアメリカの首長が先を争って尊敬心を示す大統領. アジアヨーロッパ首脳会議で皆名前だけで紹介をしかしただキム・デジュン前大統領の前にだけ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 と言っても誰一人異意を申し立てないそんな大統領を私たちはいつ頃また見られるか.



世界が求めようと思ったが韓国が殺そうと思った人. 韓国の独裁者が殺そうと思ったが世界の良心たちが求めようと思った人. 既得権層は共産主義者だと悪口を言うがしこりを持った人々は何も言わなく支持した人.



彼が去った後, もうこれ以上我々の歴史を偏向された論理の独占文屋たちに任せないと念をおして見る. 私もそれ程自ら勉強して自ら覚めてうちの子孫たちに真実を伝えたい.


よく行きます, 世界の英雄. そして私たちの限りを心より理解したイヤー.


형무소 동기였던 김대중과 할아버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고 일주일 째인 8월 25일이었다. 집에 가져가 먹을 요량으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소음이 꽤 심했다. 길게 늘어선 줄, 사람들의 대화, 흘러 나오는 노랫소리.



내 손에는 한 시사주간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겉면에는 환하게 웃으며 대중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든, 지금은 이 땅에 없는 흑백의 한 젊은 정치인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인상을 쓰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 이 사람은 왜 그렇게, 왜, 왜 그렇게 힘들게……



내 세대는 김대중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의 나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한 살 적으니 내게는 꽤 먼 존재의 정치인인 셈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정치인이었다.



개인적인 경험 탓에 나는 어릴 때부터 TV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살던 때를 제외하면 근 10년 동안 집에 TV를 둔 적이 없다.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 시사 상식을 늘려야 한다고 시끄럽던 고등학교 때도 TV와 신문은 내게 너무나 먼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꽤나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대신 어릴 때부터 무언가 읽는 행위를 좋아했다. 집 앞의 책방 아저씨와 마음이 맞는 탓에 보고 싶은 책은 어떤 책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외상 비는 부모님이 부담해야 했지만 한번도 내게 외상값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정말로 매력적인 저자 한 명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강준만이다. 지금도 그만큼 균형 잡힌 비판을 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않는 지식인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의 나는 그가 쓴 모든 저서에 넋을 빼놓을 만큼 빠져 있었다.



김대중. 강준만의 한 저서에 적혀 있는 그 이름을 시작으로 나는 이 정치인에게 빠져 들었다.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그에 관련된 책을 수집했고 당시까지 그가 쓴 모든 저서를 읽었다.



김대중 죽이기의 대표적인 위서로 뽑히는 ‘동교동 24시’등은 노태우 후보가 무차별로 살포를 한 덕분인지 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대손손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나는 운 좋게도 스스로의 정치관을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강요당하지 않고 확립할 수 있었던 셈이다.



비록 어린 나이에 불과했지만 압도적으로 그 양이 많았던 비난 일색의 서적 속에서도 그와 그가 속한 지역에 대한 한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쯤 나는 여러 가지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는 선거에서 김대중 이외의 딴 후보를 단 한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 경상도에서, 그것도 자자손손 그 곳에서 산 할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말로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할아버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고조부와 증조부는 대를 이어 항일운동을 했는데 특히 증조부는 한쪽 손을 못 쓸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듯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에 관해선 너무도 쉽게 목숨을 내 던지는 사람들이었으니 증조부 또한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난 이들은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거꾸로 독립운동가들을 처단했다. 당연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들었고 전쟁의 어수선한 틈은 그들 모두를 빨갱이로 만들어 죽이는데 더 없이 좋은 시기였다.



조부는 평생을 독립에 몸 바쳤는데도 빨갱이로 몰려 죽어간 아버지를 보며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맛본다. 조부는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대표로 합동장례식을 치르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그 억울한 사람들의 묘를 포크레인으로 모조리 엎어 버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5.16의 실체(참여정부 제 5년의 기록 5부)라는 말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유골까지 눈 앞에서 깨 부셔 버리는 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조부는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444번이란 번호표를 달고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간다. 죄목은 빨갱이. 당시 정권의 ‘혁명재판’이란 것에는 이런 일은 일상에 불과했다.



김대중이 할아버지가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온 것도 그때쯤 이었다. 쿠데타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또는 반대할 만한 모든 사람을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죽였다. 조부는 악명 높았던 서대문 형무소 동기인 김대중에 대해 어떤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지의식으로,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연대의식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짊어진 사람만이 아는 그 무엇으로.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을 때, 조부는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봐서 됨됨이를 잘 알지. 해박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참말로 그만한 사람 없다.’ 정치에 대해선 그다지 입을 열지 않았던 조부가 한 정치인을 칭찬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어릴 때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조부가 상고출신의 한 정치인을 치켜세우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고 어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그 사람이 평생 짊어지고 갔을 무수한 사람들의 한과 눈물이다.



부친은 어렸을 적,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잠을 잘 때 매일 소리를 지르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 집에서 자고 왔더니 그게 아니었단다. 내게 할아버지는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밤만 되면 죽음과도 같았던 고문의 악몽으로 평생 육체적인 후유증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그러했기에 말뿐이 아닌 온 몸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신념을 버리지 않은 탓에 평생을 가택연금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가족들의 눈물 때문에 목소리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가슴 한 구석 피로 맺힌 응어리가 있다. 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은 전라도 사람들의 한이 그런 것이라 본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갔지만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빨갱이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억울함을 호소하면 차별하고 무시하고 짓밟는 세상. 김대중 이름 석자를 말하면 빨갱이가 되기에 선생님이라 부르며 숨을 죽여야 하는 세상. 겨우 뱉은 선생님이란 한 단어도 슨상님이라며 조롱하며 짓밟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김대중은 그들에게 유일한 대변인이자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당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가면 대부분이 거절을 한다.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그 다음 정권이 와서 잡아가고 또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또 잡아가서 고문을 하니, 이제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두려움과 한이 지난 10년 사이에 조금은 녹을 수 있었다. 만약 그 10년이 없었다면 감히 일개 국민 따위가 정부를 상대로 억울한 죽음과 학살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2011년부터는 제주 4.3사건을 정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제외한다는 이 시점에서 다시 억울하고 한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까 봐 너무 가슴이 아프다.



보수들이 형님처럼 따르는 나라 미국. 그리고 그 미국에 인정받기 위해 언론조작까지 서슴지 않았던 과거 독재 정권. 하지만 실제로 찰떡궁합이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전두환 정권을 위협하면서 까지(손석희의 시선집중 8월20자 인터뷰 전문 참조)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모이는 에이펙이나 아셈 같은 국제 회의에서 아시아 변방의 한 대통령이 우선 발언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국제 분위기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프랑스의 총리가 살아가야 할 힘이자 도덕적 스승이라고 말하고 독일과 미국의 수장이 앞다투어 존경심을 표하는 대통령.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에서 모두 이름만으로 소개를 하지만 오직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 이라고 말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세계가 구하려 했지만 한국이 죽이려 했던 사람. 한국의 독재자가 죽이려 했지만 세계의 양심들이 구하려 했던 사람. 기득권층은 빨갱이라 욕하지만 응어리를 가진 사람들은 말 없이 지지했던 사람.



그가 떠난 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역사를 편향된 논리의 독점 글쟁이들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도 그처럼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깨어나 우리 후손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고 싶다.


잘 가시오, 세계의 영웅. 그리고 우리의 한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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