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海臨時政府の「独立新聞」、中国語版創刊号見つかる
大韓民国上海臨時政府が発行した中国語版の「独立新聞」の創刊号が見つかった。中国語版「独立新聞」は当時4億人の中国人に韓国の独立運動を知らせ、韓国と中国が連帯して抗日共同戦線を作ろうという趣旨で1922年7月20日に創刊された。臨時政府が出していた国語漢文版の独立新聞(1919〜26年、198号まで発行)の姉妹紙に当たる。
国史編纂委員会は9日、中国語版「独立新聞」創刊号と第2号(1922年7月29日付)、第6号(同年9月7日付)の3号を中国上海図書館で見つけ出したと明らかにした。資料を見つけた編纂委員会のキム・グァンジェ氏は、「この新聞はそれぞれ4面で発行され、これまで実物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号数だ」と説明した。
中国語版「独立新聞」は民族史学者の朴殷植(パク・インシク)が主筆を務めた。現地中国人も記者として採用した点が目につく。週刊で発行されていたが隔週刊に転換し1924年6月までに約40号が発行されたとみられている。発行部数は1000部を超えず、中国全域の官公庁・社会団体・教育機関などに無料配布された。
キム氏は、「臨時政府は厳しい資金難に苦しみながらも独立運動の意義を全世界に知らせるために国際的メディア活動に力を入れた」と説明している。
臨時政府樹立90周年:韓中米で記念式を同時開催
「一松亭の青松は年老いてゆけども…」
13日午前11時40分(現地時間)、中国・上海シェラトン・ホテル3階のグランドボールルーム。
李鍾鼎(イ・ジョンジョン)国家報勲処次長をはじめとする韓国政府の関係者や在外同胞、留学生ら600人余りが参加する中、大韓民国臨時政府樹立90周年記念式が行われた。
歌曲『先駆者』が厳粛に流れ始めると、現地に住む独立功労者の子孫20人余りが目頭を熱くした。今回新たに建国勲章愛国賞を受賞した故イ・ドンファ氏の娘・李義方(イ・イバン)さん(80)も、しばらくうつむいて涙を隠していた。
イ・ドンファ氏は、中国の南京で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学校の教官を務め、独立運動に情熱を注いだが、1934年に爆発事故で亡くなった。中国で生まれ育った李義方さんは、「かすかな父親の記憶が再びよみがえってきた。遅まきながらも祖国で父親の愛国心を評価してくれたことに、ただ感激するばかり」と語った。
「臨時政府の足跡探訪団」の参加者として会場を訪れたキム・ソ¥ンアさん(18)は、「金九(キム・グ)先生が活動した場所を見て回り、これほど厳しい環境の中で独立のために自分のすべてを奉げた方々がいたという事実に、胸が締め付けられる」と語った。
この日のイベントは、臨時政府樹立90周年に合わせ、臨時政府の主な活動拠点だった中国の上海・重慶、米国ロサンゼルス、そして韓国ソ¥ウルで同時に開催された。3カ国4都市の市民や現地在住の同胞、光復会会員、独立運動の足跡を訪ね歩いた高校生、独立功労者の子孫ら合わせて4000人余りが太極旗(韓国の国旗)を振り、臨時政府の法統をたたえた。
李明博(イ・ミョンバク)大統領はこの日、ソ¥ウル南山の白凡広場で行われた記念式に出席し、「臨時政府はまさにわれわれ大韓民国のルーツにして精神的土台だ。先烈が示して下さった大同団結の精神を模範とし、今の危機を先進一流国家建設のための機会として発展させなければならず、ゆくゆくは統一の時代を切り開いていく」と語った。
また韓国政府はこの日、1912年に日本が「朝鮮民事令」を制定し戸籍を作った際に戸籍への登載を拒否し、無国籍者として亡くなった丹齋・申¥采浩(シン・チェホ)氏ら独立功労者の遺族62人に、家族関係登録証書を授与した。
一方、国立ソ¥ウル顕忠院では、海外に埋葬されていた愛国志士の遺骨6柱(宋錫俊〈ソ¥ン・ソ¥クチュン〉、崔能¥翊〈チェ・ヌンイク〉、イ・ジョンホ、チョン・ミョン、キム・ベクピョン、チャン・ヨンホ)の韓国への奉還式が行われた。遺骨は奉還式を終えた後、国立大田顕忠院に移された。
上海=李衛裁(イ・ウィジェ)記者
故国に葬られる愛国志士=
13日、ソ¥ウル市銅雀区の国立ソ¥ウル顕忠院で、
奉還式を終えた愛国志士の遺骨6柱が国軍儀じょう隊の査閲を受けている。
その後、遺骨は大田の国立顕忠院へと移された。/写真=ホ・ヨンハン記者
【私見】
新聞のほうは、資料的に価値があるだろうけど、
いつもどおり「韓国に寄贈するnida」っと、
上海図書館に何時言うか、ひそかに楽しみにしている。
大統領の言うところの「大同団結の精神」の結果が、
南北分断の元になったのだろうに・・・。
言いたい事が、wikiにあったので抜粋して添付しておく。
朝鮮半島南部に進駐した米軍は、臨時政府を事実上解体し、独立までの約3年間、直接軍政を敷いた。
現在の韓国政府は、大韓民国臨時政府の正統性を主張しており、たとえば、憲法の前文で「大韓民国は3.1運動により建てられた大韓民国臨時政府の法統を受け継ぐ」と規定している。もっとも、韓国の主張は国際的には認められていない。連合国からも枢軸国からも第二次世界大戦の参戦国として認められることなく、戦後米軍により解体された。当然ながら、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への署名も認められなかった。
샹하이 임시 정부의 「독립신문」, 중국어판 창간호 발견된다
대한민국 샹하이 임시 정부가 발행한 중국어판의 「독립신문」의 창간호가 발견되었다.중국어판 「독립신문」은 당시 4억명의 중국인에게 한국의 독립 운동을 알려 한국과 중국이 연대해 항일 통일 전선을 만들려는 취지로 1922년 7월 20일에 창간 되었다.임시 정부가 내고 있던 국어 한문판의 독립신문(1919~26년, 198호까지 발행)의 자매지에 해당된다.
국사 편찬 위원회는 9일, 중국어판 「독립신문」창간호와 제2호(1922년 7월 29 일자), 제6호(동년 9월 7 일자)의 3호를중국 샹하이 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분명히 했다.자료를 찾아낸 편찬 위원회의 김·그제씨는, 「이 신문은 각각 4면에서 발행되어 지금까지 실물은 알려지지 않았던 호수다」라고 설명했다.
중국어판 「독립신문」은 민족사 학자 박은식(박·인시크)이 주필을 맡았다.현지 중국인도 기자로서 채용한 점이 눈에 띈다.주간에 발행되고 있었지만 격주간으로 전환해 1924년 6월까지 약 40호가 발행되었다고 보여지고 있다.발행 부수는 1000부를 넘지 않고, 중국 전역의 관공청·사회 단체·교육기관 등에 무료 배포되었다.
김씨는,「임시 정부는 어려운 자금난에 괴로워하면서도 독립 운동의 의의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국제적 미디어 활동에 힘을 썼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시 정부 수립 90주년:한중미로 기념식을 동시 개최
13일 오전 11시 40분 (현지시간), 중국·샹하이 쉐라톤·호텔 3층의 그랜드 무도회장.
리종정(이·존 존) 국가보훈처차장을 시작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관계자나 재외 동포, 유학생등 600명남짓이 참가하는 중,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9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가곡 「선구자」가 엄숙하게 흐르기 시작하면, 현지에 사는 독립 공로자의 자손 20명남짓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이번 새롭게 건국 훈장 애국상을 수상한 고 이·돈파씨의 낭·리의방(이·이반)씨(80)도, 당분간 숙이고 눈물을 숨기고 있었다.
이·돈파씨는, 중국의 난징에서 조선 혁명군일정치 간부 학교의 교관을 맡아 독립 운동에 정열을 따랐지만, 1934년에 폭발 사고로 죽었다.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리의방씨는, 「희미한 부친의 기억이 다시 소생해 왔다.뒤늦게나마도 조국에서 부친의 애국심을 평가해 주었던 것에, 단지 감격할 뿐」이라고 말했다.
「임시 정부의 발자국 탐방단」의 참가자로서 회장을 찾아온 김·소아씨(18)는, 「김구(김·그) 선생님이 활동한 장소를 보고 돌아, 이 정도 어려운 환경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스 분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 가슴을 단단히 조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날의 이벤트는, 임시 정부 수립 90주년에 맞추어 임시 정부의 주된 활동 거점이었던 중국의 샹하이·충칭, 미국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한국소울로 동시에 개최되었다.3개국 4 도시의 시민이나 현지 거주의 동포, 광복회 회원, 독립 운동의 발자국을 찾아 다닌 고교생, 독립 공로자의 자손등 합해 4000명남짓이 태극기(한국의 국기)를 거절해, 임시 정부의 법통을 기렸다.
이명박(이·몰바크) 대통령은 이 날, 소울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행해진 기념식에 출석해, 「
또 한국 정부는 이 날, 1912년에 일본이 「조선 민사령」을 제정해 호적을 만들었을 때에 호적에의 게재를 거부해, 무국적자로서 죽은 단재·신채호(신·최 호) 씨등 독립 공로자의 유족 62명에게, 가족 관계 등록증서를 수여했다.
한편, 국립소울현충원에서는, 해외에 매장되고 있던 애국 지사의 유골 6기둥(송 주석〈소·소쿠틀〉, 최능익〈최·는이크〉, 이·존 호, 정·몰, 김·베크폴, 장·욘 호)의 한국에의 봉환식이 거행되었다.유골은 봉환식을 끝낸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옮겨졌다.
샹하이=이위재(이·위제) 기자
고국에 매장해지는 애국 지사=
13일, 소울시 동작구의 국립소울현충원에서,
봉환식을 끝낸 애국 지사의 유골 6기둥이 국군의식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그 후, 유골은 대전의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졌다./사진=호·욘 한 기자
【사견】
신문 쪽은,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언제나 대로 「한국에 기증하는 nida」와
샹하이 도서관에 몇 시 말하는지, 몰래 기대하고 있다.
대통령이 말하는 곳(중)의 「대동단결의 정신」의 결과가,
남북 분단의 바탕으로 되었을 것이다에···.
말하고 싶은 일이, wiki에 있었으므로 발췌해 첨부해 둔다.
한반도 남부에 진주 한 미군은, 임시 정부를 사실상 해체해, 독립까지의 약 3년간, 직접 군정을 깔았다.
현재의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어 예를 들어, 헌법의 전문으로 「대한민국은 3.1 운동에 의해 지어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무엇보다, 한국의 주장은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연합국으로부터도 추축국으로부터도 제이차 세계대전의 참전국으로서 인정되는 일 없이, 전후 미군에 의해 해체되었다.당연히,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의 서명도 인정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