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允明(ハ・ユンミョン)
【1930年代の朝鮮半島に暗躍していた女衒達】
秦郁彦著「慰安婦と戦場の性」(1999年 2刷)54ページ。
「1939年3月5日付の「毎日新報」(京城発行のハングル新聞)によると、
逮捕された河允明は、妻と共に32年から各地の農村を歩き回り
「生活難であえぐ貧しい農夫達」 に良い仕事があるとだまして、
約150人を満州や中国本土などに700円から1000円で売ったという。
ついでに河から50余人を買った京城の遊郭業者を警察が呼び出すと、
それを察知して彼女達を牡丹江や山東省に転売したことも判明する」
事件の報道
加害者及び被害者が全員朝鮮員だったことから、朝鮮語メディアである東亜日報や朝鮮日報が特集を組むなど、大きく取り上げられた。
1939年3月5日毎日新報、および京城日報夕刊が事件を報道。
1939年3月9日、東亜日報が「誘引事件多端 遊郭業者が娼妓を地方へ転売」と報道。
1939年3月15日の東亜日報では「河允明誘拐事件波紋拡大 悪辣な遊郭業者」として、「誘拐した100人以上の処女」「貞操を強制蹂躙」と「処女」たちが河夫妻に誘拐されたと報道。
1939年3月29日東亜日報、社説「誘引魔の跋扈」で朝鮮の悪徳業者を批判。
雑誌「朝光」(朝鮮日報社刊)1939年5月号も「色魔誘拐魔 河允明」と題して、処女の貞操が蹂躙されたと報じた。
河允明事件
1939年3月4日、全羅南道光州府(現光州広域市)から連れて来られた少女(当時18歳)は、身の危険を感じて犯人宅から逃亡した。犯人は「自分の姪がいなくなった」と東大門警察署に捜索願を届け出たが、不審に思った署員から問い詰められ、7年間に渉る誘拐・人身売買を自白し、逮捕された。犯人は京畿道京城府本町(現大韓民国ソウル特別市中区忠武路)在住の朝鮮員夫妻で、夫の河允明(ハユンミョン)は大田刑務所の元看守であった。1932年(昭和7年)に、夫は大田刑務所を退職したが、転職の当てがなかったため、とたんに生活が苦しくなった。そして「金儲けは娘誘拐に限る」と称し、妻と共謀して連続少女誘拐と人身売買を手がけるようになった。最初の事件は、以下のような手口で行われたという。慶尚北道大邱府南山町(現大邱広域市中区南山洞)の民家に犯人夫妻が訪れ、「俺は京城でも相当な資産家だ。子守娘を雇うのだが、君の娘はどうだろうか。京城の娘はどうも生意気で…」と言葉巧みに親を説得し、前金として10円を支払い、その家の娘(当時18歳)を引き取った。その後、娘を京城ではなく中華民国の天津に連れて行き、1000円で売り飛ばしたという。河允明夫婦はその後の7年間、同様の手口で朝鮮半島南部の少女約150人を拐かし、当時は日本人と朝鮮員などの植民地の人間はパスポートなしで渡航できた満州国や中華民国の人身売買市場に連れて行き、700円 - 1000円で売却していた。累計約60000円を稼いだといわれる。
하윤명(하·윤몰)
【1930년대의 한반도에 암약 하고 있던 뚜장이들】
진쿠니히코저 「위안부와 전장의 성」(1999년 2쇄) 54 페이지.
「1939년 3월 5 일자의 「매일신보」(경성 발행의 한글 신문)에 의하면,
체포된 하윤명은, 아내와 함께 32년부터 각지의 농촌을 걸어 다녀
「생활난으로 허덕이는 궁핍한 농부들」에게 좋은 일이 있다와 속이고,
약 150명을 만주나 중국 본토 등에 700엔에서 1000엔으로 팔았다고 한다.
하는 김에강으로부터 50 다른 사람을 산 경성의 유곽 업자를 경찰이 호출하면,
그것을 찰지해 그녀들을 모란강이나 산둥성에 전매한 것도 판명된다」
사건의 보도
가해자 및 피해자가 전원 조선원이었던 일로부터, 조선어 미디어인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특집을 짜는 등, 크게 다루어졌다.
1939년 3월 5일 매일신보, 및 경성 일보 석간이 사건을 보도.
1939년 3월 9일, 동아일보가 「유인 사건 다단 유곽 업자가 창기를 지방에 전매」라고 보도.
1939년 3월 15일의 동아일보에서는 「하윤명유괴 사건 파문 확대 악랄한 유곽 업자」로서, 「유괴한 100명 이상의 처녀」 「정조를 강제 유린」과「처녀」들이 강부부에게 유괴되었다고 보도.
1939년 3월 29 닛토아일보, 사설 「유인마의 발호」로 조선의 악덕업자를 비판.
잡지 「조광」(조선일보사간) 1939년 5월호나 「호색한 유괴마하윤명」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처녀의 정조가 유린되었다고 알렸다.
하윤명사건
1939년 3월 4일, 전라남도 광주부(현광주광역시)로부터 데려 올 수 있던 소녀(당시 18세)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범인택으로부터 도망했다.범인은 「자신의 질녀가 없어졌다」라고 동대문 경찰서에 수색원을 신고했지만, 의심스럽게 생각한 서원으로부터 캐묻을 수 있어 7년간에 섭유괴·인신매매를 자백해, 체포되었다.범인은 경기도 경성 후모토마을(현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나카구 충무로) 거주의 조선원 부부로, 남편의 하윤명(하윤몰)은 대전 형무소의 전 간수였다.1932년(쇼와 7년)에, 남편은 대전 형무소를 퇴직했지만, 전직이 맞혀가 없었기 때문에, 라고 단순히 생활이 어려워졌다.그리고 「돈벌이는 딸(아가씨) 유괴에 한정한다」라고 칭해, 아내와 공모해 연속 소녀 유괴와 인신매매를 다루게 되었다.최초의 사건은, 이하와 같은 수법으로 행해졌다고 한다.경상북도 대구부 미나미야마쵸(현대구광역시 나카구 남산동)의 민가에 범인 부부가 방문해 「나는 경성에서도 상당한 자산가다.아이 보는 사람딸(아가씨)를 고용하지만, 너의 딸(아가씨)는 어떻겠는가.경성의 딸(아가씨)는 아무래도 건방지고
」라고 교묘한 말에 부모를 설득해, 선금으로 해서 10엔을 지불해, 그 집의 딸(아가씨)(당시 18세)를 인수했다.그 후, 딸(아가씨)를 경성에서 (은)는 없게 중화 민국의 청진에 데리고 가, 1000엔으로 팔아 치웠다고 한다.하윤아키오부는 그 후의 7년간, 같은 수법으로 한반도 남부의 소녀 약 150명을 괴 빌려주어, 당시는 일본인과 조선원등의 식민지의 인간은 패스포트 없이 도항할 수 있던 만주국이나 중화 민국의 인신매매 시장에 데리고 가, 700엔 - 1000엔으로 매각하고 있었다.누계 약 60000엔을 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