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日本という単語がいつ生じたのかに対してこの前にチャットルームでちょっと人の口に戸は立てられないで話したようでそれをまどろみ 整理して話申し上げようとします.

 

日本という単語が生じた来由に対しては下のような史料があります

 

 

 

倭国が名前を直して日本(日本)と したが, 自ら日がのぼる所に近いからあまり呼んだ.’と言った.

 

倭国更号日本 自言近日所出以為名

 

三国史記文武王 10

 

日本国(日本国)と言う(のは)倭国(倭国)の別種(別種)なのにその国日替わり(日辺)に あるから日本(日本)を名前でしたとも言って倭国(倭国)が自らその名前が嫌で吹いて(不雅-聞き取りあまり良くなさ)して 直して日本(日本)といったと言ったりして日本(日本)が昔の小菊(小国)で倭国(倭国)の地を 一緒にしたと言ったりする.

 

日本国者倭国之別種也以其国在日辺 故以日本為名或曰倭国自悪其名不雅 改為日本或云日本旧小国


일본이라는 단어의 유래

일본이라는 단어가 언제 생겼는지에 대해서 지난 번에 채팅방에서 좀 중구난방으로 이야기 한거 같아서 그것을 좀 정리해서 이야기 드리고자 합니다.

일본이라는 단어가 생긴 유래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사료가 있습니다

 

일본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삼국사기 문무왕 10

일본국(日本國)이란 일본(倭國)의 별종(別種)인데 그 나라 일변(日邊)에 있는 때문에 일본(日本)을 이름으로 했다고도 하고 일본(倭國)이 스스로 그 이름을 싫어하고 불아(不雅-듣기 그리 좋지 않음)하여 고쳐 일본(日本)이라 했다고도 하고 일본(日本)이 옛 소국(小國)으로 일본(倭國)의 땅을 아울렀다고도 한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爲日本或云日本舊小國倭國之地

구당서 동이 열전

우리가 일본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일본은 고대에 倭라고 불리었는데 이름이 좀 민망해서 일본으로 바꿨다 정도입니다만.. 이것과 다른 이야기들도 구당서는 적고 있습니다. 일단 별종이라고 하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저 별종이라는 표현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게 구당서에서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고 기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제는 그 시조가 부여에서 온 사람들이고 실제로 본인들도 대륙의 부여가 멸망했을 때에 그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라고 칭할 정도로 부여와 관계가 깊습니다. 하지만 부여와 백제는 엄연히 별개의 국가입니다. 구당서는 일본과 倭 역시 그런 관계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가 아는 상식과 다릅니다. 일본은 그냥 倭가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히 구당서에서는 일본은 소국으로서 왜의 땅을 병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것은 일정 시기 倭도 있었고 일본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각각의 세력으로 존재했다는 뜻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해가 뜨는 곳 이라는 의미의 일본이라고 하는 단어는 현지인들은 쓸 수 없고 도래인들 즉 일본에서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 만든 단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간에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존재입니다. 고대 열도의 현지인들도 그렇게 느꼈을 거구요 그 사람들이 자기 땅을 해가 뜨는 곳이라고 했을리는 없고 ,  이것을 저 쪽은 태양이 뜨는 곳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서 쪽에 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이렇게 일본의 국호의 유래는 많은 수수께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만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자료가 최근에 공개되었습니다.

좀 길지만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WrM&articleno=858&categoryId=95&regdt=20140214075125

 

백제 유민으로 중국 당나라의 신하가 된 예군(禰軍·613∼678) 묘지명(墓誌銘)에 등장하는 "일본(日本)"이란 단어는 국호(國號)가 아니라 당나라 동쪽의 해 뜨는 나라, 그중에서도 백제를 가리키는 호칭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문학학술원장은 지난 20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제16회 정기발표회에서 ""예군 묘지"속의 "일본" "부상(扶桑)" "풍곡(風谷)" "반도(盤桃)" 등 동방을 의미하는 어구(용어)와 함께 기록돼 있는데, 문맥상 백제를 지칭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지난해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 나라(奈良)대 교수도 예군 묘지 속의 "일본"이라는 단어의 국호설을 부정하고 "일본"이 백제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도노 교수의 연구가 "일본"이란 단어의 국호 여부에 집중한 반면, 이 원장은 처음으로 역주 성과에 기반한 예군 묘지의 번역문을 제시하고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 속에서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예군 묘지는 지난 2011년 왕롄룽(王連龍) 중국 지린(吉林)대 고적연구소 연구원이 학술잡지 "사회과학전선" 7월호에 탁본사진과 판독문을 공표하면서 처음으로 존재가 알려졌다.

 

왕 연구원이 공개한 탁본사진에 따르면, 예군 묘지는 1행에 4글자씩 4 16자가 음각된 덮개석과 31행에 모두 884자가 음각된 지석으로 구성돼 있다. 왕 연구원은 "일본"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이 묘지가 일본 국호의 성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새 사료(1차 사료)라고 주장했다. 일본이란 국호는 일반적으로 701년 다이호(大寶) 율령 제정 시기에는 성립해 있었다고 추정된다.

 

예군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할 당시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당나라에 넘기고 중국에 들어가 무관으로 출세한 예식진의 형이다. 예군 묘지에는 그가 당나라 신하로 살았던 660년부터 당 지역에서 죽는 678년까지의 생애와 업적 등이 주로 묘사돼 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보면, 670 7월 고구려 유민의 반란 당시 웅진도독부 사마(司馬)로 신라에 사자로 파견됐던 예군은 스파이 활동을 이유로 1 10개월 동안 억류됐다 풀려났으며 왜()에 사자로 두 차례 파견되는 등 당의 외교, 특히 백제 고지의 점령지 정책이나 신라·왜와의 교섭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예군 묘지명 14행에 등장하는 "참제일단칭신(僭帝一旦稱臣·참제가 갑자기 신하라고 칭하였으므로)" "참제"를 기존 연구에서 추정해온 "백제 의자왕"이 아닌, "신라 문무왕"으로 본 것이 이 원장 발표의 핵심이다. 당나라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의 잔존세력을 금마저(익산)에 머물게 하고 안승(安勝)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 신라 문무왕은 "참제"라고 할 수 있으며 예군은 바로 이때 신라에 체재하고 있었다는 것.

 

예군 묘지명 10 "우시일본(于時日本)"부터 15 "좌융위낭장(左戎衛郎將)"까지 내용은 바로 예군의 외교사자로서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원장은 10 "우시일본" 이하 동방을 의미하는 어구가 등장하는 구절을 "때마침 일본(백제)의 잔당은 부상()에 의거하여 주벌(誅罰)을 피하고 있었다. 풍곡(고구려)의 잔당은 반도(신라)를 거점으로 하여 (그 적을 막는 모습은) 견고하였다"고 해석했다.

 

예군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이 원장은 이 같은 사실이 예군 묘지가 제작된 시점,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다. 예군 묘지는 일본 국호의 성립이 678년 이후의 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란 것이다.

 

윤선태(역사교육) 동국대 교수는 ""일본"이란 단어가 일본에서 생산된 용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며 일본의 국호 제정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의 지적인 역할을 추정케 해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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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일본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도 일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묘지명이 나왔고, 이것이 어떻게 보아도 국명이 아니라 특정 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합의가 되었지만 그럼 뭐냐? 이 일본이.. 이 부분에 와서는 한국 중국 일본 학자들이 갑론을박 한다. 이렇게 요약이 되겠습니다.

일단 저는 저기 나오는 한국 중국 일본 강단 사학자들의 주장이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읿본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가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중일 강단 사학자들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일본서기를 읽을 줄 몰라서 그런 것인데 사실 일본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초는 일본서기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丁未 天皇崩于磐余玉穗宮 時年八十二 ○冬十二月丙申朔庚子 葬于藍野陵 【或本云 天皇 廿八年次甲寅崩 而此云廿五年次辛亥崩者 取百濟本記爲文 其文云 太辛亥三月 軍進至于安羅 營乞城 是月 高麗弑其王安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 崩薨 由此而言 辛亥之 當廿五年矣 後勘校者 知之

 

이때 천황이 磐余玉穗宮에서 82세에 붕하였다. 12월 藍野陵에 장사지냈다. [ 어떤 책에 천황이 28次甲寅에 붕하였다 하였다. 그것을 여기 25次辛亥에 붕하였다 한 것은 백제본기의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글에 말하기를 次辛亥년 9월에 군사가 안라에 가서 乞城에 주둔하였다. 이달에 고구려가 그 왕 安을 죽였다. 또 들으니 일본의 천황 및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하면 辛亥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勘校하는 자는 알 것이다.

 

일본서기 계체천황 25

 

일본서기 계체천황 25년은 531년에 해당합니다. 일본서기의 기년은 믿을 수 없지만 고구려 안장왕이 죽은 시기와 같다고 하여서 531년의 일을 사관이 기록하고 있다고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본 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 했는데 531년에 일본은 국호로서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저 천황은 일본서기의 계체 천황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황태자와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적은 일본서기 저자가 곧바로 이어지는 안한천황 즉위 전기에서는 안한천황이 계체천황의 장자이다. 라고 하는 모순된 기록을 이어서 적습니다. 사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들은 대부분 가공 인물들이고 계체 천황도 그에 해당합니다. 일본의 황태자와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곧 이어서 안한천황 즉위 기록에서 이 사람은 계체천황의 장자다. 라고 쓰면서 읽는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만, 사실 일본서기는 본질적으로 백제 신라 가야사입니다. 이 실제 역사를 토대로 가공의 위사를 창작하는 이중구조인데 이 부분은 정말 특이합니다. 노골적으로 위사와 실사를 구분하여 적으면서 후세에 감교하는 자는 꼭 알아야 한다고 무엇인가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이 기록을 강조하는데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일본서기 저자가 말한 일본이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고구려 안장왕이 죽은 531년에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와 황자가 죽은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일본이라고 적었지만 역시 반도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봐야겠지요. 반도에서 일본이라는 표현 대신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다면 이 일본서기 저자가 말한 일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531년과 일년 오차가 나는 532년에 다음의 기록을 접하게 됩니다.

19(서기 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삼국사기 신라 본기 법흥왕 [法興王]

 

결국 가야 신라 백제사를 분식 기록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같은 시기에 금관가야의 멸망을 기록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아마도 실제 역사는 열도에서의 금관가야 세력이 열도의 백제와 여타 신라 세력등으로부터 실질적인 멸망을 당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반도의 금관가야 세력이 신라에 투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부터 송서 왜 5왕은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위사를 기록하는 중간에 실제 정사를 추적할 수 있는 여러 단초들을 제공하면서 후세에 감교하는 자는 알것이다. 라고 기록한 저 사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틀림없이 열도에서 금관가야 세력의 멸망은 중요한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사관으로서 그것을 알려야 한다는 양심과.. 위사를 기록해야만 한다는 압력 그 중간에서 탄생한 것이 ..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와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연이어서 안한천황은 계체천황의 장자라고 기록하는 우스꽝스러운 문장을 남기게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놓고보면 저 문장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은 문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이라는 단어는 한중일 제도권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백제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인들이 원래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바다 건너서 육안으로 보였던 해가 뜨는 땅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일본은 언제부터 사용된 것일까요 아마도 가야인들이 처음 열도로 건너간 그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 저자가 이 정도 이야기 했다면 후세에 감교하는 자는 알것이다. 라고 한 예측과 달리.. 한중일 제도권 학자들은 여전히 저런 모습인데.. 이것은 역시 일본서기를 이해 못하는 그 한계일 것입니다만.. 벌써 130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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