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일본 육해군 측량부가 만든 地圖
울릉도 독도 위치에 竹島와 松島가 표기되어 있고 한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1904년 한국 全圖
일본에서 제작된 地圖이다
1904년 제작된 한국 全圖의 일부
울릉도 (松島)라고 표기되어 있고 竹島는 단독으로 표기되어 있다
1924년 일본의 중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日本海海戰圖에는
竹島(리앙코르 島)라고 함께 倂記되어 있다
그리고 竹島는 朝鮮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919년에 朝鮮총독부에서 제작한 朝鮮地誌 자료이다
울릉도 竹島 觀音島는 경상북도에 소속되고 있다
울릉도는 서면 북면 남면으로 걸쳐 있는데 竹島는 남면 觀音島는 북면에 소속되어 있다
울릉도 면적은 4.700方里 ,최고 높이는 983.6미터
竹島 면적은 0.016 方里. 최고 높이는 105미터 , 해안선 길이는 2.000미터 (0.18方里 )
觀音島의 면적은 0.011方里 최고 지점 높이는 107미터 라고 기록하였다
朝鮮총독부는 독도를 울릉도와 觀音島를 묶어 朝鮮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합국은 1945년 2차대전 후 부터 1951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發效되는 시점까지 일본을 통치하며
일본이 침탈한 영토를 원래의 국가에게 돌려 주는 정책을 하였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회복을
1945년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주권 회복과 일본이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 이후 일본이 침탈한 영토는 원래의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는 연합국의
일본의 영토 처리 원칙에 따른 것이다
연합국은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 사령관 지령 677호로 정치 행정을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대한
각서를 발표하고 집행하게 된다
SCAPIN 제 677호의 제3조는
독도 (리앙코르락스 )를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하였고
1946년 6월 22일 SCAPIN제 1033호로 일본의 선박과 어부들은 독도(북위 37도 15 동경 131도 53 )12마일 이내
접근을 금지하였다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관 제677호 1033호 각서가 발표된 후 일본이 제정한 각종 법령 중에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법규가 28개가 되었고 이 중에 25개는 폐지되었지만
3개 법령은 현행 일본 법무성이 발간한 일본 법규에 실려 있다
법령 2조
朝鮮 대만과 함께 독도를 외국으로 定義한다 라고 되어 있다
우정성령 제13호는 1950년 8월 30일에 제정되었다
총리부령 제 24호
1951년 6월 6일 제정 ,현행 일본 법규에 등재되어 있다
제2조에 일본의 부속 섬에서 제주도 을릉도 독도를 제외한다 라고 되어 있다
대장성령 99호
1952년 8월 5일 제정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후 제정된 법령
일본이 반환받아야 할 부속 섬에서 독도는 제외되고 있다
독도의 명칭은
한국에서는 512년 신라에 귀속된 이후 1899년까지 공식적으로 于山島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에 강치가 많다고 하여 可支島 또는 돌섬이라는 의미로 독도(dokdo)라고 부르고 있었다
1899년 朝鮮 정부는 울릉도에 400여 가구와 1.7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아
이것을 근거로 1900년 10월 25일 高宗 칙령 41호를 공표하는데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는 울릉도를 독립된 鬱島郡으로 개칭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한다
또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이 돌섬이라는 의미의 독도라고 부르는 것을 근거로 한자로 석도라고 표기한다 라는
내용을 담은 관보 제1716호를 공표한다
이후 석도는 독도로 개칭된다
1906년 울릉군수 沈興澤이 강원도 관찰사에 보고서를 작성한 문서에
本郡 소속 독도 라는 문장이 나온다
독도는 dokdo의 한자의 발음대로 쓴 것인데 이것은 독도가 울릉도의 관할 지역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1900년 高宗 칙령 공표 이전 부터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dokdo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 .
일본의 경우 울릉도 독도의 호칭 변경의 유래를 살펴 보자
위에 地圖에서 보면
1903년 地圖에는 울릉도(竹島) 독도(松島)라고 표기하다가
1904년 地圖에서는 울릉도 (松島) 독도 (竹島)라고 표기되고 있다
독도의 다른 이름 랑코島 라는 명칭은 1903년에 등장하였는데 시마네현 편입 이후 독도가 竹島라고 명칭이 바뀐 이후에도
계속 잔존하여 1912년 地理誌에서는 리앙코르島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것은 일본의 중앙 정부가 독도를 고유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水路誌에는 1883년 독도의 호칭으로 리앙코르島 열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후 다케시마로 바뀌었다가
다케시마와 리앙코르島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과정을 거쳐 1907년 이후 다케시마로 단독 표기되는 것이 증가하게 된다
정리하면 1920년 일본의 水路誌에는 다케시마와 리앙코르락스가 倂記되어 있고
다케시마 단일 호칭은 1933년 朝鮮연안 水路誌에만 보인다
한국의 경우 독도의 호칭으로 于山島 可支島 석도 등 여러 호칭이 있었지만 제일 오랫동안 사용된 명칭은
于山島이다
이 于山島 명칭은 1900년 이전 까지 사용되다가 독도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은 독도의 명칭이 바뀌는 변천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일본의 독도의 명칭 변경 과정은 ,변천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바뀌는 자연스럽지 않은 변경이
있었다
울릉도(竹島), 독도 (松島)에서 ..울릉도(松島) 독도(竹島)로 바뀌고 있고
1903년~ 1904년 사이 독도가 竹島로 명칭이 바뀐 이후에도 서양 프랑스가 이름을 붙인 리앙코르라는
명칭을 함께 사용했다는 것은
일본이 독도를 고유 영토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地圖의 줄은
행정 분리이며 영토의 분리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체결 이후 독도가 일본의 정치나 행정으로 통치되었던 역사는 없다
1903年日本陸海だね測量部が作った 地図
鬱陵島独島位置に 竹島と 松島が表記していて韓国の領土になっている
1904年韓国 全図
日本で製作された 地図だ
1904年製作された韓国 全図の一部
鬱陵島 (松島)と表記していて 竹島は単独で表記している
1924年日本の中等学校教科書に収録された 日本海海戦図には
竹島(リアングコル 島)というに 併記になっている
そして 竹島は 朝鮮の領土で記録している
これは 1919年に 朝鮮総督府で製作した 朝鮮地誌 資料だ
鬱陵島 竹島 観音島は慶尚北道に属している
鬱陵島は書面北面南面でかけているのに 竹島は南面 観音島は北面に属している
鬱陵島面積は 4.700方里 ,最高高さは 983.6メートル
竹島 面積は 0.016 方里. 最高高さは 105メートル , 海岸線長さは 2.000メートル (0.18方里 )
観音島の面積は 0.011方里 最高地点高さは 107メートルと記録した
朝鮮総督府は独島を鬱陵島と 観音島を縛って 朝鮮の島で認識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連合国は 1945年 2次大戦後から 1951年 4月 28日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が 発效になる時点まで日本を統治して
日本が侵奪した領土を元々の国家に返す政策をした
1943年カイロ宣言は韓国の独立と領土回復を
1945年ポツダム宣言は日本の主権回復と日本が返還しなければならない領土に対する内容を扱っている
これは日清戦争が起こった 1894年以後日本が侵奪した領土は元々の国家に返還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連合国の
日本の領土処理原則によることだ
連合国は 1946年 1月連合国最高司令官指令 677号で政治行政を日本から分離することに対する
覚書きを発表して執行するようになる
SCAPIN 第 677号の第3条は
独島 (リアングコルラックス )を日本の領土から除いたし
1946年 6月 22日 SCAPIN第 1033号で日本の船舶と漁夫たちは独島(北魏 37度 15 東京 131度 53)12マイル以内
接近を禁止した
1946年連合国最高司令官第677号 1033号覚書きが発表された後日本が制定した各種法令の中に
独島が日本の領土ではないという内容を記した法規が 28個になったしこの中に 25個は廃止されたが
3個法令は現行日本法務省が発刊した日本法規に積まれている
法令 2条
朝鮮 台湾とともに独島を外国で 定義するとなっている
友情聖霊第13号は 1950年 8月 30日に制定された
総理部令第 24号
1951年 6月 6日制定 ,現行日本法規に登載されている
第2条に日本の部属島で済州島ウルルンド独島を除くとなっている
大将聖霊 99号
1952年 8月 5日制定
1951年 9月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締結以後制定された法令
日本が返還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部属島で独島は除かれている
独島の名称は
韓国では 512年新羅に帰属された以後 1899年まで公式的に 于山島という名称が使われた
ところで鬱陵島住民たちは独島にあしかが多いと言って 可支島 またはドルソムという意味で独島(dokdo)と呼んでいた
1899年 朝鮮 政府は鬱陵島に 400余家具と 1.700人余りの住民が居住しているという報告を受けて
これを根拠で 1900年 10月 25日 高宗 勅令 41号を露するのに
江原道蔚珍県に属している鬱陵島を独立された 鬱島郡で改称して独島まで管轄するようにする
また独島は鬱陵島住民たちがドルソムという意味の独島と呼ぶことを根拠で漢字で石刀と表記するという
内容を記した官報第1716号を露する
以後石刀は独島に改称される
1906年鬱陵軍需 沈興沢が江原道観さつ使に報告書を作成した文書に
本郡 所属独島という文章が出る
独島は dokdoの漢字の発音どおり書いたことなのにこれは独島が鬱陵島の管轄地域だったということを証明する
だから 1900年 高宗 勅令公表以前から鬱陵島住民たちは独島を dokdoと呼んでいたこと .
日本の場合鬱陵島独島の呼称変更の来由をよく見よう
上に 地図で見れば
1903年 地図には鬱陵島(竹島) 独島(松島)と表記してから
1904年 地図では鬱陵島 (松島) 独島 (竹島)と表記している
独島の他の名前ラングコ島 という名称は 1903年に登場したが島根県編入以後独島が 竹島と名称が変わった以後にも
ずっと残存して 1912年 地理誌ではリアングコル島という名称が登場するこれは日本の中央政府が独島を固有領土で
認識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見せてくれることだ
水路誌には 1883年独島の呼称でリアングコル島 ヨルアムという名称が登場した後竹島に変わってから
竹島とリアングコル島が混用されて使われる過程を経って 1907年以後竹島で単独表記するのが増加するようになる
整理すれば 1920年日本の 水路誌には竹島とリアングコルラックスが 併記になっていて
竹島単一呼称は 1933年 朝鮮沿岸 水路誌にだけ見える
韓国の場合独島の呼称で 于山島 可支島 石刀など多くの呼称があったが一番長い間使われた名称は
于山島だ
が 于山島 名称は 1900年以前まで使われている途中独島で名称が変わった
韓国は独島の名称が変わる移り変わり過程があったと言ったら
日本の独島の名称変更過程は ,移り変わる過程を経らないで急に変わる自然ではない変更が
あった
鬱陵島(竹島), 独島 (松島)で ..鬱陵島(松島) 独島(竹島)に変わっているし
1903年‾ 1904年の間独島が 竹島で名称が変わった以後にも西洋フランスが名付けたリアングコルという
名称を一緒に使ったということは
日本が独島を固有領土と認識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日本ではこの 地図の竝びは
行政分離で領土の分離ではないと主張しているが
サンフランシスコ締結以後独島が日本の政治や行政に統治された歴史はい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