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가면은 깨어졌으며 부메랑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스토리를 전개해가던 SBS ‘나쁜 남자’(연출 이형민, 극본 이도영 김재은 김성희)의 결말은 그러했다.

지금까지 이런 드라마는 없었다. TV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확산되고 인기를 모아 가면서 드라마의 풍속도 또한 달라졌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 드라마와 최근의 드라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볼 수는 없다. 이미 기존의 드라마들과는 달리 요즘의 드라마는 영상과 스토리, 등장인물 각각의 대사와 편집, 심지어 OST까지도 다른 수준에 올라가 있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한들 우리나라 드라마가 가지고 가는 기본 얼개와 구성은 조금씩 요소들만 달리하며 나아갔을 뿐 시청자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해주었다. 바로 해피엔딩에 대한 갈망이다. 아무리 트렌드를 반영하고 사회상을 반영한 드라마라 할지라도 심지어 열린 결말을 자처했던 드라마라 할지라도 우리 드라마들은 해피엔딩의 틀에서 위배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쁜 남자’의 경우 파격적인 전개방식만큼이나 너무나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언젠가 그 아이(두 명의 태성)들을 다시 만나면 모두 묻고 다같이 웃으면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는 홍 회장, 가면 속 실체를 들켜버리고도 여전히 세상 위에 군림한 미소로 되돌아온 신 여사(김혜옥), 다 묻어두고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는 태라(오연수)와 재인(한가인).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쉽게 지나가기에 각자에게 남겨진 상처는 너무나 컸고 그들에게 겨눠진 총부리는 너무나 거셌다.



진부한 스토리에 숨은 매력

사실 스토리만을 놓고 보자면 ‘나쁜 남자’는 진부한 통속극에 지나지 않았다.

극중 해신그룹의 후계자로 짧은 유년기를 보내다 친아들이 아님이 밝혀지며 파양된 심건욱(김남길). 건욱은 복수의 칼을 숨긴 채 성장, 해신그룹의 장녀 태라와 모네(정소민)를 동시에 유혹하며 사랑 속에서 고통받게 만든다. 그러나 건욱은 해신그룹으로의 편입을 욕망하며 태성(김재욱)을 유혹하는 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얽히고 설킨 멜로의 줄기였다. 이데 덧붙여 건욱이 해신그룹의 진짜 아들임이 밝혀지며 자기 가족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비극이 ‘나쁜 남자’의 결론이었다.

’나쁜 남자’가 방영 내내 보여줬던 미스터리적 전개, 즉 건욱과 고아원에서 함께 성장했고 태성을 사랑하다 죽음에 이르게 된 선영의 이야기가 매회차분마다 자연스럽게 덧대어지며 의문을 풀어갔고 그 과정에서 해신이라는 욕망이 쓰고 있던 꺼풀들은 하나씩 벗겨졌다. 이같은 파격적 전개 방식과 마치 수백 개의 화보를 이어붙인 듯한 뛰어난 영상미와 그것에 조화를 이루었던 OST, 이러한 요소들이 없었다면 ’나쁜 남자’는 소위 말하는 뻔한 통속극이자 막장드라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쁜 남자’가 보여준 것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묻어있었다.

해신가와 해신가에 종속된 사람들이 대변하는 파괴적인 욕망은 실로 다채로웠다. 해신가 신 여사는 유리가면 속으로 추악한 얼굴을 숨긴 채 고개를 들고 있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위선과 오만함을 덧댄 추악한 실체, 물질과 권력을 손에 쥔 채 누구든지 마음껏 휘둘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그러진 상류사회의 얼굴이었다. 이러한 상류사회를 향한 상승욕구를 가진 아주 평범한 인물의 모습은 재인었다. 물질과 상승에 대한 지극히 속물적인 욕망, 그것으로 인해 연인에게 버림받기도 했던 재인은 의도적으로 태성에게 접근하며 욕망을 풀어가려 했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도 열어준 적 없던 사랑의 감정에 이끌려 동생 모네가 사랑하는 남자 건욱을 사랑하게 된 태라, 그녀에게선 사랑을 향한 욕망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쁜 남자’가 그려낸 스토리는 결국 물질을 향한 욕망, 상승을 향한 욕망, 사랑을 향한 욕망 속에서 끝도 없는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이 이토록 허망하고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또한 현실의 단면과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재발견

’나쁜 남자’의 17회를 말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이었다.

그 어느 한 사람 빼놓기가 서운하리만큼 호평받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네티즌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화제가 되었다. 많은 네티즌들은 드라마 게시판을 통해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 하냐. 정말 물 오른 연기력이다” “배우들이 드라마를 더 살린다. 이들의 연기에 감정이 몰입돼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여운이 오래 간다”는 반응들을 보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주연배우들의 활약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매작품마다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김남길은 ’나쁜 남자’를 통해 다시 한 번 이미지를 구축시켰다. 전작이었더 MBC ’선덕여왕’에서의 비담 캐릭터가 현대극으로 옮겨온 듯한 ’나쁜 남자’ 속 건욱은 김남길을 통해 애절한 눈빛에 보호본능을 불러오면서도 뒤돌아서면 돌변하는 차가운 눈빛의 나쁜 남자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오연수는 더욱 빛났다. 20대의 여배우 못지 않게 잘 다듬어진 몸매와 고혹적이면서 지적인 스타일, 깊이 있는 눈빛과 낮은 음성은 사랑을 향해 모든 것을 던지는 태라의 모습을 십분 살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온 한가인은 여전한 미모로 눈길을 끌며 시청자들과 만났고 재인이 품은 속물 근성을 한층 성숙한 연기력으로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김재욱 역시 휘청거리며 나약하기 그지 없는 태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내 또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나쁜 남자’는 KBS 2TV ’제빵왕 김탁구’라는 막강한 상대를 만나 시청률 면에 있어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빼어난 영상과 파격적인 전개 방식, 진부한 스토리 속에 담긴 우리 현실의 숨겨진 이면을 그려내며 나름의 팬층을 구축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시도로 큰 여운을 주며 ’명품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은 드라마 ’나쁜 남자’는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에게 숙제를 남겼다. 건욱의 나레이션을 통해서다.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진 부메랑이었던 건욱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려는 곳은 어디일까. 천국일까, 지옥일까.” 고승희기자/she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