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도 전라도 차별이 있다 의 것인지, 일본측이 본 견해
현대의 이른바 「한인」이 원래 살고 있던 것은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 그 중에서도 한인이 가장 순수하게 피를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고 해지는 지역이전라도로,거기에는 (쿠다라)백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라도가 현재에도 지역 차별되고 있는 것은 왠지?
그것은10~14세기 고려의 건국자의 「왕건」이 있다.
왕건은 당시의 중국(종·원)과의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아 올려, 그에게 수행한 사람은 만주인이므로, 그도 현재의 중국인이었던 가능성이 높다.그 재력, 만주인의 아군에 의해서 조선을 통일한 것이 10 세기로, 그가 전라도 출신자를 푸대접 하는, 일을 최초로 시작했다.왕건이 쓴 「훈요10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1.불교를 숭상 한다.
2.도처 대사의 풍수 지리설 에 의해서만, 절을 만들도록(듯이) 한다.
3.왕위 계승은 특별한 경우는 아니면 장자를 먼저 한다.
4.중국의 풍습에 함부로 따르려고 하지 않고, 계단은 만족이므로 멀리한다.
5.사이쿄(현재의 평양)는 우리 나라의 지맥의 근본이기 때문에, 왕은 1년에 100일 이상 여기에 머무른다.
6.불을 시중드는 연등회와 산하의 신을 시중드는 8관회를 자주 실시한다.
7.신하와 백성에 대한 상벌을 공평하게 한다.
8.차령산맥 이남(호남 지역, (쿠다라)백제의 고지에 상당)의 사람들은, 별로 등용하지 않는다.
9.신하와 군인의 급료는 함부로 증감하지 않고, 평안인 때이면 있다만큼 취약함을 잊지 않는다.
10.왕은 언제나 스스로를 연마하는 것에 힘을 다한다.
전에, 후삼국 시대(892년~936년)가 있었습니다.
만주인의 고려에 대해서, 후 (쿠다라)백제의 한인의 세력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가훈은 고려의 시대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까지 쭉 인계되게 되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신라(경상도)는 차별을 하시지 않았다.재벌이나 대통령도 여기의 출신자가 많다.
이것은 신라가 시원스럽게 왕건에 항복, 왕위를 왕건에 양보했다.
신라는 한 때의 통일 왕조로, 문명 문화가 매우 돋보이고 있었으므로, 왕건들도(신라)에는 한 눈을 두고 있었다.그러나 후 (쿠다라)백제에는 쭉 적대하고 있었다.그래서 차별적인 감정이 족쇄가 되고, 쭉 계속 되어 왔다.
(쿠다라)백제의 이야기가 되면, 일본왕이 2002년 월드컵배전에 말씀하신 말씀안에, 「간무 천황의 생모가 (쿠다라)백제의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고 있는 것에,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습니다.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 때 이래, 일본에 오경 박사가 대대 초빙 되게 되었습니다.또, 무령왕의 아이,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쿠다라)백제를 싫어하면서도, (쿠다라)백제의 자손은 일본이다, 라고 야유되는 기사를 자주 봅니다.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님 들인 국명이 나옵니다.
한국인의 시점에서 보면, 어느 시대가 제일 영화를 쌓아 올렸다고 생각합니까?
なぜ今でも全羅道差別があるのか、日本側からみての見解
現代のいわゆる「韓人」が元々住んでいたのは朝鮮半島の南部地域で、その中でも韓人が最も純粋に血を残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言われる地域が全羅道で、そこには百済が存在していた。
全羅道が現在でも地域差別されているのはなぜか?
それは10~14世紀高麗の建国者の「王建」がいる。
王建は当時の中国(宗・元)との海上貿易で富を築き、彼に付き従った人は満州人なので、彼も現在の中国人だった可能性が高い。その財力、満州人の味方によって朝鮮を統一したのが10世紀で、彼が全羅道出身者を冷遇する、ことを最初に始めた。王建が書いた「訓要十条」にはこう書かれている。
1.仏教を崇尚する。
2.道先大師の風水地理説によってだけ、寺を作るようにする。
3.王位継承は特別な場合ではなければ長子を先にする。
4.中国の風習にむやみに従おうとせず、契丹は蛮族なので遠ざける。
5.西京(現在の平壌)は我が国の支脈の根本であるから、王は年に100日以上ここにとどまる。
6.仏に仕える燃燈会と、山河の神に仕える八関会をよく行う。
7.臣下と民に対する賞罰を公平にする。
8.車嶺山脈以南(湖南地域、百済の故地に相当)の人々は、あまり登用しない。
9.臣下と軍人の給料はむやみに増減せず、平安な時であればあるほど脆弱さを忘れない。
10.王はいつも自らを磨き上げることに力を尽くす。
前に、後三国時代(892年~936年)がありました。
満州人の高麗に対して、後百済の韓人の勢力が激しく抵抗したため、また、いつ反乱を起こすかもしれないので、この家訓は高麗の時代のみならず、李氏朝鮮までずっと引き継がれることになった。
しかし近所にあった新羅(慶尚道)は差別をされなかった。財閥も大統領もここの出身者が多い。
これは新羅があっさりと王建に降伏、王位を王建に譲った。
新羅はかつての統一王朝で、文明文化が非常に栄えていたので、王建たちも(新羅)には一目を置いていた。しかし後百済にはずっと敵対していた。それで差別的な感情が足かせとなって、ずっと続いてきた。
そして1980年の「光州事件」、なぜこのような反乱が光州で起きたのか、と言う事も、こういう反体制的な遺伝と言うのか、文化的習慣と言うものがずっと続いており、韓国政府に対してこういう事件を起こしたとも言える。
百済の話になると、天皇陛下が2002年W杯前におっしゃったお言葉の中に、「桓武天皇の生母が百済の武寧王の子孫であると,続日本紀に記されていることに,韓国とのゆかりを感じています。武寧王は日本との関係が深く,この時以来,日本に五経博士が代々招へい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また,武寧王の子,聖明王は,日本に仏教を伝えたことで知られております。」と言う言葉を、
韓国マスコミは「日王が百済王室の末であると認めた」と曲解したが、父である光仁天皇の側室が百済王家の子孫だっただけなのに、誇張して伝えられています。
百済を嫌いながらも、百済の子孫は日本だ、と揶揄される記事をよく見ます。
朝鮮半島の歴史では様々な国名が出てきます。
韓国人の視点で見れば、どの時代が一番栄華を築いたと思います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