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요코타 부부의 싸움
요코타 사키강(개 싶음 사라져1936년 2월4일 - )은,북한에 의한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요코타자의 아내.복음파의 교회에 소속하는크리스챤.
●1980년(쇼와 55년) 1 세월본해 연안을 중심으로 일어난,치무라 야스시, 하마모토 후키 메구미,이치카와 슈이치, 마스모토루미꼬등의 증발 사건에는, 외국의 정보 기관이 관여하고 있는 혐의가 강하다고 쓴 신문 기사를 요코타 부부가 읽어, 산케이신문 니가타 지국의 지국장에 면회해,딸(아가씨)의 실종 사건과의 관련성을 물었다가, 관계성은 부정되었다.
●1984년(쇼와59년)에일본 동맹 기독교단 이가라시 크리스트교회에서TEAM의 마크다니엘 선교사보다세례를 받고딸(아가씨)를 위해서 계속 빈다.
●1988년 8월, 납치 피해자의 아리모토 케이코씨의 부모님은 일본 사회당 위원장 도이 타카코의 사무소(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상담.당초 도이는 아리모토 부부에게 동정하는 자세를 보여 따뜻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아리모토 부부는 안심했지만, 그 후 도이 사무소에서는 대답은 없어져, 모두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이 때문에 아리모토 부부는 상경해 자유민주당의 정치가에게 도움을 요구할 것을 결정해 1988년 9월,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다쵸의 중의원 의원 회관에 자유민주당 간사장의 아베 신타로우를 방문한다.아베는 부부의 호소를 들어 보내 당시 비서였던 차남아베 신조에 부부를 외무성과 경찰청에 안내하도록(듯이) 명해 부부는 여기에 이르러 일의 나름을 외무성·경찰청에게 전할 수 있었다.
●이후 아리모토 부부는 아베 부자에게 연락하게 되어,아베 부자는 이 문제에 임하게 된다.
●1991년 이래, 일본 정부는 북한에 대해 납치사건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북한측은 계속 부정했다. 그 때문에 납치사건은 아니고 납치 의혹계속 으로 불려납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본 정부나우익에 의한음모인과신문지면이나TV보도로 종종 주장계속 되었다.
●1997년(헤세이9년) 2월호로 「시대」 「산케이신문」등에서.이 기사를고세인이 안명진에 확인하고,요코타 메구미가 납치에 있었던 것이 판명된다.
●1997년 1월 21 긴 낮녀 은혜가 북한에 납치되고 있다고 하는 정보가 전해져, 요코타자가 의원 회관에서 자세한 정보를 (들)물었다.그 당시, 사키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치바에 있어서의 크리스트교의 집회에서, 「적어도 딸(아가씨)가 어디에 있는지만으로도 가르쳐 주세요」라고, 동료와 함께 빌고 있었다.귀가 후, 자로부터 오늘 들어간 정보에 대해 들어 놀라는 것과 동시에, 「살아 있었군요, 메구미」(이)라고,실종으로부터 19년째로 하고 처음으로 희망을 찾아낸다.
●사민당 기관지 「월간 사회 민주」1997년 7월호에서는, 「 20년전에 소녀가 행
분 불명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북한에 의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하나 근거가 없고, 원공작원의 모순 투성이의 또 (들)물어 증언이나 그 외가 의미를 부여해가 되어 태생
의 것이 실태이며, 일본 정부가 식량 지원을 시키지 않기 위해(때문에) 최근이 되어 창작된 사건이다」라고 하는 사회과학 연구소 「월간 일한 분석」편집원키타가와 히로카즈에 의한 기재가 이루어져 이후, 북한과 오랜 세월 우호적인 신문 각사나뉴스 스테이션,치쿠시 테츠야 NEWS23등으로「납치사건은 일본 정부에 의한 음모」로 한 코멘트나 문장이 자주 유포되었다.
2001년,일본인 납치사건이 표면화된 이후도 동논문은 동당의 공식 홈 페이지에 게재계속 되었다.
●1997년 3월 14일, 서울에 가 원북한 공작원안명진에 회견해 딸(아가씨)의 소식을 (듣)묻는다.이 때, 요코타 부부가 지참한 많은 사진 가운데, 납치의 약 1개월전에니가타 공항에서 자가 찍은 은혜의 사진을 보고, 안명진은 이 사진이 자신이 북한에서 본 여성과 제일 잘 비슷하다고 증언했다
●2000년(헤세이12년) 5월생명의 말사의채플이 제공되어 도쿄에서 매월 행해지는 「요코타 사키강씨를 둘러싸는 기원회」가 개시되는[4].수십명에서는 글자 기다린기도회이지만, 채플은 만원이 되었다.
●2002년(헤세이14년)9월 17일일·북 정상회담이평양에서 행해졌다.그 때,우메모토 카즈요시 주영 공사가 은혜의 딸(아가씨)로 되어 있는 김·헤골에 면회했다.
북한 정부가 납치의 사실을 인정해사죄하고, 납치 피해자의 안부의 정보를 일본 정부에게 전했다.
●2003년 6월 「몇년전,요코타 메구미씨의 부모님이 납치 해결의 가두 서명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조선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날달걀이 부딪혀이야기는 아침해는 결코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
●그 때 요코타 부부는 외무성의이이구라 공관에 모아져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당시 )과우에타케 시게오 외무 부대신(당시 )보다, 장녀 은혜가 사망해 있다고 하는 북한의 정보가 선고된다.결혼하고, 딸(아가씨)김·헤골을 낳았다고도 전해진다.여기로부터 매스컴의 차가운 반응이 바뀌었다고 한다.
●2004년(헤세이16년)5월 22일, 재방 입궐한코이즈미 쥰이치로 수상에 북한은 「사망으로 한 납치 피해자들에 대해 재조사한다」라고 약속.그 결과, 11월에 평양에서 행해진 일·북 실무자 협의에서, 은혜의 남편이었다고 하는 남성이“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제출했지만, 그것은 약 1개월 후, 일본측의 DNA 감정에 의해 가짜라고 판명되었다. |
●그 후도 지금 현재까지, 요코타 메구미의 사망설을 부정하고, 남편과 함께 딸(아가씨)를 포함한납치 피해자의 탈환 유익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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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録:横田夫妻の戦い
横田 早紀江(よこた さきえ、1936年2月4日 - )は、北朝鮮による拉致被害者
横田めぐみの母、横田滋の妻。福音派の教会に所属するクリスチャン。
●その日の午後9時50分に、横田夫妻は新潟県警に捜索願を出す。捜索願を受けた新潟県警が捜索を開始する。
●11月22日には、公開捜査に踏み切り、『新潟日報』や『毎日新聞』で報道される。一年間で延べ3000人の捜査員を動員して捜査をするが、行方の手がかりがつかめなかった。
●何の手がかりもないなかで、早紀江は、新聞の群衆写真や雑誌のグラビアなどに娘めぐみと似た女性が写っていると、新聞社に問い合わせしたり、写真の女性がいる場所を訪ねたりさえするほど、各地を必死に探しまわった。
●1980年(昭和55年)1月 日本海沿岸を中心に起きた、地村保志、浜本富貴恵、市川修一、増元るみ子らの蒸発事件には、外国の情報機関が関与している疑いが強いと書いた新聞記事を横田夫妻が読み、産経新聞新潟支局の支局長に面会し、娘の失踪事件との関連性を尋ねたが、関係性は否定された。
●1984年(昭和59年)に日本同盟基督教団五十嵐キリスト教会でTEAMのマクダニエル宣教師より洗礼を受け、娘のために祈り続ける。
●1988年8月、拉致被害者の有本恵子さんの両親は日本社会党委員長土井たか子の事務所(兵庫県西宮市)に相談。当初土井は有本夫妻に同情する姿勢を見せて暖かく対応したため有本夫妻は安心したが、その後土井事務所からは返事はなくなり、一切連絡が途絶えてしまった。
このため有本夫妻は上京して自由民主党の政治家に助けを求めることを決め、1988年9月、東京都千代田区永田町の衆議院議員会館に自由民主党幹事長の安倍晋太郎を訪ねる。安倍は夫妻の訴えを聞き届け、当時秘書だった次男の安倍晋三に夫妻を外務省と警察庁に案内するよう命じ、夫妻はここに至って事の次第を外務省・警察庁に伝えることができた。
●以後有本夫妻は安倍父子に連絡するようになり、安倍父子はこの問題に取り組むことになる。
●1991年以来、日本政府は北朝鮮に対し拉致事件を提起していたが、北朝鮮側は否定し続けた。 そのため拉致事件ではなく拉致疑惑と呼ばれ続け、拉致を否定する立場を取る人々により日本政府や右翼による陰謀であると新聞紙面やTV報道で度々主張され続けた。
●1997年(平成9年)2月号で「アエラ」「産経新聞」などでとりげられた。この記事を高世仁が安明進に確認して、横田めぐみが拉致にあったことが判明する。
●1997年1月21日長女めぐみが北朝鮮に拉致されているという情報が伝わり、横田滋が議員会館で詳しい情報を聞いた。そのころ、早紀江は何も知らないまま、千葉におけるキリスト教の集会で、「せめて娘がどこにいるのかだけでも教えてください」と、仲間とともに祈っていた。帰宅後、滋から今日入った情報について聞かされ驚くとともに、「生きていたのね、めぐみちゃん」と、失踪から19年めにして初めて希望を見出す。
●社民党機関誌『月刊社会民主』1997年7月号では、「20年前に少女が行
方不明になったことは事実だが、それが北朝鮮によるものというのは何一つ根拠がなく、元工作員の矛盾だらけの又聞き証言やその他の意味付けがされて生まれ
たのが実態であり、日本政府が食糧支援をさせないために最近になって創作された事件である」という社会科学研究所「月刊日韓分析」編集員北川広和による記載がなされ、以後、北朝鮮と長年友好的な新聞各社やニュースステーション、筑紫哲也 NEWS23等で「拉致事件は日本政府による陰謀」としたコメントや文章がしばしば流布された。
2001年、日本人拉致事件が明るみに出て以降も同論文は同党の公式ホームページに掲載され続けた。
●1997年3月14日、ソウルに行き元北朝鮮工作員安明進に会見して娘の消息を聞く。このとき、横田夫妻が持参した多くの写真のうち、拉致の約1ヵ月前に新潟空港で滋が撮っためぐみの写真を見て、安明進はこの写真が自分が北朝鮮で見た女性と一番よく似ていると証言した
●2000年(平成12年)5月いのちのことば社のチャペルが提供され、東京で毎月行われる「横田早紀江さんを囲む祈り会」が開始される[4]。十数名からはじまった祈祷会であるが、チャペルは満員になった。
●2002年(平成14年)9月17日日朝首脳会談が平壌で行われた。その時、梅本和義駐英公使がめぐみの娘とされているキム・ヘギョンに面会した。
北朝鮮政府が拉致の事実を認めて謝罪して、拉致被害者の安否の情報を日本政府に伝えた。
●2003年6月「数年前、横田めぐみさんのご両親が拉致解決の街頭署名活動をしていたとき、朝鮮学校の生徒から生卵をぶつけられた話は朝日は決して取り上げようとしない 」
●その時横田夫妻は外務省の飯倉公館に集められ、福田康夫官房長官(当時)と植竹繁雄外務副大臣(当時)より、長女めぐみが死亡しているという北朝鮮の情報を宣告される。結婚して、娘キム・ヘギョンを生んだとも伝えられる。ここからマスコミの冷たい反応が変わったといわれる。
●2004年(平成16年)5月22日、再訪朝した小泉純一郎首相に北朝鮮は「死亡とした拉致被害者たちについて再調査する」と約束。その結果、11月に平壌で行なわれた日朝実務者協議で、めぐみの夫だったという男性が“横田めぐみの遺骨”を提出したが、それは約1カ月後、日本側のDNA鑑定により偽物だと判明した。 |
●その後も今現在まで、横田めぐみの死亡説を否定して、夫と共に娘を含めた拉致被害者の奪還ための活動を続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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