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도스토옙스키로 불리는 샬라모프의 대표작. 삶을 재현하는 거대한 모자이크, 한 줌의 다이아몬드 같은 이야기들
국내 초역으로 선보이는 『콜리마 이야기』는 을유세계문학전집 76번째 작품으로 일찍이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도스토옙스키다”라는 찬사를 받은 바를람 샬라모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17년 동안 콜리마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고 석방된 뒤에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1954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비교적 짧은 단편들로 이뤄져 있으며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주제가 신랄하고, 밝고 생생한 언어로 쓰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처럼 수용소를 배경으로 다룬 수용소 문학이면서도 내용과 형식면에서 이들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콜리마라는 수용소가 만든 지옥을 기록한 단순한 회상이나 회고록을 넘어서서 새로운 산문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바를람 샬라모프는 서두르지 않고 안정감과 폭발적인 내용의 콘트라스트를 통해 교도소와 통과수용소의 세계를 생생히 묘사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나 역사서 같은 느낌마저 준다. 샬라모프는 독자에게 스토리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거기서 어떤 문제를 도출해 내려는 톨스토이나 솔제니친과 달리 샬라모프는 단순히 이야기만 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안톤 체호프와 이삭 바벨과 비견될 수 있다.
샬라모프가 바라보는 수용소는 전체주의적인 스탈린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일찍이 “수용소는 지옥과 천국의 대립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재현이다. 수용소는 세계와 유사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콜리마 이야기』를 읽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항구적인 수용소의 이미지는 악 자체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나는 이유는 수인의 비인간적인 고통 때문이라기보다 수용소 자체가 죽은 자의 왕국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거의 언제나 죽음을 만나게 된다.
하나 놀라운 점은 작가가 그러한 서술을 다분히 담담하게 진행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어디에서도 격정적인 폭발에 이르지 않는다. 운명이나 정권에 대해 저주를 퍼붓거나 다분히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설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율을 느끼게 되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이를 통해 『콜리마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들이 작가의 허구적 산물이 아니라 예술의 형상으로 포장된 준엄한 진실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먼저 뺨을 한 대 때린 다음 자비를 베풀어라. 작품 속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완벽함이 깃든 수용소 문학의 걸작
기나긴 수용소 생활을 거친 샬라모프는 자신을 “19세기, 20세기의 모든 러시아 휴머니스트와는 다르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수용소에서 배운 시대의 원칙, 개인의 생존 원칙은 먼저 뺨을 한 대 때려 주고 나서 다음에 자비를 베풀어야 하다는 것, 즉 선에 앞서 악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타락을 경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준다. 실제로 샬라모프는 스탈린의 독재를 극명하게 반영하는 강제 노동 수용소의 삶을 생생히 묘사함으로써 폭력적인 시대를 규탄했다. 1962년에 그가 솔제니친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이러한 생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요컨대 기억하십시오. 수용소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학교입니다.
사람은 그가 관리든 수인이든 수용소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았다 하면 아무리 무섭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 나는 남은 모든 삶을 바로 이 진실에 바치겠다고 오래전에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비극적 현실을 아주 냉정하면서도 태연하게 이야기해 나간다. 카드놀이를 하던 중에 다른 수인의 옷을 노름 담보로 삼기 위해 태연히 저지르는 살인, 죽은 동료의 속옷을 훔치려고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는 장면, 꾀병 환자를 적발하기 위한 병원 당국의 야만적인 방법 동원 등등이 펼쳐진다.
이 정도는 아닐지언정 오늘날에도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수용소들은 많이 있다. 또한 공공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수용소 생활이라 할 수 있는 억압적 상황에 놓여 있는 국가와 사회도 의외로 많다. 현재에도 계속 새로운 콜리마가 설계되고 만들어지고 있다. 저자가 전하는 『콜리마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억압적 사회를 경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스탈린 체제하에서 콜리마는 가장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가 되었다. 1백만 혹은 그 이상 되는 사람들이 1932년~1954년 사이에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또는 콜리마의 금광, 도로 건설, 벌목, 수용소 건설 중에 희생되었다. 금광에서 완전히 탈진하여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 ‘도호댜가(기진맥진하여 죽어가는 사람)’가 된 뒤에야 도로 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작업 중에 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마가단-야쿠츠크를 연결하는 콜리마 하이웨이 건설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이 길은 일명 ‘해골 길’이라 불린다. (...) 1990년 4월6일 소비에트 장군이며 역사가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는 펜타곤에서 행한 강연회에서 행한 강연회에서 투옥되었다가 살해된 자의 수를 2,250만 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비 소비에트 역사가들은 추정은 이보다 훨씬 많다. 샬라모프는 이곳 콜리마 수용소에서 1937년부터 17년간 강제 노동을 끝내고 나서 1956년에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자신의 체험 문학 작품으로 생생히 묘사했다.
*이 책에서는 카드놀이를 하던 중에 저지르는 살인, 죽은 동료의 속옷을 훔치기 위해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는 장면, 정신이상, 종교적 광신, 죽음 , 살인, 자살, 깡패들의 무한한 횡포, 꾀병 환자를 적발하기 위한 야만적인 방법, 호송대의 囚人 사살, 인육을 먹는 장면들이 번번이 등장한다. 수용소에서는 (...) 모든 인간을 짐승으로 변하게 하는 허기증, 공포와 굴욕, 완만한 죽음, 무한한 횡포와 무법을 보여준다. *두가예프는 수인(囚人)의 세 계율, 북국(北國)을 속담을 잘 기억했다. ‘믿지 마라. 두려워 마라. 구걸하지 마라.......’ *배고프고 적의에 찬 나는 세상에 그 무엇도 내 목숨을 스스로 끊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바로 그 때, 나는 생의 위대한 본능 – 인간이 최고로 부여받은 바로 그 자질의 본질을 알았다. (...) 인간은 육체적으로 모든 동물보다 강했고 인내력이 강했기 때문이며, 훗날 자기의 정신적 요소를 육체적 요소에 훌륭히 이바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결 따라 흘러갔다. 수용소 말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 갔다.’ 우리는 이미 아무 걱정도 없었고 남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게 쉬웠다. 삶을 유지하려는 일조차 걱정하지 않았고 잠을 자더라도 역시 수용소와 같은 지시, 일정에 따라 잠을 잤다. (...) 마음의 평정은 언제나 남의 의지에 종속됨으로써 지켜졌다. 우리는 숙명론자가 된 지 오래였다. 하루 앞도 삶을 내다보지 못했다. *저녁나절에 그는(=詩人)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이틀 뒤에야 명단에서 지워졌다. 기지가 풍부한 이웃들은 이틀 동안 죽은 사람의 빵을 받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은 꼭두각시처럼 손을 들었다. 따라서 그는 사망 기록일 전에 죽었다.
*“내가 먹을 때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다.”는 민중의 속담은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그리고 장님이 된다.”는 말을 덧붙일 수 있겠다. 맛있게 먹을 때 시각 기능이 미각을 돕는 데 집중되기 때문이다. *자위본능, 삶에 대한 집착, 의식마저 종속되는 바로 그 육체적 집착으로 인간은 구원받는다. 인간은 돌, 나무, 새, 개가 살 듯 그렇게 산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보다 강하게 생명에 집착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인내력이 강하다. *그때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했는데, 노동 기준량을 열여섯 시간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상 신호, 아침 식사, 작업 출동, 도보로 작업장으로 가는 데 최소한 한 시간 반, 점심 식사 한 시간, 잠자러 가기 위해 집합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저녁 식사 한 시간 반을 계산에 넣는다면 야외에서 육체적인 중노동을 한 뒤에 잠잘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네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은 동작을 멈추는 바로 그 시간에도 잠이 들고 걷거나 서 있는 동안에도 용하게 잠을 잤다. 수면부족은 굶주림보다 체력을 더 앗아 갔다. 노동 기준량을 채우지 못하면 징벌 배급량으로 하루에 빵 300g과 잡탕 죽을 못 받을 위험이 있었다. (...) 마치 거대한 스테아린 양초가 막사 한구석에서 녹아 흐르듯, 틈새마다 안에서 두꺼운 얼음이 낀 난방 안 된 습기 찬 막사를 떠올린다면....... 부실한 옷과 빈약한 배급 식량, 동상, 특히 동상은 절단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정말 영원한 고토이다 심장병 환자에게 파멸적인 늪지 많은 이 산속에 얼마나 많은 인플루엔자, 폐렴, 온갖 감기와 결핵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발생했는지를 그린다면, 또 고의 손상자, 자해자의 유행을 떠올린다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나 절망까지 고려한다면, 깨끗한 공기가 감옥보다 인간의 건강에 얼마나 더 위험한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수용소의 급식량은 사람의 체중에 따라 계산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메르즐랴코프를 놀라게 하고 걱정스럽게 만든 잘못된 결정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쇠약해지기 전에 기적적으로 마구간지기 자리를 얻어 거기서 말의 사료인 귀리를 훔쳐 자기 위(胃)를 채울 수 있었다. (...) 마구간지기들은 귀리를 튀기거나 삶아 자연 상태로 먹기 시작하며 자기 위를 말의 위와 똑같이 만들었다. *수용소 관리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교육 담당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의사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깡패 세계의 폭력에 비하면 이런 일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니다. 수용소 당국은 그래도 인간이다. 그렇다. 그렇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그러나 깡패는 인간이 아니다.
깡패의 도덕이 수용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한하고 전면적이다. 수용소는 완전히 나쁜 인생 학교다. 수용소 생활의 1분 1초가 독이 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거기는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보아서는 안 될 일이 너무 많다. 만약 보았다면 죽는 편이 낫다. 수인(囚人)은 거기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수인은 거기서 아첨과 거짓말, 크고 작은 비열한 행위를 배우면서 이기주의자가 된다. *수인들의 내부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은 자유이다. 순간적이지만 그들은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느끼고, 그러고 나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출처] 콜리마 이야기|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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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のドストイェブスキと呼ばれるシャルラモプの代表作. 生を再現する巨大なモザイク, 一握りのダイヤモンドみたいな話
国内抄訳でお目見えする 『コルリマ話』は乙酉世界文学全集 76番目作品でかつて多い評論家たちから “20世紀のドストイェブスキだ”という賛辞を受けたバルルラムシャルラモプの代表作中の一つだ. 作家はこの作品を 17年の間コルリマ強制労動収容所で重労動をして釈放された後にモスクワに帰って来て 1954年から使い始めた.
比較的実力のない断片たちで成り立っているしおもしろいのに同時に主題歌しんらつで, 明るくて鮮やかな言語で使われたということが特徴だ. 『コルリマ話』はドストイェブスキの 『死の家の記録』やソルジェニチンの 『離反デニ所備え付けの一日』, 『収容所群島』のように収容所を背景で扱った収容所文学ながらも内容と形式面でこれら作品とは違う独特の特性を持っている.
作家はこの作品を通じてコルリマという収容所が作った地獄を記録した単純な回想や回顧録を越して新しい散文の可能性を見せてくれる.
バルルラムシャルラモプは急がないで安定感と爆発的な内容のコントラストを通じて刑務所と通過収容所の世界をありありと描く. これを通じてこの作品はドキュメンタリーや歴史書みたいな感じさえ与える. シャルラモプは読者にストーリーをどんなに解釈すれば良いか言わない. ただ客観的に話すだけだ. ストーリーを話してそこでどんな問題を導出し出そうとするトルストイやソルジェニチンと違いシャルラモプは単純に話ばかりするだけだ. そんな意味で彼の話はアントンチェーホフと穂バーベルと比肩されることが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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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ャルラモプの眺める収容所は全体主義的なスターリン社会の縮小版と言える. したがって作家はかつて “収容所は地獄と天国の対立ではなく私たち生の再現だ. 収容所は世界と似たり寄ったりだ”と言った事がある. 『コルリマ話』を読む時頭の中に浮び上がる恒久的な収容所のイメージは悪自体だ. このようなイメージのできる理由は受忍の非人間的な苦痛のためというより収容所自体が死亡者の王国のように描写されるからだ. 読者たちはこの作品でほとんどいつも死に会う.
一つ驚くべきな点は作家がそういう敍述を多分にたんたんと進行するというのだ. 作家はどこでも激情的な爆発に至らない. 運命や政権に対して呪いを浴びせるとか多分に哲学的や形而上学的な解説を付け加えない. 作家はこのすべてのものを話を読みながら戦慄を感じるようになる独自の分け前で残しておく. これを通じて 『コルリマ話』に盛られた話が作家の虚構的産物ではなく芸術の形象に包装された峻厳な真実という点を悟らせる.
先に頬を一台殴った後慈悲を施しなさい. 作品の中石ころ一つ一つにも完璧さが込められた収容所文学の傑作
長長しい収容所生活を経ったシャルラモプは自分を “19世紀, 20世紀のすべてのロシアヒューマニストとは違う”と言い切る. 彼が収容所で学んだ時代の原則, 個人の生存原則は先に頬を一台殴ってくれて出て次に慈悲を施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 すなわち線に先立って悪を憶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だ.
作家はこれを通じて人間の意識の中で起きる堕落を警戒しながらこれから進まなければならない方向を教えてあげる. 実際にシャルラモプはスターリンの独裁を明らかにするように反映する強制労動収容所の生をありありと描くことで暴力的な時代を糾弾した. 1962年に彼がソルジェニチンに送った手紙は彼のこのような考えを如実に見せてくれる. “要するに憶えてください. 収容所と言う(のは)初日から最後の日まで誰にも否定的な学校です.
人は彼が管理でも受忍でも収容所を見る必要がないです. しかしaようだったと言えばいくら恐ろしいとしても真実を言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 私は残ったすべての生をまさにこの真実に捧げるとずいぶん前に決心しました.” このために著者は悲劇的現実をとても冷情ながらも平気に話して行く. カード遊びをした中に他の受忍の服を賭博担保にするためにぬけぬけやらかす殺人, 死んだ仲間の下着を盗もうと墓で死骸を取り出す場面, 仮病患者を摘発するための病院政府の野蛮的な方法動員等々が開かれる.
が位ではなくとも今日にも惨めな状況に処している収容所たちはたくさんある. また大っぴらに見えるのではない見えない収容所生活と言える抑圧的状況に置かれている国家と社会も意外に多い. 現在にもずっと新しいコリー馬加設計されて作られている. 著者が伝える 『コルリマ話』は正しくこのような抑圧的社会を警戒するメッセージでもある. [インターネットKyobo文庫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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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ターリン体制の下でコルリマは一番悪名高い強制収容所になった. 1百万あるいはその以上になる人々が 1932年‾1954年の間にその所に行く途中に, またはコリー麻衣金鉱, 道路建設, 伐木, 収容所建設の中に犠牲された. 金鉱で完全に気力がつきてどんな益体もない人間である ‘ドホディヤが(精根がつきて死んで行く人)’になった後こそもとの通りに作業に動員されたから作業の中に多い犠牲者が続出した.
馬加団-ヤクツクを連結するコルリマハイウェー建設に動員された人々がいくらたくさん犠牲されたのかこの道は一名 ‘骸骨道’と呼ばれる. (...) 1990年 4月6日ソビエト将軍や史家であるドミツリーボルコゴノ−プはペンタゴンで行った講演会で行った講演会で投獄されてから殺害された者の数を 2,250万人位に推正したが雨ソビエト史家たちは推定はこれよりもっと多い. シャルラモプはこちらコルリマ収容所で 1937年から 17年間強制労動を終わらせてから 1956年にモスクワに帰還して自分の体験文学作品でありありと描いた.
*この本ではカード遊びをした中にやらかす殺人, 死んだ仲間の下着を盗むために墓で死骸を取り出す場面, 精神異常, 宗教的狂信, 死 , 殺人, 自殺, やくざたちの無限な横暴, 仮病患者を摘発するための野蛮的な方法, 護送台の 囚人 射殺, 人肉を食べる場面たちがいつも登場する. 収容所では (...) すべての人間をけだものに変わるようにする虚飢症, 恐怖と屈辱, 緩い死, 無限な横暴と無法を見せてくれる. *ドがイェプは受忍(囚人)の三つの戒律, 北国(北国)を諺をよく憶えた. ‘信じないで. 恐ろしくてないで. 物乞いするな.......’ *お腹がすいていて敵意におかず私は世の中にその何も私の命を自ら切るように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分かった. ちょうどその時, 私は生の偉い本能 - 人間が最高に受けたまさにその資質の本質が分かった. (...) 人間は肉体的にすべての動物より強かったし忍耐力が強かったからであり, 後日自分の精神的要素を肉体的要素に立派に貢献するようにしたからだ. *私たちは波よって流れた. 収容所末路 ‘身が極度に衰弱して行った.’ 私たちはもうどんな心配もなかったし他人の意志によって暮すのが休んだ. 生を維持しようとする仕事さえ心配しなかったし眠ってもやっぱり収容所のような指示, 日程によって眠った. (...) 心の平定はいつも他人の意志に属することで守られた. 私たちは宿命論者になってから長かった. 一日の前も生を眺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日暮れ時に彼は(=詩人) 死んだ. しかし彼は二日後こそ名簿で消された. 基地の豊かな隣りたちは二日間死んだ人のパンを受けることができた. 死んだ人は絡繰り人形のように手をあげた. したがって彼は死亡記録である前に死んだ.
*“私の食べる時はつんぼになって唖になる.”は民衆の諺は誰もすべて分かる言葉だ. “そして盲人になる.”と言う言葉を付け加えることができる. おいしく食べる時時刻機能が味覚を助けることに集中されるからだ. *自慰本能, 生に対する執着, 意識さえ属するまさにその肉体的執着で人間は救援受ける. 人間は石, 木, 鳥, 犬が肉ようにそのように住む. しかし人間は彼らより強く生命にとらわれすぎる. それで人間はどんな動物より忍耐力が強い. *あの時は一日に十六時間ずつ働いたが, 労動基準量を十六時間で計算したからだ. もし気象信号, 朝食, 作業出動, 徒歩で作業場に行くのに最小限一時間半分, お昼食事した時間, 眠りに行くために集合する時間まで含んで夕方食事した時間半分を計算に入れたら野外で肉体的な重労動をした後に眠ることができる時間はやっと君の時間しかあらなかった.
人は動作を止めるまさにその時間にも眠りに入って集めるとか立っているうちにもうまく眠った. 寝不足は飢えより体力をもっと奪いとられた. 労動基準量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ければ懲罰配給量で一日にパン 300gとごった煮おかゆが受けない危険があった. (...) まるで巨大なステアリンキャンドルが幕舍片わきでとけて流れるように, 隙間ごとに中で厚い氷が立ち込めた暖房だめな湿り気おかず幕舍を思い浮かんだら....... 不実な服と貧弱な配給食糧, 銅賞, 特に銅賞は切断に頼らないとしても本当に永遠なGotoだ心臓病患者に破滅的な沼地多いこの山奥にどれだけ多いインフルエンザ, 肺炎, あらゆる風邪と結核が発生するしかなかったし発生したのかを描いたら, また故意損傷者, 自害者の流行を思い浮かんだら, おびただしい精神的圧迫や絶望まで考慮したら, きれいな空気が監獄より人間の健康にいくらもっと危ないのか分かることはたやすい事だ. *しかし収容所の給食量は人の体重によって計算されない. すぐこれがメルズルリャコプを驚かして憂わしくした誤った決定の問題だった.
しかし彼は完全に衰える前に奇跡的に馬屋知己席を得てそこで言葉の飼料である燕麦を盗んで自分のの上(胃)を満たすことができた. (...) 馬屋知己たちは燕麦を揚げるとか煮って自然状態で食べ始めながら自分のの上を言葉の上とまったく同じく作った. *収容所管理は荒っぽくて残忍であり, 教育担当者は嘘つきで, 意思は良心がない. しかし人の精神を堕落させるやくざ世界の暴力に比べればこんな事は皆何でもない. 収容所政府はそれでも人間だ. そうだ. そうだ. それに彼らには人間的な面が見える. しかしやくざは人間ではない.
やくざの道徳が収容所生活に及ぶ影響は無限で全面的だ. 収容所は完全に悪い人生学校だ. 収容所生活の 1分 1秒が毒にならない時間がない. そこは人間が分かってはいけない, 見てはいけない事があまりにも多い. もし見たら死んだ方が良い. 受忍(囚人)はそこで労動に対する嫌悪を学ぶ. 他の何も学ぶことができない. 受忍はそこでお世辞と嘘, 多様な卑劣な行為を俳優ながらエゴイストになる. *受忍たちの内部で一番強烈な欲望は自由だ. 瞬間的だが彼らは自由を享受して, 自由を感じて, そうしてたまらないことも恐ろしがらない.
[出処] コルリマ話|作成者明沙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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