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베라·버드 「조선 기행」
(서울의) 주위의 산들은 소나무가 점재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초록이 없고, 검은 불모지의 파도가 되어 우뚝 솟아 있다.
1910년의 「조선 임야 분포도」
19 세기 후반의 조선의 풍경
조선 총독부는 1911년부터의 30년간에
5억 9 천만책의식림을 실시했다.
한일합방 시대의 사방 조림의 경과 기록
북한의 나무가 없는 산
북한의 농촌 풍경은, 위구르 지방같습니다.토막과 같이 되어 버려 있습니다.
산의 정상까지 나무를 베어 쓰러뜨려, 거기에 직접 작물을 심은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점점 밭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을 하면 흙이 흐르고 바위가 드러나 아무것도 자라지 않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나무가 없는 산(대머리산)이 끝없이 계속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암담으로 한 기분이 됩니다.
또, 밭에는 관개 용수로등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아래는한국의 넷 게시판으로부터 「일제 시대와 조선시대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스렛드의 번역
1. 한국인(투고자)
1902년, 조선을 방문한 일본의 산림국 기자 미야타세트코는, 이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부산으로부터 경성까지 오는 그 사이, 산이라고 하는 산에 나무가 1개도 없었다.금강산에 갔지만, 어쩐지 쓸쓸하게 앙상하게 마른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조선 총독부가 들어가, 총독부 산하에 산림과를 두어 산림을 관리했다.
이 때부터 무단 벌채를 법률로 엄금했다.대신에, 일본으로부터 연탄을 도입해, 그것을 난방의 연료로 했다.
연탄은 19 세기의 일본에서 발명된 것으로, 구멍이 열린 석탄의 덩어리를 숯 대신에 연료로서 사용했다.
1920년대까지는 연탄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그 때까지 조선·사람들의 주된 난방은 신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 독립했다고 착각 하고 벌채하러 간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다.
다행히도 1930년대에는 싼 편인 구공탄이 개발되어 일반인들도 연탄을 난방 연료로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 시대의 연탄 스토브
조선 총독부는, 조선·사람의 무분별한 벌채를 막아, 국가적으로 식목 이벤트를 실시했다.
기념일이나 행사 마다 식목 하는 것을 일본이 전파 했으므로, 현재의 식목일도 조선 총독부의 4월 3일의 식수일이 유래이다.
▲1911년 4월 3일에 행해진 제1회 기념 식수 햇빛경(경기도 주관, 인왕산)을 넣은 사진 엽서
▲반도의 녹색(1926)에 수록된 제16회 기념 식수 햇빛경(효창원묘지가 조림지로 변해있는 님 아이)
▲1950.10.1 소공동 일대
6.25전쟁 이후, 산림이 다시 황폐 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청을 신설해 산림을 관리했던 것도 모두 일본에서 배운 것이다.
イザベラ・バード「朝鮮紀行」
(ソウルの)周囲の山々は松の木が点在しているものの、大部分は緑がなく、黒い不毛地のうねりとなってそびえている。
1910年の『朝鮮林野分布図』
19世紀後半の朝鮮の風景
朝鮮総督府は1911年からの30年間で
5億9千万本の植林を行った。
日韓併合時代の砂防造林の経過記録
北朝鮮の木のない山
北朝鮮の農村風景は、ウイグル地方のようです。土漠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ています。
山の頂上まで木を切り倒し、そこに直接作物を植えた跡が残っています。
段々畑にするわけでもなくこんな事をすれば土が流れ、岩が露呈し何も育てられなくなるのは自明の理です。
木のない山(禿た山)が延々と続く姿を眺めながら暗澹とした気持ちになります。
また、畑には灌漑用水路なども見当たりません。
ここから下は韓国のネット掲示板から「日帝時代と朝鮮時代の差異点」というスレッドの翻訳
1. 韓国人(投稿者)
1902年、朝鮮を訪れた日本の山林局記者ミヤタセツコは、以下のように述べている。
「釜山から京城まで来るその間、山という山に木が1本もなかった。金剛山に行ったが、物寂しくやせこけた感じがした」
その後、朝鮮総督府が入り、総督府傘下に山林課を置いて山林を管理した。
この時から無断伐採を法律で厳禁した。代わりに、日本から練炭を導入し、それを暖房の燃料とした。
練炭は19世紀の日本で発明されたもので、穴の開いた石炭の塊を炭の代わりに燃料として使用した。
1920年代までは練炭の価格が高かったので、その時まで朝鮮・人たちの主な暖房は薪であった。
1919年3.1運動当時、独立したと勘違いして伐採に行った人たちがいたほどだ。
幸いにも1930年代には格安な九孔炭が開発され、一般人たちも練炭を暖房燃料として利用できるようになった。
▲日帝時代の練炭ストーブ
朝鮮総督府は、朝鮮・人の無分別な伐採を防ぎ、国家的に植木イベントを行った。
記念日や行事ごとに植木することを日本が伝播したので、現在の植木日も朝鮮総督府の4月3日の植樹日が由来である。
▲1911年4月3日に行われた第1回記念植樹日の光景(京畿道主管、仁王山)を入れた写真ハガキ
▲半島の翠緑(1926)に収録された第16回記念植樹日の光景(孝昌園墓地が造林地に変わっている様子)
▲1950.10.1小公洞一帯
6.25戦争以降、山林が再び荒廃した時、朴正煕大統領が山林庁を新設して山林を管理したのもすべて日本から学んだこと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