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으로 부터 평화 조약 위탁을 받은 미국이 작성한 제1차 초안은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1894년 1월 1일 이후 일본이 영토 야욕으로 빼앗은 영토는 원래 국가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1947년 3월 20일에 작성된 미국측 제1차 초안에는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넣었다
1949년 11월 2일 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 영토로 명시되었다
이 地圖는 1949년 11월 2일 미국 국무부가 국방부와 연합국 최고 사령부에 보낸 對日평화 조약 안에 첨부한 地圖이다
일본의 주코쿠 및 시코쿠 地方圖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地圖 편찬 기관 건설성 지리 조사소 1948년 7월 30일 발간
이 地圖는 일본 정부가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부 지령에 따라 그린 地圖라고 추측된다
1929년 제작된 시마네현 地圖
독도가 없다
일본측은 5차 초안까지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시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시 일본 정부 顧問이었던 sebald를 이용하여 맹렬하게 로비하기 시작했다
sebald는 1949년 11월 14일 미국 국무부에 리앙쿠르 巖에 대해 再考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낸다
이어 sebald는 서면으로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제출한다
리앙쿠르 巖을 제3조에서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명시할 것을 건의한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었다
안보적 측면에서 이 섬에 기상과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며 미국의 국가 이익에도 부합할 것이다
이와 같은 sebald의 로비로 미국은 1949년 12월 29일 對日강화 조약.6차 초안 제3조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그 주석으로 1905년에 한국으로 부터 항의를 받지 않고 일본에 의하여 정식으로 시마네현의 오키 支廳 관할하에
두었다 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sebald의 의견서에는 모순점이 많다
우선 당시 일본 내에서도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일본의 많은 地圖에는 독도가 없고
오히려 일본이 제작한 당시의 한국의 地圖에 독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한국의 항의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울릉도를 독립된 鬱島郡으로 개칭하여 독도까지 관할하게 한다는 내용을
관보에 게제하여 공표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6년 3월에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 사실을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한제국이 시마네현 독도 편입에 대해 항의하는 지령문을 남겼다
그러므로 sebald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서 일본 영토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이 6차 초안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폐기되었다
이런 이유로 7차에서 9차 초안까지 독도는 언급되지 않고 결국 누락되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는 영국 초안
1951년 3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직전에 작성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영국 정부가 독자적인 對日평화 조약의 초안으로 작성하였다
영국측 초안은 1951년 2월 28일 1차 확정되었고 같은 해 1951년 3월에 초안을 거쳐 3차 초안으로 완성되었다
영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정을 앞두고 3차에 걸친 독자적인 對日평화 협상안을 확정하고
1951년 4월7일에 영연방 8개국과
미국 정부에 통보하였다
일본은 미국의 6차 초안을 근거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고 주장하려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을 명백하게 표기될 수 있도록
地圖를 제작하거나
조약문으로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 관련 조항에서 독도를 삭제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데 1차 초안에서 5차 초안까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독도가 명시되어 있는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發效되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최종 조약문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연합국 결정에 따르는 것이다
연합국 합의 결정은 scapin 제 677호이다 이것은 법제화된 법령으로 국제법상 공인받은 것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發效이후에도 이 SCAPIN 제677호 3조의 독도를 한국 영토에 넣은 조항은 유지되었고
677/1호에서는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677호의 3조항은 유효한 것이다
즉 독도는 한국 영토다
連合国から平和条約委託を受けたアメリカが作成した第1次下書きは連合国の合意によって
1894年 1月 1日以後日本が領土野慾で奪った領土は元々国家に返還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規定した
1947年 3月 20日に作成された米国側第1次下書きには
日本は済州島巨文島鬱陵島独島を韓国の領土に入れた
1949年 11月 2日 5次下書きまで独島は韓国領土に明示された
が 地図は 1949年 11月 2日アメリカ国務省が国防省と連合国最高司令部に行かせた 対日平和条約中に添付した 地図だ
日本のズコク及び四国 地方図だ
日本政府の公式 地図 編纂機関建設省地理調査所 1948年 7月 30日発刊
が 地図は日本政府が 1946年連合国最高司令部指令によってグリーン 地図と推測される
1929年製作された島根県 地図
独島がない
日本側は 5次下書きまで独島が韓国領土に明示されたという情報を手に入れて
当時日本政府 顧問だった sebaldを利用して猛烈にロビーし始めた
sebaldは 1949年 11月 14日アメリカ国務省にリアングクル 巌に対して 再考を要請する電報を送る
であって sebaldは書面で次のような意見書を提出する
リアングクル 巌を第3条で日本に属することで明示することを建議する
が島に対する日本の主張は古かった
安保的側面でこの島に気象とレーダー這うのを設置するのが可能でアメリカの国家利益にも符合するでしょう
このような sebaldのロビーでアメリカは 1949年 12月 29日 対日講和條約.6次下書き第3条で
独島を日本領土で編入させる
そしてその柱石で 1905年に韓国から抗議を受けないで日本によって正式で島根県のOki 支庁 管轄下に
置いたと説明した
ところでこの sebaldの意見書には矛盾店が多い
まず当時日本内でも島根県の独島編入事実が知られなくて日本の多くの 地図には独島がなくて
むしろ日本が製作した当時の韓国の 地図に独島が描かれていた
韓国の抗議を受けなかったと言うのに
大韓帝国は 1900年 10月 25日鬱陵島を独立された 鬱島郡で改称して独島まで管轄するようにするという内容を
官報に掲載して露した
日本は大韓帝国の外交権を剥奪した後 1906年 3月に独島の島根県編入事実を知らせた
が事実が分かるようになった大韓帝国が島根県独島編入に対して抗議するジリョングムンを残した
だから sebaldの主張は成立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アメリカは 6次下書きで独島を韓国の領土から日本領土に移しておいた
しかしこの 6次下書きはイギリスオーストラリアニュージーランドなど太平洋戦争に参加した国々の同意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
結局廃棄された
こんな理由で 7次から 9次下書きまで独島は言及されないで結局抜け落ちされた
独島が韓国の領土というのを証明するイギリス下書き
1951年 3月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締結直前に作成された
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でイギリス政府が独自の 対日平和条約の下書きに作成した
英国側下書きは 1951年 2月 28日 1次確定されたし同じ年 1951年 3月に下書きを経って 3次下書きに完成された
イギリス政府は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協定を控えて 3次にわたった独自の 対日平和協議案を定めて
1951年 4月7日に英連邦 8ヶ国と
アメリカ政府に知らせた
日本はアメリカの 6次下書きを根拠で独島を日本領土で認められたと主張するのに
それでも主張しようとすれば
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締結当時日本は国内外的に独島が日本領土というのを明白に表記するように
地図を製作するとか
条約文で日本があきらめなければならない領土関連条項で独島を削除す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ところで 1次下書きで 5次下書きまで日本があきらめなければならない領土で
独島が明示されてイッヌンチェ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が 発效になった
だからサンフランシスコ最終条約文に独島が言及されなかったので
これは連合国決定によることだ
連合国合意決定は scapin 第 677号だこれは法制化された法令で国際法の上公認受けたことだ
1952年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 発效以後にもこの SCAPIN 第677号 3組の独島を韓国領土に入れた条項は維持されたし
677/1号では独島が言及されなかったので 677号の 3条項は有效なことだ
すなわち独島は韓国領土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