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군 일지 1904년 9월 25일
일본군함 新高號의 기록
리앙쿠르도 바위를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본방(일본)어부들은 랑코 라고 부른다
독도 서쪽에 맑은 물이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독도(石島)는 대한제국 영토라고 선언하고
관보에 실었다
그러면 石島는 독도일까?
竹島 石島의 거리는 東西가 60리이고
남북이 40리 합이 200리이다
참고로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거리는 200리
독도에서 일본 오키시마 까지 거리는 400리
독도 명칭에 관한 기록은 일본측 기록은 1904년 9월 25일 일본 해군 일지이며
한국측 기록은 1906년 3월이다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 관원 新西由大郞 東文輔 등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울릉도 군수 沈興澤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어 시찰하러 왔다 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놀란 沈興澤은
강원도 관찰사 署理 춘천 郡守였던 李明來에게 보고서를 올린다
1906년 4월 29일 울릉도 군수 沈興澤의 보고서 내용을 강원도 관찰사 署理 李明來가 올린 보고서 및
議政府 參政大臣 朴薺純의 지령 3호
보고서의 원문 해석
( .보고서 호외
鬱島 군수 沈興澤 보고서 內開에
本郡 소속 독도가 外洋 100여리 밖에 살더니 本月 初4일 辰時 가량에 (오전 7시~9시) 輪船 一隻이 郡內 道洞浦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일본 官人 일행이 官舍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領地가 되었으므로 시찰하러 섬에 왔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행은 즉 島根縣 隱技(嶋)島司 東文補 및 사무관 神西田(由)太郞
세무 감독 국장 吉田平吾 ,分署長 警部 影山巖八郞 , 巡査1인 會議員1인 의사 技手 각1인 그 밖에 數員 10여명이
먼저 호구 數를 묻고 인구 토지 생산 多少를 묻고 또 인원 및 경비가 얼마인지 물으며
제반 사무를 조사하여 갔습니다
이에 보고 하오니 照亮하심을 伏望 등 因으로 準此 보고 하오니
照亮하심을 伏望합니다 (명확하게 밝혀 주실 것을 엎드려 부탁합니다)
光武10년 四月二十九일
강원도 관찰사 署理 춘천 군수 李明來
議政府 參政 大臣閤下
議政府 參政 大臣 朴齊純 지령 3호
보내 온 보고서는 모두 읽어 알고 있습니다 독도 領地說은 全屬無根이니 그 섬의 형편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해 주세요 .)
울릉도 군수 沈興澤의 보고서 내용을 강원도 관찰사 署理 李明來가 1906년 4월 29일 당시 議政府 參政 大臣
朴齊純에게 보고서를 올린다
1906년 5월 20일 당시 議政府 參政大臣
朴齊純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며 섬의 형편과 일본인의 행동을 잘 살펴라 라고 지령을 내린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이해 당사국 대한제국에 알리지 않았고 일본의 중앙 관보에 싣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로 石島 즉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라고 선언한 바 있다
1904년 2월 23일 韓日議定書와 1904년 8월 22일 제1차 韓日協約 등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시마네현 독도 편입은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시마네현 독도 편입은 무효다
일본 해군 일지 (1904년 )
沈興澤 報告書에 대한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1일 기사
鬱島(울릉도)군수 沈興澤씨가
내부에 報告하기를 일본 관원 일행이 本郡에 와서 本郡 소재 독도는 일본에 속한 땅이라 지칭하고
지역의 넓이 호구와 농지 면적을 일일이 적어 갔다 라고 했다 내부에서 지령하기를 유람하는 길에
지역과 호구를 적어 간 사실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독도가 일본에 속한 땅이라고 칭하는 것은 결코 그럴 이치가 없으니
이번의 報告가 놀랍다 라고 했다고 한다
日本海軍であるか 1904年 9月 25日
日本軍する 新高号の記録
リアングクルも岩を韓人たちは独島と書いて本邦(日本)漁夫たちはラングコと呼ぶ
独島西の方に清い水があってと記録している
1900年 10月 25日大韓帝国勅令第41号で独島(石島)は大韓帝国領土と宣言して
官報に載せた
それでは 石島は独島だろう?
竹島 石島の距離(通り)は 東西が 60里で
南北が 40里合が 200里だ
参照で鬱陵島から独島まで距離(通り)は 200里
独島で日本Okiシマまで距離(通り)は 400里
独島名称に関する記録は日本側記録は 1904年 9月 25日日本海軍日誌で
韓国側記録は 1906年 3月だ
1906年 3月 28日
島根県官員 新西由大郎 東文輔 などが鬱陵島を訪問して鬱陵島軍需 沈興沢に
独島の仕事をした領土になって視察しに来たというものを言ったこの言葉を聞いて驚いた 沈興沢は
江原道観さつ使 署理 春川 郡守だった 李明来に報告書をあげる
1906年 4月 29日鬱陵島軍需 沈興沢の見て内容を江原道観さつ使 署理 李明来が申し上げた見て及び
議政府 参政大臣 朴薺純の指令 3号
報告書の原文解釈
( .見て号外
鬱島 軍需 沈興沢 見て 内開に
本郡 所属独島が 外洋 100余里の外に住んだら 本月 初4日 辰時 ほどに (午前 7時‾9時) 輪船 一隻が 郡内 道洞浦に来て
停泊したが日本 官人 仲間が 官舍で来て自ら言うのを
独島がもう日本 領地になったので視察しに島へ来たと言いました
また仲間はすなわち 島根県 隠技(嶋)島司 東文補 及び事務官 神西田(由)太郎
税務監督局長 吉田平吾 ,分署長 警部 影山巌八郎 , 巡査1人 会議員1人意思 技手 各1人その他に 数員 10人余りが
先に戸口 数を問って人口土地生産 多少を問ってまた人員及び警備(経費)がいくらなのか問って
諸般の事務を調査して行きました
ここに報告するから 照亮なさることを 伏望 など 因で 準此 報告するから
照亮なさることを 伏望します (明確に明らか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伏せてお願いします)
光武10年 四月二十九である
江原道観さつ使 署理 春川軍需 李明来
議政府 参政 大臣閤下
議政府 参政 大臣 朴斉純 指令 3号
送った見てからは皆読んで分かっています独島 領地説は全属無根だからその島の都合と日本人がどうに
行動するのかまた調査して報告してください .)
鬱陵島軍需 沈興沢の見て内容を江原道観さつ使 署理 李明来が 1906年 4月 29日当時 議政府 参政 大臣
朴斉純に報告書をあげる
1906年 5月 20日当時 議政府 参政大臣
朴斉純は独島が日本領土というのは全然根拠ないことで島の都合と日本人の行動をよく察しなさいと指令を下げる
日本は 1905年 2月 22日独島を島根県で編入させながら
理解当事国大韓帝国に知らせなかったし日本の中央官報に載せなかった
大韓帝国は 1900年勅令第41号で 石島 すなわち独島が大韓帝国領土と宣言した事がある
1904年 2月 23日 韓日議定書と 1904年 8月 22日第1次 韓日協約 などで
日本が大韓帝国の外交権を実質的に掌握した状態だった
日本の島根県独島編入は手続上問題があった
だから日本の島根県独島編入は無效だ
日本海軍日誌 (1904年 )
沈興沢 報告書に対する大韓毎日新報 1906年 5月 1日記事
鬱島(鬱陵島)軍需 沈興沢さんが
内部に 報告するのを日本官員仲間が 本郡に来て 本郡 素材独島は日本に属した地と指称して
地域の広さ戸口と農地面積をいちいち書いて行ったと言った内部で指令するのを遊覧する道に
地域と戸口を書いて間事実は怪異なことがないが独島が日本に属した地だと称することは決してそんな理がないから
今回の 報告が驚くべきだと言ったと言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