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멸시가 외교 의례의 장소에 노출해 버려, 큰 사건이 된 것이 쇼토쿠 연간의 통신사이다.
토쿠가와 로쿠다이 막부선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의 대행렬은, 이것을 그린 회화도 많아, 화려한 기록으로서 남아 있다.
그러나, 일행의 장대한 에도 왕래는 결과로부터 말하면, 완전한 차번극에 끝나 버렸다.문제는 이 때의 조선 국왕으로부터의 국서안에 「빛」이라고 하는 문자가 사용되고 있던 것에서 만났다.이것은 가 선의 조부의 「이에미쓰」의 이름과 문자가 쓰고 있다.
쇼토쿠도의 통신사(1711), 그림 두루마기·부분
중국과 그 속국에서는 왕의 본명(시호)을 어떠한 문서든 사용하는 것(범휘)는 절대의 터부로 여겨져 왔다.
일본에는 범휘의 금은 없지만, 이름은 소중한 것으로 예를 들면 주군과 같은 글자를 자신이나 자제의 이름에 허가도 없게 사용하는 것은 삼가한다고 하는 바람이 있었다.
중국이나 조선으로의 범휘의 제는 왕과 신민과의 사이의 것으로, 신하끼리의 사이에 상대의 시호를 부르는 것은, 범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례인 일로 여겨져 기피 되었다.
국서의 문언이라는 것은 경축적인 의미를 가진 몇 줄기의 짧은 것으로, 매회 같은 내용이어도 지장이 없는 것으로 있다.형식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 조차 해 두면 좋다.
따라서, 조선측 국서에 포함된 이 문자는 우연히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그들은 의도적으로”범휘”유사 행위를 행했던 것이다.
이 때,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는, 대립하는 무엇인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외교를 담당한 장군의 신하 아라이 하쿠세키는, 양국의 문명 대등의 원칙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에도시대의 국서에 있어서의 장군의 호칭이 「일본 대군」인 것을 무로마치 시대의 국서에 사용되고 있던 「일본왕」으로 변경해, 또 낭비 삭감을 위해서, 관광 유람에 지나지 않는 통신사의 닛코 참관을 그만두는 것을 사전에 통지해, 이해를 라고 있었다.
공식으로 이의를 주장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것에 대한, 불쾌감의 암묵의 표명이 조선측의 범휘행위였다고 생각된다.
막부선과 시라이시는 조선 국서중의 문자를 보고, 순간에 그 저의를 이해해 안색이 바뀌었을 것이다.
실은, 가 선은 사전에, 통과하는 제국에, 통신사일행의 응접에 임해 친절한 배려를 하도록(듯이) 반복 지시를 주고 있었다.그는 조선 측에 존재하는 일본 멸시의 인습을 인식한 다음, 일본에 대한 평가를 변화시키려고 희망하고 있었다.
더욱 그 연장상에는 반도를 통해 청나라와 국교를 여는 것을 소망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 이에야스는 조선을 통해서 명국으로 강화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고, 이에미쓰에 의한 조선에의 원군 파견의 신청도, 본심은 이것을 조수에 명국과의 강화를 전망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에야스나 이에미쓰의 목적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가 선의 기대도 배신당해 성과가 없는 것에 끝나 버렸다.조선 국서의 범휘에 의해서, 그의 준비는 무의미했다는 것을 재차 사토루등 된 것이다.
日本蔑視が外交儀礼の場に露出してしまい、大きな事件となったのが正徳年間の通信使である。
徳川六代将軍家宣の襲職を祝賀するための通信使の大行列は、これを描いた絵画も多く、華やかな記録として残っている。
しかし、一行の壮大な江戸往来は結果からいえば、まったくの茶番劇に終わってしまった。問題はこの時の朝鮮国王からの国書の中に「光」という文字が使われていたことであった。これは家宣の祖父の「家光」の名前と文字がかぶっている。
正徳度の通信使(1711)、絵巻・部分
中国とその属国では王の本名(諱)をどのような文書であれ使うこと(犯諱)は絶対のタブーとされてきた。
日本には犯諱の禁はないが、名前は大事なもので例えば主君と同じ字を自分や子弟の名前に許しもなく使用するのは控えるという風があった。
中国や朝鮮での犯諱の制は王と臣民との間のもので、臣下同士の間で相手の諱を呼ぶことは、犯罪とはいえないが、非礼なこととされ忌避された。
国書の文言というものは慶祝的な意味をもった数行の短いもので、毎回同じ内容であっても差支えないものである。形式的な礼儀をまもることさえしておけばよい。
したがって、朝鮮側国書に盛り込まれたこの文字は偶然とはとても考えられない。彼らは意図的に”犯諱”類似行為をおこなったのである。
この時、日本と朝鮮の間には、対立するような何か特別な事情があったというわけではない。しかし外交を担当した将軍の近臣新井白石は、両国の文明対等の原則を確認する意味合いもあったと思われるが、江戸時代の国書における将軍の呼称が「日本国大君」であったのを室町時代の国書に使われていた「日本国王」に変更し、また冗費削減のために、物見遊山にすぎない通信使の日光参観をやめることを事前に通知し、了解をえていた。
公式に異議を唱えないものの、これに対する、不快感の暗黙の表明が朝鮮側の犯諱行為であったと思われる。
将軍家宣と白石は朝鮮国書中の文字を見て、瞬時にその底意を理解し顔色が変わったはずである。
じつは、家宣は事前に、通過する諸国に、通信使一行の応接にあたっては親切な配慮をするように繰り返し指示を与えていた。彼は朝鮮側に存在する日本蔑視の因習を認識した上で、日本に対する評価を変えさせようと希望していた。
更にその延長上には半島を通して清国と国交を開くことを願望し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
過去、家康は朝鮮を通じて明国と講和することを追求していたし、家光による朝鮮への援軍派遣の申し入れも、本心はこれを潮に明国との講和を展望していたものであった。
しかし、過去の家康や家光の目的が実現しなかったように家宣の期待も裏切られ不毛なものに終わってしまった。朝鮮国書の犯諱によって、彼の準備は無意味であったことを改めて悟らされたわけ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