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게시물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정부 관여로
한국인이 곳곳에서 방화 살인 등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신문 등 언론으로
보도되고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학살당한 것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라는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퍼뜨렸다는 것은 증거로 남아있다
일본 경시청이 뿌린 전단지 일본 내무성이 일본의 각 지역의 경찰서로 보낸 통지 등
1.계엄령 선포
일본 계엄사령부는 나라시노 기병 15연대와 49 50연대 근위사단과 제1사단 등 군 부대에
폭동을 일으킨 한국인을 진압하라 라는 출동명령을 내린다
2.일본 군경 민간인에 의한 한국인 학살
관동계엄사령부에 상보에 의하면
9월3일 도쿄 오오시마에서는 한국인 200명이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3~4일 이틀동안 23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독일 미술가 부르카르트가 현지신문< 1923년 10월 9일 vossiche zeitung>에
자신이 목격한 한국인 학살에 대해 기고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 한국 친우회 회장 톰킨스는 국무장관 휴즈에게 1923년 11월 20일
일본군인이 8명의 한국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스티븐스의 가족의 증언을 제시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도쿄 龜戶 경찰서의 86명의 한국인 학살
자경단이 3.600개가 조직되어 한국인 민간인을 학살한 것 등
한국인 학살에는 일본 민간인과 군인 경찰 등 일본정부의 관여가 있었다
3.피살된 한국인 숫자
위 자료는 독일 외무성의 자료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8271명은 학살 장소 시신이 확인된 한국인 피해자 숫자이고
장소 미확인 시신 확인 피해자는 7.861명 시신 학살 장소 미확인 피해자는 3.249명
경찰에 의해 학살된 피해자 577명 군인에 의한 피해자 3.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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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일본 관동지방 罹災조선동포 위문반이 조사한 피살된 한국인 숫자
도쿄 1.781명 사이타마 488명
가나가와 3.999명 군마현 34명
지바현 329명 도치기현 8명 이바라키현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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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말 조선 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등 단체 유지들이 발기하여 20명으로 구성된
在일본 관동지방 罹災조선동포 위문반 이라는 조사단은 당시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 일대에 약 3만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고 수용된 생존자 7.58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만 2천 420명을 피해자로 추산하였는데
1923년 12월 5일 독립신문 김승학 (金承學)특파원을 비롯해 한국인 유학생에 의한 자체 조사에서
6.661명으로 밝혔고 이것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상하이 보고서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한국인이 1.029명 이라고 보고하였고
그 외 다른 단체에서 조사한 것을 종합하여 정리한 숫자가 6.661명이다
그런데 1923년 12월16일 보도에서는
한국인 피살자가 2만 1.600명이라고 발표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독일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요코하마에서만 1만 5.000명의 한국인이
학살당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한 6.661명에
1만 5.000명을 합하여 2만 1.600명으로 파악한 것이다
조선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각 신문에
당시 관동 일대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유학생 3.000명 노동자 3.000명 모두 6.000명으로
살해된 사람은 2명이라고 어이없는 발언을 했다
5 .학살된 한국인 유체 은폐
사이타마 本庄 경찰서 순사 아라이 겐지로는 경찰서를 습격한 자경단이 한국인 시체를 불태울
때에 그 시체의 숫자를 알 수 없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도쿄 아라카와 요쓰기바시 부근의 하천에서 경관이 매몰된 한국인 유체를 1923년 11월 13일 14일
2일동안 파내고 어디론가 가져갔다는 증언이 있고
일본인 오우치리키(大內力)은 지진 당시 해군 친척으로 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함선을 타고 요코하마에 입항했는데 한국인 시신이 바다에 가득 떠있어 걸어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6개월 지나서 고야스 해안에 태풍으로 수백구의 백골이 밀려 왔는데 경찰은 신고를 받고
그대로 방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6. 한국인 학살에 대한 조사와 일본의 방해
조선內에서 1923년 9월 8일 서울에서 兪星濬과 21명이 회동하여
在東京罹災 한국인 임시 구제회 )가 발족된다
임시 회장으로 兪星濬이 선출된다 이 단체의 목적은
1만 5.000명의 在東京 한국인 이재민을 응급 구제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종로 경찰서는 이 단체가 한국인들이 도쿄에서 가혹한 조사를 받은 증거를 모아 여론을
喚起시키고 일본 당국에 대항할 목적이 있다고 판단하고 경성지방 법원에 요주의 단체로
보고한다
그리하여 이 단체 (在東京罹災 한국인 임시 구제회)는 일본에 파견되어 한국인 학살 사건의
조사활동을 하던 중에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당하고 구제활동 또한 금지당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23년 9월 1일 부터 11월 1일까지 게재 금지 조치를 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관동대학살의 관련기사는 모두 602건으로 압류 조치는 18회였다
日帝의 언론탄압이 있었다
<在일본 관동지방 罹災 조선동포 위문반>이라는 조사단의 한국인 유골 인수 방법 신청에 대해
일본정부는 거절한다 (1923년 11월 6일 내무성 경보국장 보고서 )
7.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일본에 대한 항의 공문
상하이 임시 정부는 일본정부에 항의 공문을 보낸다
내용은
천재지변의 재앙을 한국인에게 전가하고 방화 폭탄을 투척한 者도 한국인 이라고 하며
군사를 일으켜 민간인을 부추겨 한국인을 대량 살해한 일본정부는 5일 이내에
1.불법 강제 구금당한 1만 5.000명의 한국인을 즉시 석방하라
2.모든 재해 지역에 있는 한국인의 생사 여부 성명 연령 주소 직업을 조사하여 발표할 것
3.한국인을 잔인하게 죽인 무리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조사한 것을 밝히고 기록하라
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대답이 없었다
2015년 현재까지도 대답이 없다
임시 정부 외무대신 趙素昻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 야마모토 곤노호에 에게
외무부 발행 131호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항의 공문을 보낸 것이다
前掲示物で 1923年関東大地震当時日本政府関与で
朝鮮人があちこちで放火殺人など暴動を起こしているというデマが新聞など言論で
報道されて このために多くの朝鮮人が虐殺されたことに対して調べました
朝鮮人が暴動を起こすというデマを日本政府がまき散らしたということは証拠で残っている
日本警視庁が振り撤いた散らし日本内務省が 日本の 各地域の警察署に行かせた通知など
1.戒厳令宣布
日本戒厳司令部は国侍奴騎兵 15連帯と 49 50連帯近衛社団と第1社団など余分の部隊に
暴動を起こした朝鮮人を押えなさいという出動命令を下げる
2.日本軍警民間人による朝鮮人虐殺
関東戒厳司令部に相補によれば
9月3日東京呉小島では朝鮮人 200人が軍人によって殺害されたし
3‾4日二日間 230人が殺害されたと言う
ドイツ美術家ブルカルトが現地新聞< 1923年 10月 9日 vossiche zeitung>に
自分が目撃した韓国人虐殺に対して寄稿した
アメリカフィラデルフィア韓国親友回会長トムキンスは国務長官フューズに 1923年 11月 20日
日本軍人が 8人の朝鮮人を殺害する場面を目撃したスチーブンスの家族の証言を提示して
真相糾明を 促した事実を確認した
東京 亀戸 警察署の 86人の朝鮮人虐殺
自警団が 3.600個が組職されて朝鮮人民間人を虐殺したことなど
朝鮮人虐殺には 日本民間人と軍人警察など日本政府の管になって行っていた
3.被殺された朝鮮人数字
上の資料はドイツ外務省の資料に根拠して作成されたことです
8271人は虐殺場所死体が確認された朝鮮人被害者数字で
場所未確認死体確認被害者は 7.861人死体虐殺場所未確認被害者は 3.249人
警察によって虐殺された被害者 577人軍人による被害者 3.100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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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日本関東地方 罹災朝鮮同胞慰問組が調査した被殺された朝鮮人数字
東京 1.781人埼玉 488人
神奈川 3.999人軍馬県 34人
千葉県 329人栃木県 8人茨城県 5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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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年 9月末朝鮮キリスト教青年会天道教青年会など団体維持たちが発起して 20人で構成された
在日本関東地方 罹災朝鮮同胞慰問組という調査団は 当時東京と横浜など
関東一帯に約 3万の朝鮮人が住んでいたし 収容された生存者 7.580人を除いて 残り
2万 2千 420人を被害者に推算したが
1923年 12月 5日独立新聞ギムスングハック (金承学)特派員を含めて韓国人留学生による自体の調査で
6.661人で明らかにしたしこれを新聞に発表した
上海見てからは死体が発見されない朝鮮人が 1.029人でありなさいと報告したし
その外他の団体で調査したことを総合して整理した数字が 6.661名だ
ところで 1923年 12月16日報道では
朝鮮人被殺者が 2万 1.600人だと発表する
が報道によればドイツブルックハルト博士が横浜でばかり 1万 5.000人の朝鮮人が
虐殺されたことを目撃したと証言したから独立新聞特派員が調査した 6.661人に
1万 5.000人を 合わせて 2万 1.600人で把握したことだ
朝鮮総督府SaitoMakotoは日本の各新聞に
当時関東一帯に住んでいた朝鮮人は留学生 3.000人労動者 3.000人 皆 6.000人で
殺害された人は 2人だとあっけない発言をした
5 .虐殺された朝鮮人流体隠蔽
埼玉 本庄 警察署巡使Arai健司では警察署を襲った自警団が朝鮮人死骸を燃やす
時に その死骸の数字をわか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という命令を受けたと証言こんにちはだった
東京アラカとヨスギバシ近所の河川で景観が 埋沒された朝鮮人流体を 1923年 11月 13日 14日
2日間 掘りだしてどこかに持って行ったという証言があって
日本人呉愚癡Riki(大内力)は地震当時海軍親戚かららはところによれば
艦船に乗って横浜に入港したが朝鮮人死体が海に いっぱい浮かんでいて歩いて行くことができる
位だったと言う
その後 6ヶ月経ってゴヤス海岸に台風で数百区の白骨が押し寄せたが警察は申告を受けて
そのまま捨ておきなさいという命令を受けたと言う
6. 朝鮮人虐殺に対する調査と日本の邪魔
朝鮮内で 1923年 9月 8日ソウルで 兪星濬と 21人が会同して
在東京罹災 朝鮮人臨時救済回 )が発足される
臨時会長で 兪星濬が選出されるこの団体の目的は
1万 5.000人の 在東京 朝鮮人罹災民を応急救済するのにあった
ところで鐘路警察署はこの団体が朝鮮人たちが東京で苛酷な調査を受けた証拠を集めて世論を
喚起させて 日本政府に対抗する目的があると判断して京城地方法院に 要注意団体で
報告する
そしてこの団体 (在東京罹災 朝鮮人臨時救済回)は日本に派遣されて朝鮮人虐殺事件の
調査活動をした中に日本政府によって解散されて救済活動も禁止される
朝鮮総督府警務国が 1923年 9月 1日から 11月 1日まで掲載禁止措置を一朝鮮日報
東亜日報の 関東大虐殺の関連記事は皆 602件で 差し押え措置は 18回だった
日帝の言論弾圧があった
<在日本関東地方 罹災 朝鮮同胞慰問組>という調査団の朝鮮人ユーゴを引受方法申し込みに対して
日本政府は断る (1923年 11月 6日内務省警報局長報告書 )
7. 大韓民国臨時政府の日本に対する抗議公文書
上海臨時政府は日本政府に抗議公文書を送る
内容は
天災地変の災いを韓国人に擦りつけて放火爆弾を投擲した 者も韓国人と言って
軍事を起こして民間人をけしかけて韓国人を大量殺害した日本政府は 5日以内に
1.不法強制拘禁された 1万 5.000人の韓国人を直ちに釈放しなさい
2.すべての災害地域にいる韓国人の生死可否声明(名前)年齢住所職業を調査して発表すること
3.韓国人を残忍におかゆである輩らを厳に処罰して調査したことを明らかにして記録しなさい
と要求するしかし日本政府は返事がなかった
2015年現在までも返事がない
臨時政府外務大臣 趙素昂の名前で日本政府Yamamotoゴンノ−ホにに
外務省発行 131号 大韓民国臨時 政府の対日抗議公文書を送ったこと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