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돗자리를 짜고 있는 모습입니다
회혼식의 장면인데 잘 보면 대청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있습니다
19세기 인물화
이 여인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여인 인물화로는 아주 드물게 있는 작품
우측으로 화로가 있는데 화로는 겨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옷을 다림질 하기 위한 인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화로 안에 걸린 인두 보이지요 ?
엘리자베스 키스 작품
손에 부채가 있는 것으로 봐서 여름 같습니다
예쁘고 다양한 무늬의 화문석을 깔고 있네요
마루에서도 사용한 돗자리 무늬 없는 소박한 돗자리 입니다
야외에서도 ....
화문석(花紋席)은 염색한 완초(莞草)로 꽃 무늬를 넣어 짠 돗자리입니다
신라시대에는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한 席典이라는 관청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와서 외국에 까지 알려졌는데 인삼과 함께 중요한 수출품이었습니다
고려 초기에 遼나라에 보낸 특산품에 용 무늬를 넣은 용수초지석 (龍鬚草地席)이 있었다고 합니다
화문석은 문양에 따라
(五彩龍紋席) (五爪龍紋席) ( 滿花席 ) (各色細花席 ) 등 여러가지로 불렀습니다
北宋의 徐兢은 화문석에 대해 고려도경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이나 평상에 깔고 거칠은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훼손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화문석의 수요는 급증하였습니다
장흥고 (長興庫)라는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관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각 지방으로 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 들였다고 합니다
조선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 (京都雜誌)에서
웬만한 양반 집에 화문석을 (자리)로 쓴다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완초 생산지로 꼽은 곳은 경북 안동 예안이라고 하였는데
강화도 화문석이 유명해진 배경에는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생산하지 않는 백색의 완초를 재료로 사용해서 만드는 것과
조선末 강화도의 한충교 (韓忠敎) 선생이 조선 왕실의 왕명으로
화문석의 문양을 다양하게 개발하는데 성공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朝鮮時代こざむしろを組んでいる姿です
回婚式の場面なのによく見ればテチョン床にこざむしろを敷いています
19世紀 人物画
が女人の身分はわからないが朝鮮時代女人人物画ではとても珍しくある作品
右側で炉端あるのに火では冬にだけ必要ではなくて服をアイロンかけるための焼きごてが
必要だったことです火鉢中にかかったインも見えますか ?
エリザベトキス作品
手に団扇があることで 見て夏ようです
きれいで多様な柄の花むしろを敷いていますね
床でも使ったこざむしろ柄ない素朴なこざむしろです
野外でも ....
花むしろ(花紋席)は染色した莞草(莞草)で花柄を入れて塩辛いこざむしろです
新羅時代には 花むしろの生産を担当した 席典という官庁があったし
高麗時代に来て外国にまで知られたが高麗人参と共に重要な輸出品でした
高麗初期に 遼国に行かせた特産品に竜柄を入れた竜瓦草支石 (竜鬚草地席)があったと言います
花むしろは文様によって
(五彩竜紋席) (五爪竜紋席) ( 満花席 ) (各色細花席 ) などいろいろに呼びました
北宋の 徐兢は花むしろに対して高麗道警で
精巧なことは寝床や平常に敷いて荒いことは地に敷くのに非常に柔らかくて折るとか曲げても
毀損されないと言いました
朝鮮時代に花むしろの需要は急増しました
長興高 (長興庫)という花むしろの調逹を担当した官庁があったが
こちらから各地方から必要な数量を取り入れたと言います
朝鮮実学者柳得恭は硬度雑誌 (京都雑誌)で
かなりの両班家に花むしろを (席)で使うだと言いました
朝鮮から莞草生産地で指折った所は慶北安東イェアンだと言ったが
江華島花むしろが顔が売れた背景には
他の地方ではほとんど生産しない白色の莞草を材料で使って作ることと
朝鮮末 江華島のハンツングギョ (韓忠教) 先生が朝鮮王室の王命で
花むしろの文様を多様に開発するのに成功したエピソードがあ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