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X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릉(丘X)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
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辛亥(신해, AD351년, 儒禮尼今紀 2년)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同名(東溟) 金細簾(金世濂)の 《ヘサロック(海X録)》には, “日本は極東に遠く離れていて四面が大きい海で置こうとあって, 外国の軍事が入っ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
ただその年代記(年代記)を見れば, ウェファング応身(応神) 22年に新羅軍事がミョングソックポ(明石浦)に入って来たとなっているのに, ミョングソックポは大阪(大阪)でやっと 1白里
落ちている. 摘奸官(赤間関)の東に一丘陵(丘X)があるのに, 倭人がこれを示して ‘これが百馬糞(白馬墳)なのに, 新羅軍事が日本に深く持ち上げて
来たら, 日本が和親して軍事を解いてくれるのを請じて白馬(白馬)を殺して誓った後に言葉をこちらに埋めた.’ する.” した.
上告するが, 応身 12年 辛亥(辛亥, AD351年, 儒礼尼今紀 2年)がまさに類例王 8年に当たったら, 今日とは少し差があるがたいてい同じな時の事件だが,
東史には見えないことは文が抜けた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