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글의 요지를 잘 파악해주시기 바랍니다.

없는 형편에 남의 나라에 가서 싸워야 했던

우리 할아버지들을, 조상들을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공로는 공로로써 인정하되,

지은 죄는 인정하고

우리의 후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서

우리역사를 바로 보고 반성하여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자는 데 있습니다 !

민간인 학살이 극소한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민간인 학살은 학살이고 죄는 죄 입니다 

30여년 전 한국은 아무런 원한도 없고 싸울 이유도 없는 베트남 땅에서

양민을 죽이고 마을을 짓밟는 비극을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일은 점차 우리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지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비극의 잔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일제 침략의 야만성과 인류사적 범죄인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
자존의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부정적인 역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시아 ‘침략’을 ‘진출’로 바꾸었고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역사기록에서 삭제하고
또 난징대학살 사건을 왜곡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본의 내일이 어두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범국가로서의 반성이 없다는 것,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적 범죄를 되풀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역사가 아름다워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반성력에 있다.
반성력이 죽은 역사는 위태롭고 반성력이 죽은 역사에는 내일이 없다..

(물론 일본과는 전쟁 수행 목적이나 수행과정에서의 방법상 잔인함 학살한 양민들의 수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일본과 똑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역사를 바로 알려고 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후세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다.

 

베트남전 24돌에 돌아보는 우리의 치부, 베트남 전범조사위의 끔찍한 기록들

 

전쟁은 이런 곳에서도 일어났을까.

한낮의 태양에 달구어져 엿가락처럼 휘어버릴 듯한 거리엔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전거를 달리는 여학생들의 하얀 아오자이 자락이

무거운 바람 속을 구름처럼 떠돌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저토록 가녀린 몸피의 여인들에게까지 총부리를 들이댔을까.

이성은 간데없고 광기만이 오롯이 남은 인간들이 저지른 살육의 현장,

그 아픔의 속살을 헤집으려 나서는 한 ‘남추틴’(남조선)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중앙선도 없는 아스팔트 위를 끝도없이 달렸다.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하였다.

 

(사진/당시 린선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푸 스님.)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사진/”잊고싶은 전쟁”. 한국군에 죽은 베트남인의 숫자는 공식통계로만 4만1450명이다.)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푸 스님이 마을에서 돌아왔을 때 절은 이미 난장판이 돼 있었다.

푸 스님은 불에 그을린 다섯 스님의 시신을 인근의 아오방 절로 옮겼다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에서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판랑지역 전역의 학교가 휴학을 결의했고,

학생들과 불교도들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베트남 정부는 양민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따이한은 베트남을 떠나라” 등등 피맺힌 함성이 온통 판랑을 휩쓸었다.

절 옆으로 당시 죽음을 당했던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

우리 일행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스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깨끗이 죽이고, 불태우고, 파괴한다는 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이 남한의 의병들을 토벌하는 남한대토벌에서도 쓰인 작전이다..

이럴 수가 있나. 그토록 일본군에게 끔찍이 당해놓고도

그 피눈물 나는 역사를 경험해놓고도

어느새 우리는 일본인과 똑같이 잔악한 범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쿠앙남성의 디엔반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곳 탄쿠잇다리(디엔탕사)에서 지압바다리(디엔안사)에 이르는 구간을

‘단명의 길’이라 부른다.

디엔안 양민학살 현장의 또다른 생존자 쩐티득(72) 할머니(응웬수 할아버지와 사돈관계)를 만나러 가는 길.

수 할아버지가 차창 밖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야”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손끝을 따라가봐도 땅이 도톰하게 솟아 있는 듯 느껴질 뿐,

봉분도 없는 무덤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군들이 물러가고 난 뒤,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들쳐메고

길게 열을 지어 키엠루 초소를 찾아갔어.

만장도 없고, 그 흔한 눈물도 없고,

다들 넋이 나가서는 곡성도 풀어놓질 못했지….”

주민들은 남베트남 정부군 초소 앞 도로 양옆으로 시신을 늘어놓고

남조선군의 초소에 가서 호소했다.

그러나 초소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파리떼가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무렵에야 초소 군인들이 빗장을 열고,

장례에 쓸 널빤지와 천을 내주며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미 부패해 진물이 줄줄 흐르는 주검은 다시 마을로 옮겨지지 못하고

도로변에 그대로 묻혔다.

“널빤지와 천으로 시신을 묻을 순 있어도

우리 디엔안 주민들 가슴속 원한이야 어찌 묻겠는가...”

 

 

(사진/풍넛촌 생존자 응웬수 할아버지)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분명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식 침략이나, 약탈을 위해 전쟁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식으로 월남공화국 요청으로 가게된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가 제국주의 팽창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침략한 것이 아니더라도,

미국과 베트남의 요청에 의해 파병된 것이 아니더라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살인을 하고 방화를 한 것은 엄연한 ”테러”가 아닌가.

파병시 “우리나라는 베트콩 한 명을 잃을 지라도

베트남 국민을 보호한다”는 조약이 엄연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였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책임져야 할 엄연한 우리 ” 대한민국의 죄”이다.

물론 우리는 일본과 달리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께서 직접적으로 유감표명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초등학교를 40 여개 정도 지어주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는 본국이 이긴 전쟁이므로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국가적인 측면에서 밝힌 것일 뿐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사과를 했을 때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강제징용당한 분들,

무참히 학살된 분들의 동의없이 우리 정부가 사과를 받아준다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것도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것에도 화가 난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조선을 침략하여 수많은 죄없는 이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에 화가 난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은 우리를 무참히 짓밟고 학살한 존재,

허나 우리 나라는 베트남에 파병되어서 그들을 위해 싸워준 좋은 존재..

이렇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볼 수 없다.

분명 우리 한국군이 저지른 죄가 있었다면, 그것이 당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 한국군도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일”이고, 나라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타국으로 갔다가

죽거나 병을 얻거나 고엽제 휴유증으로 고생하는 군인들도 많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경제적 발전을 이룬 만큼,

그리고 심각한 고엽제 증후군으로 그 자손들에게까지 장애가 이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그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유감이다. 그들의 인생을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그들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진상규명을 확실히 하고, 우리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자는 것이다.

 


ベトナム戦争の時の韓国軍の蛮行, 反省ない歴史には明日がない

文の要旨をよく把握してください.

ない都合に他人の国へ行って争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うちのお爺さんたちを, ご先祖を

売り渡すのではないです.

功労は功労として認めるが,

犯した罪は認めて

私たちの後世たちにまともに教えて

国史を直視して反省して

より良い明日を作って行くということにあります !

民間人虐殺が極小した範囲で成り立ったと言っても

民間人虐殺は虐殺で罪は罪です 

30余年の前韓国は何らの恨みもなくて争う理由もないベトナム地で

良民を殺して村を踏み付ける悲劇を作った.



歳月が経ちながらその事は徐徐に私たち記憶の中で遠ざかったが

その地に住んだ人々はまだその悲劇の残在によって苦しんでいる.


日本の右翼たちは 日帝侵略の蛮性と人類史蹟犯罪人侵略戦争に対する反省を

自虐で規定して,
日本の青少年たちに誇らしい歴史,
自尊の歴史を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であって否定的な歴史を教えることができないと主張する.

それでアジア ‘侵略’を ‘進出’に変えたし
日本軍慰安婦事件を歴史記録で削除して
また南京大虐殺事件を歪曲する行為を厭わない.


日本の明日が暗いことはすぐこのためだ.

戦犯国家としての反省がないというの,罪の思いがないというのは
先日の歴史的犯罪を繰り返す用意ができていることを言ってくれるからだ.


歴史が美しくなって発展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は人間の反省力にある.
反省力の死んだ歴史は危なげで反省力が死んだ歴史には明日がない..

(もちろん日本とは戦争遂行目的や遂行過程での方法上残忍虐殺した良民たちの数を

比べるところではない. 日本とまったく同じだと言いたいのではない.

重要なことは自分の歴史を正しく分かろうとする心,

そしてそれを正しく後世に伝達すること. それだ.

 

ベトナム戦 241周年に振り返る私たちの恥部, ベトナム戦犯組壻の無惨な記録たち

 

戦争はこんな所でも起きただろうか.

日盛りの太陽に焼かれて飴スプーンのように曲がってしまいそうな距離(通り)には腰をまっすぐに世優で

自転車を走る女学生たちの白いアオザイ裾が

重い風の中を雲のように流れたりする.

果して私たちは私するようにか細いモムピの女人たちにまで銃口を突き付けただろうか.

理性はなくなって狂気だけがオロッの残った人間たちがやらかした殺戮の現場,

その痛みの肌を穿ろうと出る限り ‘ナムツティン’(南朝鮮)の審査が分かるか知れないか

バスは中央線もないアスファルトの上をクッドオブが走った.

生き残ったノース様の証言

1969年 10月14日, ベトナム南部パンラングジヨックで南韓軍人たちがリーンでは(Linh Son)社お坊さんたちを向けて聡気を振り回す事件が発生した. サイゴンの報告によると南韓君一人がリンソンサでベトナム女性を戯れて株こよりに追い出されるとここに激憤, 仲間たちを駆って来て銃器を乱射したことと知られる.

が事件で 71歳の株こより, 69歳の老僧, 41歳の女僧, 15歳のヘングザスングなど

4人が死亡した事実をベトナム政府が公式した.

 

(写真/当時リンソンサで唯一に生き残ったプお坊さん.)

当時唯一の生存者であるプ(78) お坊さんと現場目撃者であるウングウェンティユエンした(45)に会った.

ここまで来るうちに始終筆者を押さえ付けたりした不安が,

否認することだけしてたかった話が目の前に現実になって現われた.

 

 

 

(写真/¥"忘れたい戦争¥". 韓国軍に死んだベトナム人の数字は公式統計にだけ 4万1450人だ.)

“タイした軍人たちが先にお坊さんたちを向けて鉄砲をうったんです.

なのでいかしてくれと言って逃げる女菩薩様にも鉄砲をうったんです.

それからは死骸を皆燃やしたんです.” UN漢方医証言だ.

当時わずか 15歳だった彼は恐ろしさにあきれて叫びも上げることができずに隠れてあったと告白する.

リンソンサは皆五つお坊さんが住むやや小さいお寺だった

.あの時プお坊さんは方丈さんより先に村に降りて喪家から読経を読んでいた.

証言の大部分はユエンハンを通じて行われたし,

その絶義唯一の生存者であるプお坊さんはものがない.

当時の話をしながらも人々は

あの時その虐殺の主人公であるタイハンの後裔たちをサルトルヒ気配りする.

冷たい車を持ち出して, 果物を剥いて勧めて, パパヤを食べるために汚なくなった口をぬぐいなさいと

水までバッアだ竝び焚くむっと涙が湧いた.

プお坊さんが村から帰って来た時引きずって行ったもう乱闘場がなっていた.

プお坊さんは火に日焼けさした五つお坊さんの死体を隣近のアオバングお寺に移した

死体奪取に対する不安であった.

が消息が伝わると, パンラングジヨック全域の学校が休学を決意したし,

学生たちと仏教徒たちが一斉に一揆に出た.

“ベトナム政府は良民虐殺を直ちに中断しなさい!”

“タイハンはベトナムを去りなさい” 等々青黒いあざができた喊声がいちめんパンラングを荒した.

お寺の隣で当時死にあったお坊さんたちの遺骨が仕えられた 3階塔がある.

うちの連中はその前に首を下げてお坊さんたちの冥福を祈った.

女性帰って強姦した後殺害

韓国軍は残酷なホロコーストを事としてナムベトナムミンゾックヘバングゾンでは(NLF)さえ

なるべく直接的な交戦は避けようと思うほどだったと伝わる.

電線もなくて少なく誰だかも分からないベトナム戦で

ベトコンの足だまりを捜索, 破壊するという作戦上の名分が

老若男女を選り分けない虐殺行為を政党化させてくれた.

1965年 12月22日, 韓国軍作戦兵力 2個大隊が

ビンディン性, クィニョンシにあるトイプ軍, プホア死(使), トンジアング村に

500ヨバルの大砲を発射した後

“きれいに殺して, きれいに燃やして, きれいに破壊する”と言う掛け声の下

捜索掃討作戦を広げた.

彼らはこの村で 12歳以下 22人の子供, 22人の女性, 3人の妊婦,

70歳以上 6人の年寄りを含み, 50人余りが越える良民を虐殺した.

(きれいに殺して, 燃やして, 破壊するということは日帝時代の時

日本が南韓の義兵たちを討伐する南寒帯討伐でも使われた作戦だ..

まったくもうあるか. そのように日本軍に非常にあっておいてからも

その血涙私は歴史を経験しておいてからも

いつのまにか私たちは日本人とまったく同じく残忍で悪辣な犯行をやらかしていた.)

とは子供を出産してから二日ぶりに鉄砲に当たって死んだ.

彼の子供は軍靴発ににじられたまま血が散り乱れて乱雑なお母さんの胸の上に投げられていた.

子宮が外で持ち出すんですあった.

南韓兵士は一歳排気子供を負っていたおかずも鉄砲をうって殺したし,

子供の髪を刈って地に投げ付けたし,

残ったバケツは多くの切れで切り捨ててほこり窪みに捨てた.

彼らはまた二歳排気子供の首を破って殺したし,

一子供の身を入って来ようと木に投げて死ぬようにした後火に乗せた.

それからは 12歳になった戎衣足をうって倒した後買ったままで不具塊に投げこんだ…

韓国軍のホロコーストが恣行された所には子供達の口にキャンデーやケーキが飽きていた.

年寄りたちの口にはタバコが飽きている場合が多かった.

たぶん里人たちを安心させながら1ヶ所で集める一手段だったようだ.

ダナンで南に 23km 離れたクアングナムソングのデ−エンバンヒョン.

いつからなのか分からないが人々は

こちらタンクイッダリ(デ−エンタングサ)から指圧海里(デ−エンアンサ)に至る区間を

‘短命の道’と呼ぶ.

デ−エンアン良民虐殺現場のもう一つの生存者チォンティドック(72) お婆さん(ウングウェンスお爺さんと姻戚関係)に会いに行く途中.

数お爺さんが車窓の外を示して “すぐここなの” した.

しかしお爺さんの手先を取るようでも地が厚目に湧いているように感じられるだけ,

封墳もない墓を調べやすくなかった.

“韓国軍たちが退いてから後, 里人たちが死体をドルチョメで

長く列を作ってキエムル警戒所を尋ねたの.

満場もなくて, その有り勝ちな涙もなくて,

みんな魂が出ては哭声も解いてお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んだろう….”

住民たちはナムベトナム政府軍警戒所前都で両側で死体を列べて

南朝先君の警戒所に行って訴えた.

しかし警戒所の門は固く閉まったまま開かれなかった.

死骸腐るにおいが震動をして,

蝿の群れが空を真っ黒に覆う頃には警戒所軍人たちがラッチを開いて,

葬礼に使う板と布地を渡して事態収拾に乗り出した.

もう腐敗して珍物が与えること流れる死骸はまた村に移されることができずに

道路周辺にそのままつけた.

“板と布地で死体を埋めることはできても

私たちデ−エンアン住民たち胸の中恨みはどうして問うか...”

 

 

(写真/プングノッチォン生存者ウングウェンスハルアボだ)

果して君たちに真正な反省はあるか

私たちにもベトナム戦は忘れたい戦争だ.

韓国は 1964年医療支援団とテコンドー教官など 270人余りを

サイゴン南側ブングタウに派遣することで ベトナム戦に軍事的な介入を始めた.

以後 65年から 73年まで約 30万名の戦闘部隊を ‘ベトナム政府の要請’という未明の下ベトナム電線に投入した.

が過程で韓国軍たちも 4960人余りが戦死したし 10余万人が負傷された.

しかし韓国軍はまた敵軍であるベトナム人を

4万1450名も殺す戦勝(?)をおさめたりした

我軍死者数の 10倍にのぼる敵軍を戦死させたのだ.

それも公式的な統計上だけで!

加害者でも被害者でも傷受けた ‘今日’を治癒する過程なしには

私たちに未来がないだろう.

たとえそれが良心に刀をつける痛みを通じてできてと言っても.

歴史は私たちに疑問符号一人を投げておく.

果して君たちに真正な反省はあるか.

 

 

 

 

 

 

確かに私たちは和製国注意式侵略や, 掠奪のために戦争をしたのではない.

私たちは正式で越南共和国要請に行くようになったこと.

しかし我が国が帝国主義膨脹主義論理に即して侵略したのではないとしても,

アメリカとベトナムの要請によって派兵されたのではないとしても

民間人を対象で殺人をして放火をしたことは厳然な ¥"テロ¥"ではないか.

派兵の時 ¥"我が国はベトコン一人を失うかでも

ベトナム国民を保護する¥"は条約が厳然にある.

それにもかかわらず女性たちを強姦して幼い子供達と年寄りたちを殺したということは

私たちが認めて責任を負わなければ割 厳然な私たち ¥" 大韓民国の罪¥"だ.

勿論 私たちは日本と違い私たちの罪を認めて

キム・デジュン大統領と労務現代通霊が直接的に残念表明をした.

そして我が国がベトナムに小学校を 40 余個位作ってくれた.

ところが ベトナム政府は本国が勝った戦争なので謝りを受ける必要がないと言った.

壊すが それはあくまでも為政者たちが自分たちの立場(入場)を

国家的な側面で明らかにしたことであるだけだ.

もし日本政府が謝った時私たち慰安婦お婆さんたちや強制徴用された方々,

無惨に虐殺された方々の同意なしに我が政府が謝りを受けてくれたら,

そうだとして私たちが彼らを許すことができるか?

それはではないじゃないのか.

私たちは日本が私たちに謝らないことも悔しくて悔しいが,

彼らの歴史を若者達に教えアンヌンゴッにも頭に来る.

今日日本人たちが自分たちの歴史をまともに学ばないで,

¥"朝鮮を侵略して幾多の罪のない人々を虐殺した¥"と言うのを

分からないということに頭に来る.

ベトナムも同じだろう.

日本は私たちを無惨に踏み付けて虐殺した存在,

しかし我が国はベトナムに派兵されて彼らのために争ってくれた良い存在..

こんなに両極端的視覚で見られない.

確かに韓国軍のやらかした罪があったら, それが当時仕方ないことだったしても,

私たちは私たちの子供達に韓国軍もこれこれな過ちをしたということを

教えてくれなければならない.

¥"国が要する事¥"で, 国の経済的発展のために

命をかけて他国に行ってから

死ぬとか病気を得るとか枯葉剤後遺症で苦労する軍人たちも多い.

その方たちの犠牲で我が国が経済的発展を成しただけ,

そして深刻な枯葉剤症侯群でその子孫たちにまで障害がつながって

それにもかかわらず我が国で彼らに対する補償がまともに成り立たないというのは

あまりにも残念だ. 彼らの人生を誰が償ってくれようか?

彼らをけなして責めるのではない.

ただ真相糾明を確かにして, 私たち世代に正しい歴史を教えようという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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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에 다녀 왔던 黒猫 2013-01-31 30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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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스렛드 dkool 2013-01-30 35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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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흥미가 ....... kotonomiyayuki 2013-01-29 31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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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한국인 도난범 체포, 불상 2점도....... rna123455 2013-01-29 269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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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예상대로 대마도의 국보 불상 ....... rna123455 2013-01-29 31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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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해 매우, 알고 있습니까........ dkool 2013-01-28 285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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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하기 때문에 스레를 세운다! 黒猫 2013-01-28 436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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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일본 악마들(日本鬼子)에 대한 ....... Raynor 2013-01-26 379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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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재개!! dkool 2013-01-24 35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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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참배 왜 한국은 비판한다?....... 阿倍比羅夫 2013-01-21 44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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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반도의 역사 yunsungkwan 2013-01-16 411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