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에서의 일본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1904년 6월6일 일본은 일본公使 하야시를 통하여 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넘겨 줄 것을 요구
하였다
나가모리 [長森藤吉朗]이라는 일본인을 앞 세워 그에게 50년 동안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위임하라는 것이었다 10조로 된 계약 내용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모든 권한을 가지는 내용이 포함되고 있었다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한국에서는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헌병대는
1904년 7월16일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반대 운동을 하고 있던 保安會를 습격하여
간부들을 체포하고 保安會를 강제로 해산 시켰다
1904년 7월21일
일본은 일본군을 서울과 그 주변의 치안을 담당하게 한다는 것을 한국에 통보하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항일 논조를 펼치고 있었다
7월 29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의 계약안을 인준할 수 없다는 것을 궁내부 문서 작성으로
일본에 통보하였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와 한국 정부의 통보로 황무지 개척권은 일단 유보하게 된다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어 일본의 고문 정치가 시작되었다
러일 전쟁 후 대한제국 경찰제도에 일본 헌병대가 침투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경무 고문으로
일본인 마루야마 시케토시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재정 경찰권은 일본이 통제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한 상태가 된 것이다
주한 영국 公使 조단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영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에 큰 장해 요인이 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영국 외무부에 보냈다
영국 외무성은 일본이 베델을 스스로 처리하는 방안과
영국이 직접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베델 처리 문제에 대해 영국의 결정을 재차 독촉하자
영국은 베델 처리 문제를 일본이 일임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일본 公使 하야시는 베델을 일본 군률에 따라 처리하는 문제를 본국 정부와 합의한 후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영국公使 조단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 외무성은 베델 처리 문제에 방침을 바꾸는데
러일 전쟁 후 러일강화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영국 시민을 재판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리는 치외법권을 포기할 수 없으며 베델을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
영국 법률 추밀원령 [樞密院令]을 적용하면 된다는 것
이 무렵 1905년 11월17일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1906년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公使 하야시와 영국 公使조단이 한국에서 떠났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여 왔고 영국 대리 公使로 헨리코번이 부임하여 왔다
베델 처리 문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코번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1907년 1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高宗 밀서 사진을 게재하자 일본은
베델 처리 문제를 서두르게 된다
일본은 베델 처리 문제를 주일 영국 대사관에 전달하는데
베델 추방에 동의하거나 신문사를 폐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한 영국 公使 코번은 樞密院令 법 조항으로 보면 베델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영국에
보고한다
樞密院令의 조항은 영국 국민이 한국 정부와 한국인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헌행 樞密院令으로 베델을 처벌한다면 일본 통감부를 실질적인 한국 정부로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된다고 외교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베델을 처벌하려면 한국 주재 일본 관리와 한국인 사이에 적대관계를 조장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출판물을 처벌할 수 있도록 이미 發效중인 1904년 樞密院令 75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樞密院令을 개정하면 베델을 처벌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은 樞密院令을 빨리 공포해서 베델을
처벌할 수 있도록 영국에 독촉한다
그러나 영국은 코번의 건의에 따라 1904년 공포한 樞密院令으로 약식 영사 재판에 부치기로
방침을 바꾼다
이것이 1차 재판 1907년 10월 14일 오전 11시 주한 영국 총사관 베델에 대한 재판으로 6개월 근신
명령이 유죄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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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에 대한 처리 방침은 3회에 걸쳐 변경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베델 처리 문제를 놓고 일본과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방침을 변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한국이 일본에 외교적 군사적으로 점령되고 있는 상황 등
국제정세나 국가적 정치상황이 고려되고 있군요
개인에 대한 평가도 국제정세나 국가의 외교적 문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1904年露日戦争後大韓帝国での日本軍の活動が活発になっていた
1904年 6月6日日本は日本公使 Hayashiを 通じて韓国に荒れ地開拓権を渡してやることを要求
した
ナがモリ [長森藤吉朗]という日本人を先に立たせて彼に 50年の間韓国の荒れ地開拓権を
委任しなさいということだった 10組になった契約内容には荒れ地の開墾整理拓殖などすべての経営権と
そこで得られるあらゆる 権限を持つ内容が含まれていた
日製の荒れ地開拓権要求に韓国では激しい反対運動が起きた
日本憲兵隊は
1904年 7月16日 日本の荒れ地開拓権 要求に対して反対運動をしていた 保安会を襲って
幹部たちを逮捕して 保安会を強制で解散させた
1904年 7月21日
日本は日本軍をソウルとその周辺の治安を担当するようにするということを韓国に知らせた
日本の荒れ地 開拓権要求に対して反対運動が起きている頃に創刊された大韓毎日新報は
日本の荒れ地開拓権の不当さを知らせるなど抗日論調を広げていた
7月 29日
大韓帝国政府は日本の荒れ地開拓権の 契約の中を承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宮内部文書作成で
日本に知らせた
日本は韓国人たちの激しい反対デモと韓国政府の通報で荒れ地開拓権は一応留保するようになる
1904年 8月 22日
1次韓日協約が調印されて日本の顧問政治が始まった
日露戦争後大韓帝国警察制度に日本憲兵隊が浸透されていた 状況で 警務 顧問で
日本人Maruyamaシケトシが任命されたから韓国の財政警さつ権は日本が統制することができた
日本軍が韓国を占領した状態になったことだ
在韓イギリス 公使 操短は大韓毎日新報社がイギリスと日本の友好関係に大きい障害要因になっているという
内容の報告書をイギリス外務省に送った
イギリス外務省は日本がベセルを自ら処理する方案と
イギリスが直接処理する問題をおいて悩んでいる途中決定を留保していた
しかし日本が ベセル処理問題に対してイギリスの決定を再び督促しよう
イギリスはベセル処理問題を日本がけだを預けるように 決断を出した
日本 公使 Hayashiはベセルを日本郡率によって処理する問題を本国政府と合議した後具体的な
措置を取るとイギリス公使 操短に約束をした
しかしイギリス外務省はベセル処理問題に方針を変えるのに
日露戦争後日露強化条約が締結されたから日本がイギリス市民を裁判することは正当性が
ないというのだった
イギリス人が韓国で享受する治外法権をあきらめることができないしベセルを処罰する必要があったら
イギリス法律樞密怨霊 [樞密院令]を適用すれば良いというの
が頃 1905年 11月17日
日本は韓国の外交権を剥奪して乙巳條約が締結された
1906年ソウルに統監府が設置されて日本公使 Hayashiとイギリス 公使操短が韓国で去ったし
伊藤博文が痛感で 赴任して来たしイギリス代理 公使でヘンリコボンが赴任して来た
ベセル処理問題は伊藤博文とコボンで移るようになったことだ
1907年 1月
大韓毎日新報とコリアデイリーニュースが 高宗 密書写真を載せると日本は
ベセル処理問題を急ぐようになる
日本はベセル処理問題を週間イギリス大使館に伝達するのに
ベセル追放に同意するとか新聞社を廃刊させることが必要だと主張した
しかし
在韓イギリス 公使 コボンは 樞密院令 法条項で見ればベセルを処罰することができる根拠がないとイギリスに
報告する
樞密院令の条項はイギリス国民が韓国政府と韓国人の間に敵対感を助長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なって
あるというの
ホンヘング 樞密院令でベセルを処罰したら日本統監府を実質的な韓国政府で認めてくれる結果が
になると外交上の問題点を指摘した
ベセルを処罰しようとすれば韓国駐在日本官吏と韓国人の間に敵対関係を助長する記事を載せる
出版物を処罰するようにもう 発效中の 1904年 樞密院令 75兆を改正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
建議こんにちはだった
樞密院令を改正すればベセルを処罰することができると信じた日本は 樞密院令を早く公布してベセルを
処罰するようにイギリスに督促する
しかしイギリスはコボンの建議によって 1904年公布した 樞密院令で略式領事裁判に付することに
方針を変える
これが 1次裁判 1907年 10月 14日午前 11時在韓イギリス銃士官ベセルに対する裁判で 6ヶ月謹愼
命令が有罪判決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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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セルに 大韓処理方針は 3回にわたって変更されています
イギリスはベセル処理問題をおいて日本との政治的利害関係によって方針を変更しているのです
もう韓国が日本に 外交的軍事的に占領されている状況など
国際情勢や国家的政治状況が考慮されていますね
個人に対する評価も国際情勢や国家の外交的問題政治的利害関係によって左右された
時代的状況と判断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