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제2차 진주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이계련(李繼璉)·민여운(閔汝雲)·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龜甲車)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출처] 진주대첩 [晉州大捷 ] | 네이버 백과사전
특히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① 제1차 진주싸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竹梯: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① 제1차 진주싸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竹梯: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晋州城戦闘 7万民間靭帯虐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