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토기 시리즈 마지막편 입니다 고구려 토기는 지리적 관계로 중국의 영향이 있지만 백제와
그 원류가 같기 때문에 백제 토기와 비슷합니다
스에키 [須惠器 ] 토기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4~5세기 고분시대 前期이다
스에키 토기는 질 좋은 토기 또는 쇠 처럼 단단한 토기 라는 뜻이다
스에는 한국어 [쇠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說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스에키 토기의 원류 라고 할 수 있는 낙동강 유역의 가야 토기 즉 가야가 철의 제국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스에 =[한국어 ]쇠 라는 說은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가야 토기
일본 스에키 수혜기 [須惠器 ]토기
앞에서 소개한 가야 토기와 유사합니다
스에키 토기는 가마를 이용해 1100도 이상 온도에서 구워낸 토기로 그 출현은 신기술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4~5세기 일본에 전파된 회백색 [灰白色]의 단단한 삼한 계통의 토기는 앞 시기
적갈색 [赤褐色]의 하지키 [土師器]와 구별된다
두드리면 쇠 처럼 단단한 소리가 나오는 스에키 토기는 제작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른
기술혁명의 토기였다
일본 오사카 부근 도읍 [陶邑] 대정사[大庭寺]고분은 스에키 토기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스에키는 391년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확장으로 금관 가야인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최대 고분 인덕릉 [仁德陵 ]에서 가야式 토기 스에키가 발굴 되었는데 근처 사카이
박물관에는 고분을 조형했다고 추정되는 도래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한다
이 도래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의 이름은 陶邑 즉 토기를 굽는 도요지 가마터이다
그 마을에는 토사[土師]라고 불리는 씨족들이 살고 있는데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본거지였다 토사[土師]씨족들은 금관가야 후손일 것이다
일본 최고 씨족지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에는 임나 [任那]라고 표기한 가야 계통의
씨족이 10개 부류로 소개하고 있다
토기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를 말해 주고 있고 종교 신념까지 알 수 있는 역사다
요시노 마을 유적지에서 소[牛]의 뿔 같은 손잡이가 달린 토기 삼한 계통의
灰白索 軟質 토기 쇠도끼 등 한국 관련 유물이 나왔다
백제 3세기 몽촌토성 [夢村土城]에서 발굴한 원통형 토기이다
이 토기는 일본의 기대[器臺] 토용의 원형으로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가야 토기
3세기 편찬한 삼국지위지왜인전에는 일본에는 말[馬]이 없다 라고 쓰고 있다
이 말 [馬]들은 어떻게 일본으로 갔을까
이 말[馬]들은 369년 고구려 부여족이 백제를 점령하고 부산 가야지역으로 퍼지고 일부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국경의 개념이 없던 그 시대에 민족 이동에 의한 문화전파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오히려 이 역사를 뒤집어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역사로 날조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こんにちは
土器シリーズ最終便です 高句麗土器は地理的関係で中国の影響があるが百済と
その源流が同じだから百済土器に似ています
スエキ [須恵器 ] 土器が日本に伝わったことは 4‾5世紀古墳時代 前期だ
スエキ土器は質のよい土器または鉄のように堅い土器 という意味だ
スには韓国語 [鉄 ]という言葉で由来したことで名前が付けられたという 説があるが明らかではない
スエキ土器の源流だと言える洛東江流域の伽揶土器すなわち伽揶が鉄衣帝国だったという
点で見る時
須恵 =[韓国語 ]鉄という 説は説得力あると考えられる
伽揶土器
日本スエキ受恵期 [須恵器 ]土器
前から紹介した行くと土器と似たり寄ったりです
スエキ土器はお御輿を利用して 1100度以上温度で焼いた土器で彼 出現は新技術の
革命に評価される
4‾5世紀日本に伝えた灰白色 [灰白色]の堅い三韓系統の土器は前時期
さび色 [赤褐色]のハジキ [土師器]と区別される
たたけば鉄のように堅い音が出るスエキ土器は作り方が根本的に違う
技術革命の土器だった
日本大阪近所都邑 [陶邑] 五寸釘社[大庭寺]古墳はスエキ土器が出たことで有名だ
スエキは 391年高句麗と新羅の勢力拡張で金冠伽揶人たちが集団移住しながら
伝えたことと知られている
日本最大古墳インドックルング [仁徳陵 ]から行くと式 土器スエキが発掘になったが近くSakai
博物館には古墳を造形したと推定される到来人たちの写真がかかっていると言う
が到来人たちが集まって住んだ地域の名前は 陶邑 すなわち土器を焼く陶窯地窯の焼き跡だ
その村には土砂[土師]と呼ばれる氏族たちが生きているのに大陸から渡って来た到来人たちの
本拠だった土砂[土師]氏族たちは金冠伽揶子孫であるでしょう
日本最高氏族誌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 [新撰姓氏録 ]には 任那 [任那]と表記した伽揶系統の
氏族が 10個部類で紹介している
土器は当時人々の生活そのものを言ってくれて宗教信念まで分かる歴史だ
吉野村遺跡地で沼[牛]の角みたいな取っ手が走った土器三韓系統の
灰白索 軟質 土器スェッドキなど韓国関連遺物が出た
百済 3世紀夢村土城 [夢村土城]で掘り出した円筒状土器だ
が土器は日本の期待[器台] 土俑の原型で考古学籍意義が大きい
伽揶土器
3世紀編纂した三国地位誌倭人伝には日本には言葉[馬]がないと書いている
この話 [馬]たちはどんなに日本に行っただろうか
この話[馬]たちは 369年高句麗 付与族が百済を占領して釜山伽揶地域で広がって一部は
海向こう日本に行ったことだ
国境の概念がなかったその時代に民族移動による文化電波で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
日本はむしろこの歴史を覆して日本が韓半島南部を支配した歴史で捏造解釈している
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