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위안부 문제가 재연할 것 같네요.

그 관계로 조사 것을 하고 있으면 재미있는 신문 기사를 찾아냈습니다.

 

1919년 6월 23일의 「카호쿠 신보」의 신문 기사입니다.

 

1919년은 일본 통치 시대의 조선에서 3월 1일에 「3·한가지 일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한국에서는 「3일절」로서 축일로도 되어 있네요.

기사는 이것에 관련한 것입니다.

 

 소요 사건의 발생인 원인은 고보다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가 일본 관헌의 횡포 압박이라고 하는 것 같은 일이 기 유력한 원인을 이룬 일은, 무슨도 사실인 것 같은, 실로 재북선의 관헌의 횡포는 이야기의 밖인 상으로 심한데 되면 한국인에 임하는에 흡도 죄인에 대하는 것과 같이 항상 압제 도달해 바구니 없는 것 뿐만 아니라 뇌물수수독직 매우 해 나무는 금품을 강탈해 부녀를 욕라고 하는 말하는에 도둑질 바구니 악업을 쌓는이라면 산뜻함전 파는 것도 있는 물론사말하는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어도, 그것이 과대하게 선전한국인에 대해서 일본의 관헌은 사구 (와) 같이 악랄한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여 파는 일은, 조에 배일 사상을 유발하는 동기인에 상위 없는, 남편에 공무원허는 아니고 일반 내지인도 역 항상 경모의 생각으로 그들에게 접해 지역횡포 도달해 바구니 없는 것 모양이므로 영원한 동안 울적 한 그들의 반감의 한편이라면 바구니일이 용이하게 상상되자.

 

 기사에 쓰여진 「소요 사건」이란 「3·한가지 일건」입니다.

 (한국인용) 의역하면…「3·한가지 일건」의 원인은 일본 관헌의 횡포나 압박이 원인인것 같다.한국인을 죄인과 같이 취급해 금품을 요구하거나 부녀를 손상시키거나 하는 공무원도 있다고 전해 듣는다.이러한 심한 처사는 좀처럼 없지만, 그 이야기가 과대하게 퍼지고, 한국인의 반일 의식을 조성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공무원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한국인을 경멸해 난폭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기 위해, 한국인의 반감이 높아지고 있으면 상상할 수 있다…라고 하는 곳(중)입니까.

 

 다음에 기사는 러일 전쟁의 무렵의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메이지 38년 러일 전쟁 당시 후지사와군이나 이와테현 선출의 고 아베 국회의원등과 함께 만주군위문방들그지로 향해 갔을 시 이미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를 목격하고 지는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한, 12의 예를 들면 내가 거를 탄, 스르트 향하기 때문에 조선의 신사가 부려 온, 신사는 거를 피해 님으로 한, 곳이 거 가게의 놈이 피 모양으로 하는 분에 태와 미를 견돌연 신사에게 돌 맞아 굴려 두어 사등 오히려 산들독설을 소리 질러 기진 켜 떠나려고 하는, 기처로 나 많이 거부를 질책 한 곳이, 거부는 제 한 것으로 나아니차위인 일을 해 주지 않는과 버릇에 사아, 라든지 어떻게든 말해 진고깔때기도 하지 않는 또 혹정거장에서는 철도의 공무원이 무엇을 했는지 조선 노동자를 혹 늘어뜨려 구 때려 청구서양구의 끝에 그들 노동자의 귀중한 도구의 세오이도구를 절기노동자는 비기에 우는 옆에서 경관이 보고 있어 억제해 님과도 하지 않고 알지 않는 얼굴을 해 있던 또 혹시 도상에서 한 명의 일본인이 조선의 풍속으로 부인이 장옷을 감싸 이래의를 갑자기 파악하고 장옷을 걷어 붙여 안을 들여다 본 사일은 그지의 풍습으로서 가장 꺼리는 곳, 어느 쪽은 유부녀이든지, 실로 실례 천만인 행동과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차외 언어 도단이라고 생각되는 수많은출사를 도달하는 곳에서 목격해 장래의 루를 생각하는이라고 나인가에 한심하게 여김에 참아 바구니의 것이 있었다.

 

 기사에 쓰여진 「」란, 이 기사를 쓴 「무라마츠 카메이치로우」입니다.

 「무라마츠 카메이치로우」는, 미야기현 출신의 정치가로, 1925년 중의원 의원(당선 9회, 민정당)에까지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국인용) 의역하면내가 러일 전쟁의 무렵에 일본군을 위문 하기 위한(해) 조선에 건넜을 때로부터 한국인을 멸시 하는 일본인을 보고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예를 들면 내가 탄 인력거가 그것을 피하려고 한 한국인에 태와 부딪쳐 쓰러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차부(인력거를 이끌고 있는 사람)를 꾸짖었는데, 차부는 「이 정도를 하지 않으면 한국인은 모른다」라고 해 발했다.또 철도의 공무원이 한국인 노동자를 후려갈겨 한국인 노동자는 떠맡고 있던 도구를 망가뜨려져 울고 있었지만, 곁에 있던 경관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혹은 한국인의 여성을 돌연 파악하고, 감싸고 있던 베일을 걷어 붙이고 얼굴을 들여다 보는 등 일본인의 실례인 행위가 여기저기에서 봐 받게 되어 부끄러웠다…라고 하는 곳(중)입니까.

 

 당시의 한국인의 여성의 복장이라고 하면, 넷에서는 가슴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저고리가 유명합니다만, 이슬람교도와 같이 얼굴을 베일로 가린 복장도 있군요?마지막 행위는 아마 그것라고 생각합니다.

 뭐, 당시에 한정하지 않고, 혹은 일본인에 한정하지 않고, 자칭 문명인이 야만인에 대한 태도라고 하는 것은 비슷비슷함이라고 생각합니다.당시는 원래 인권이 지금 정도 존중되고 있지 않고, 이 예의 철도의 공무원의 경우는, 한국인 노동자에게 어떠한 죄가 있었다고 하면, 타당한 대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도선 한 것은 물론 병합전이기 때문에 기 후 풍속이나 무언가에 여정변화를 본 것임에 틀림없지만 내지인의 차압괄폭만은 병합 후유오늘에 이르는 것도 교정되지 않고, (그)당시에 총독 정치하의 공무원의 압박 부정을 했다고 하면 선인의 반감도 반드시 무리이지 않고 이번의 폭동 등 확에 그 하나인이 여기에 출발해 있는에 상위 없다.

 

 포인트는 여기입니다.

 무라마츠는, 자신이 조선에 간 것은 일본이 병합 하기 전의 조선이니까, 병합의 뒤의 조선의 상황은 그것과는 대단히 차이가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 변함없기 때문에, 한국인은 일본에 반감을 강하게 하고, 이번 같은 폭동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eva_pachi)가 신경이 쓰이고 있는 것은, 이 포인트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조사해 가는데, 경제 격차의 문제와 민족 차별의 문제섞으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것인가 라고 하는 의문이 나왔습니다.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것은 궁핍한 혹은 그 때문에(위해) 무교양인 여성이었기 때문에인가, 일본인은 아니었으니까인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내가 아는 한, 일반적인 일본의 교육에서는 전쟁 전은 한국인 차별이 있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교과서는 아니고 당시의 신문등의 사료로부터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이 다음의 기사입니다.

 

 병합 후 도로인가 매우 훌륭하게 되었다고 말해 총독부의 공무원은 자랑해 있는 찰 수 있는 모두 점점 취신와 그것은 총독부에서 부역을 명해 인부를 무료 사용해 간 것이다, 또 병합 다음날 아침선인은 매우 행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행복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찰 수 있는 공그들의 풍속이나 습관등을 고치는에 취라고는 점으로 부지불식 고친다면 좋지만 법령 또는 권력으로 강제적으로 개폐 하는 일은 식민지의 통치상기 합당한 것과는 말해질 수 없는, 풍습이나 기 다른 개폐에 의는 그들이 실로 행복을 느껴 있을까 가부는 의문되지 않다.

 

 (한국인용) 의역하면병합 후에 도로가 정비되었다고 해 조선 총독부의 공무원은 그 실적을 자랑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한국인에 부역을 부과해 정비한 것이다.또 병합 후에 한국인은 매우 행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한국인의 풍속이나 습관을 무시하고, 법령이나 권력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서, 한국인이 정말로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의문이다.…그렇다고 하는 곳(중)입니까.

 

 최근,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완수한 역할을 평가하려고 하는 주장을 잘 볼 수 있습니다.나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나, 외형의 근대화가 그대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을 인식할 필요는 있겠지요.

 

 덧붙여 사족이면서 이 신문 기사는 1919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쓰여진 것이어, 또 그 기사가 올바른지 어떤지의 판단은 별로 필요한 것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둡니다.


朝鮮統治問題…1919年6月23日「河北新報」

慰安婦問題が再燃しそうですね。

その関係で調べものをしていたら面白い新聞記事を見つけました。

 

1919年6月23日の「河北新報」の新聞記事です。

 

1919年は日本統治時代の朝鮮で3月1日に「三・一事件」の起きた年です。

韓国では「三一節」として祝日にもなっていますね。

記事はこれに関連したものです。

 

 騒擾事件の発生したる原因は固より種々あるであろう、が日本官憲の横暴圧迫という様な事が其有力なる原因を成した事は、何うも事実であるらしい、実に在朝鮮の官憲の横暴は話の外な相で酷いのになると朝鮮人に臨むに恰も罪人に対するが如く常に圧制至らざる無きのみならず収賄涜職甚だしきは金品を強奪し婦女を辱むるというような言うに忍びざる悪業を積むだとさえ伝うるものもある勿論斯ういう事は稀に起る事であっても、それが誇大に吹聴せられ朝鮮人に対して日本の官憲は斯くの如く悪辣なものだという観念を与うる事は、慥に排日思想を誘発する動機たるに相違無い、夫れに役人許りでは無く一般内地人も亦常に軽侮の念を以て彼等に接し之亦横暴至らざる無き有様なので永い間鬱積した彼等の反感の一方ならざる事が容易に想像されよう。

 

 記事に書かれた「騒擾事件」とは「三・一事件」のことです。

 (韓国人用)意訳しますと…「三・一事件」の原因は日本官憲の横暴や圧迫が原因らしい。朝鮮人を罪人のように扱い金品を要求したり婦女を辱めたりする役人もいると伝え聞く。このような酷い仕打ちはめったにないが、その話が誇大に広まって、朝鮮人の反日意識を造成しているのは間違いない。役人だけでなく一般人にも朝鮮人を軽蔑して横暴な態度をとる者がいるため、朝鮮人の反感が高まっていると想像できる…というところでしょうか。

 

 次に記事は日露戦争の頃の日本人の朝鮮人に対する態度について言及しています。

 

 我輩は明治三十八年日露戦争当時藤沢君や岩手県選出の故阿部代議士等と共に満洲軍慰問旁々彼地に赴いた時既に日本人の朝鮮人に対する態度を目撃して之は困った事だと思った、一二の例を挙げると我輩が俥に乗った、スルト向うから朝鮮の紳士が遣って来た、紳士は俥を避け様とした、所が俥屋の奴が避様とする方へ態と梶を遣突然紳士に突当って転がして置き乍ら却って散々毒口を叫いて其儘挽いて去ろうとする、其処で我輩大いに俥夫を叱責した所が、俥夫は済したものでナアニ此位な事をして遣らぬと癖になりまサア、とか何とか云って振顧ろうともしない又或停車場では鉄道の役人が何をしたか朝鮮労働者を酷たらしく殴り付け揚句の果てに彼等労働者の貴重なる道具の背負具を折棄た労働者は悲気に泣く傍で警官が見て居て制し様ともせず知らぬ顔をして居た又或時途上で一人の日本人が朝鮮の風俗で婦人が被衣を被って来のを突如捉えて被衣を捲り中を覗いた斯る事は彼地の風習として最も忌む処、何れは人妻であろうが、実に失敬千万な振舞と云わねばならぬ、此外言語道断と思われる数々の出事を到る処で目撃し将来の累を思うて私かに寒心に堪えざるものがあった。

 

 記事に書かれた「我輩」とは、この記事を書いた「村松亀一郎」のことです。

 「村松亀一郎」は、宮城県出身の政治家で、1925年衆議院議員(当選9回、民政党)にまでなった人だそうです。

 

 (韓国人用)意訳しますと私が日露戦争のころに日本軍を慰問するため朝鮮に渡ったときから朝鮮人を蔑視する日本人を見て困ったことだと思っていた。例えば私の乗った人力車がそれを避けようとした朝鮮人に態とぶつかり転ばせたため、私が車夫(人力車を引っ張っている人)を叱ったところ、車夫は「これくらいのことをしないと朝鮮人には分からない」と言い放った。また鉄道の役人が朝鮮人労働者を殴りつけ、朝鮮人労働者は背負っていた道具を壊されて泣いていたが、そばにいた警官は何も言わなかった。あるいは朝鮮人の女性を突然捉えて、被っていたベールを捲りあげて顔を覗くなど日本人の失礼な行為があちらこちらで見うけられて恥ずかしかった…というところでしょうか。

 

 当時の朝鮮人の女性の服装というと、ネットでは胸を露わにしたチョゴリが有名ですが、イスラム教徒のように顔をベールで覆った服装もありますよね?最後の行為はたぶんそれのことだと思います。

 まあ、当時に限らず、あるいは日本人に限らず、自称文明人が野蛮人に対する態度というのは似たり寄ったりだと思います。当時はそもそも人権が今ほど尊重されていませんし、この例の鉄道の役人の場合は、朝鮮人労働者に何らかの非があったとしたら、妥当な対応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我輩が渡鮮したのは勿論併合前であるから其後風俗や何かに余程変化を見たに違いないが内地人の此圧刮暴慢は併合後猶今日に至るも矯正されず、其の上に総督政治下の役人の圧迫不正が行われたとすれば鮮人の反感も強ち無理では無いで此度の暴動など確に其一因が此処に発して居るに相違ない。

 

 ポイントはここです。

 村松は、自分が朝鮮に行ったのは日本が併合する前の朝鮮だから、併合の後の朝鮮の状況はそれとはずいぶん違っているはずだと言っています。しかし、日本人の朝鮮人に対する態度が以前と変わっていないから、朝鮮人は日本に反感を強めて、今回のような暴動が起きたのではないか、と主張しています。

 

 今、私(eva_pachi)が気になっているのは、このポイントです。

 慰安婦問題を調べていくうえで、経済格差の問題と民族差別の問題がごちゃまぜにな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疑問が出てきました。過酷な労働を強いられたのは貧しいあるいはそのために無教養な女性だったからなのか、日本人ではなかったからなのか調べています。

 ちなみに、私が知る限り、一般的な日本の教育では戦前は朝鮮人差別があったと教えられています。私もそう考えていますが、現在の教科書ではなく当時の新聞などの史料からそれを確認したいと思って調べています。

 

 そして面白いのが次の記事です。

 

 併合後道路か非常に立派になったと云って総督府の役人は誇って居るけれ共段々取訊すとそれは総督府で賦役を命じ人夫を只使って行ったものだ、又併合後朝鮮人は非常に幸福になったという、無論幸福になったに違い無い。けれ共彼等の風俗や習慣等を改めるに就ては漸を以て不知不識改めるならいいが法令又は権力を以て強制的に改廃する事は植民地の統治上其当を得たものとは云われぬ、風習や其他の改廃に依って彼等が真に幸福を感じて居るか否やは疑問とせぬばならぬ。

 

 (韓国人用)意訳しますと併合後に道路が整備されたと言って朝鮮総督府の役人はその業績を誇ってはいるが、それは朝鮮人に賦役を課して整備したものである。また併合後に朝鮮人はとても幸福になったというが、それまでの朝鮮人の風俗や習慣を無視して、法令や権力によって強制的に変えさせることによって、朝鮮人が本当に幸福を感じているか疑問である。…というところでしょうか。

 

 最近、日本が朝鮮の近代化に果たした役割を評価しようとする主張がよく見られます。私もそれを否定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見た目の近代化がそのまま幸福というわけでもないことを認識する必要はあるでしょう。

 

 なお、蛇足ながらこの新聞記事は1919年当時の状況について書かれたものであり、またその記事が正しいかどうかの判断は別に必要であることを最後に付け加えてお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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