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위 역사적 사실은 단순하게 참고中 부분적인 내용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패전에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의 사건입니다. 참고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sumatera // 임진왜란에 관심이 많은거 같아서 자료 올려드립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패전 요인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밑에 기술된 내용은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일본의 패전 요인中  하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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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싸운 일본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대륙정복의 야심에 일본군 모두가 동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침략 전부터 일본군의 투항 가능성은 충분히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임
 
진왜란 기간동안 조선에 귀화한 항왜자들의 숫자는 얼마나 됐을까? 전쟁 발발 5년후인, 선
 
조 30년 실록기록 중 일본의 병사가 조선군에게 한 말을 기록한 내용을 보자.
 
 

일본에서 꺼리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 왜인들은 반드시 우리 일본의 용병술(用兵術)을 모두 털어놓았을 것이다. 조선에서 산성을 쌓고 있는 것도 역시 이 왜인들의 지휘일 것이다. - 선조실록 30년 5월 18일

 

이 대목에서, 일본이 항왜에 대해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때까지 항왜 숫자가 벌써 만 여명에 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 여명, 이건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1차 임진왜란의 총 병사는 158,700명) 마지못해 잡힌 전쟁포로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일본 진영에서 도망쳐 한국인이 되겠다고 한 병사들이 만 여명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사야가 金忠善처럼 히데요시의 반대세력이었을까? 그런데 항왜자 대부분이  일반 병사들이었다. 어떻게 만 여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귀순을 결심했을까?
 
 
조선왕조 선조실록의 본격적인 항왜에 대한 기록은 전쟁 발발 1년 후인 1593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 전쟁이 일어난 1년 후부터 항왜자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일까?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 임진왜란기에 항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임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5월경이다. 이 때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명과 일본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때다.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갔던 일본군은 채 1년이 되기 전에, 조선과 명나라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오랜 전투로, 일본의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조명연합군에 밀리는 심리적 압박감과 식량부족으로 인한 배고픔은,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 넣었다.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패전 후 남하해서 서생포(울산)에 성을 쌓고 장기간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에 지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들은 하나 둘 성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군 진영을 향해 달렸다. 서생포 왜성을 비롯해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아나 투항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왜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난다.
 

한문종 교수 :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 하층 병사들의 일본 내에서의 차별대우에 불만이 많이 있었고, 그런 것에 비해 우리 측은 그런 부분에 대해 후대한다고 할까... 그리고 우리 나라의 문화적인 습성이라든 가에 감화되는 그런 속성이 있었기 때문에, 투항을 해 온 것이다.

 
일본 병사들이 투항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조선정부의 적극적인 항왜 유인 정책이었다. 선조는 항왜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유인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그리고 검술이 뛰어나거나 병기를 만들 수 있는 병사들을 꾀어내는 자에게 상을 내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항왜(降倭)를 꾀어내는 일을 전교하셨습니다. 항왜를 잘 어루만져 기꺼이 우리의 쓰임이 되게 하면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이제 전교에 의해 다시 다방면으로 꾀어내게 하겠습니다. - 선조실록 28년 6월 13일
 
 
 
 
경상도 우병사였던 김응서(金應瑞) 장군(그림)은 전쟁 초부터 항왜를 적극 수용했다. 그의 부하 중 항왜의 수가 천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사야가 金忠善 역시 투항 후, 김응서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전투에 참가했었다.
 
 
 
투항자들은 비단, 병사들뿐만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우마저, 투항을 생각했다. 최고위급의 장수들까지 투항을 깊이 고려했거나 혹은 실제 투항 했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이 말하기를, 난처한 일이 있으면 우리들도 투항해 가려 하는데 조선의 나라에서 또한 후대해 줄지 모르겠다. - 선조실록 28년 2월 10일
 
한문종 교수 : 그들의 경우는 아마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이 명분이 없고 무모한 전쟁이다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조선에 투항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야가 金忠善도 일본의 조선침략이 명분이 없는 전쟁이다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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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입니다. 재밌지요? 임진왜란中 여러 격전이 있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도 있네요. 투항한 왜인들은 잘못이 없지요. 실제로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서는 명분없는 전쟁이라고 반대가 많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안한 정권을 전쟁을 통해 시선을 돌리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반세력이 늘어났고, 결국에는 전쟁 中에 많은 항왜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이순신 장군에 의해 수군이 대패하고, 지상 전투에서 마저 점점 패전이 늘어 나는 상황이 초래되어, 결국 패전한 것이지요.
  어쩌면 일본은 처음부터, 준비 안된 전쟁이었던것 같습니다.
 
 조선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임진 왜란 직전에서 조선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명과 우호 관계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전쟁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조선군은 그 숫자가 상당히 많이 줄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세월이 갈수록 더욱 문관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무관이 대우 받지 못했지요. 또한 전통적으로 학문을 중시하는 사상이 많아서 장군들도 학문이 높았다 하지요. 하지만 문관중심 사회와, 오랜 전쟁을 하지 않아서 군사력이 약해지는 단점을 만들어 버립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군사수가 상당히 높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전쟁을 하지 않아서 점점 군사의 숫자가 줄어 드는 추세 였다.) 결국 이런 조선의 사정을 비판하고 임진왜란을 예견하며,율곡 이이(李珥)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을 주장하고 개혁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묵살(默殺) 하였습니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초기에 조선은 크게 패퇴합니다.  즉, 당시의 임진왜란 이전에 개혁안을 봐도 얼마나 조선의 군사수가 줄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수적으로 불리한 전쟁에서, 다행스럽게도 반 히데요시 세력들이 투항하고 조선군에 합류 함으로써, 많은 도움이 됐을거라 봅니다.
또한 중반기 접어들면서 조선에서 많은 농민 의병이 일어났고, 명나라 군사의 지원을 받으며 점차 조선이 유리한 상황이 된거 같습니다.


壬辰の乱// 倭国の敗戦要因中

 上の歴史的事実は単純に参照中 部分的な内容です. 実際に壬辰の乱敗戦には多くの要因がいます. なかでも一つの事件です. 参照で見てください.

sumatera // 壬辰の乱に関心が高いようで資料あげます.

 壬辰の乱当時日本の敗戦要因はさまざまが複合的に作用したことだから下に記述された内容は堪えることだけしてなさってください. 日本の敗戦要因中  一つであるだ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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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と戦った日本軍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大陸征服の野心に日本軍皆が同調したのではなかった.
 
そうだから朝鮮侵略の前から日本軍の投降可能性は充分に敷かれていた. それなら林
 
濃い倭乱期間中朝鮮に帰化したハングウェザドルの数字はどの位だったろうか? 戦争勃発 5年後の, 線
 
組 30年実録記録の中で日本の兵士が朝鮮軍に言った言葉を記録した内容を見よう.
 
 

日本で憚る点は降伏した倭人だ. その数字がもう万人に至るのに, この倭人たちは必ず私たち日本の用兵術(用兵術)を皆打ち明けたはずだ. 朝鮮で酸性を積んでいることもやっぱりこの倭人たちの指揮であるでしょう. - 先祖実録 30年 5月 18日

 

が書き入れ時で, 日本がハングウェに対してよほど悩んで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る. 同時にその時までハングウェ数字がもう万名余にこういったという事実が分かる. 万名余, これは 実におびただしい数字に違いない. (1次壬辰の乱のすべて兵士は 158,700人) やむを得ずつかまった戦争虜島ではなくて, 本人自らの意志で日本陣営で逃げて朝鮮人になると言った兵士らが万名余というのだ. 皆がサヤが 金忠善のように秀吉の反対勢力だったろうか? ところでハングウェザ大部分が  一般兵士らだった. どうに黎明もなる兵士らが帰順を決心しただろうか?
 
 
朝鮮王朝先祖実録の本格的な ハングウェに対する記録は 戦争勃発 1年後の 1593年から現われ始める. なぜ, 戦争が起こった 1年後からハングウェザドルが急に 増えたことだろう?
 

漢文種 (全北大史学科) 教授 : 壬辰の乱期にハングウェが本格的に現われた時期は壬乱勃発 1年後の 1593年 5月頃だ. この焚く戦争が小康状態に陷りながら名菓日本間の強化交渉が進行された時だ.

 
破竹の勢いで平壌城まで押して上がった日本軍はまだ 1年になる前に, 朝鮮と明君に滞って南に後退するようになって戦争は長期戦に突入した. 長年の戦闘で, 日本の兵士らはくたびれるとおりくたびれた. 照明連合軍に滞る心理的圧迫感と食糧不足によるひもじさは, 彼らを苦痛の中に追いこんだ.
 
1593年, 加藤紀要マーサの軍隊も敗戦後南下して西生け捕り(蔚山)に城を積んで長期間駐屯していた. 戦争にくたびれてひもじさを勝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加藤紀要マーサの兵士らは一つ二つ 性をすり抜けて来始めた. そして, 彼らは朝鮮軍陣営を向けて走った. 西生け捕りわい星を含めて南海岸一帯に駐屯していた兵士らが逃げて投降する仕事が頻繁になった. 以後, 戦争が終わるまでハングウェの数字は急激に増える.
 

漢文種教授 : 直接的な原因は当時日本軍兵士ら, 下層兵士らの日本内での分け隔てに不満がたくさんあったし, そんなことに比べて私たち側はそんな部分に対して後代すると言うか... そして我が国の文化的なスブソングイラでも街に感化されるそんな速成があったから, 投降をして来たのだ.

 
日本兵士らが投降を決心した決定的な理由は朝鮮政府の積極的なハングウェ誘引政策だった. 先祖はハングウェが利用価値があると判断して, 彼らを誘引しなさいという全校を下げる. そして剣術がすぐれるとか兵器を作ることができる兵士らを誘い出す者に上を下げた.
 
備辺司が申し上げるのを, ハングウェ(降倭)を誘い出す事を全校なさいました. ハングウェをよく撫でて喜んで私たちの使いになるようにすれば助けされる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 (中略) これから全校によってまた多方面で誘い出すようにします. - 先祖実録 28年 6月 13日
 
 
 
 
慶尚道ウビョングサだった ギムウングで(金応瑞) 将軍(絵)は戦争超からハングウェを積極収容した. 彼の部下の中でハングウェの数価千余人に達するほどだった. サヤが 金忠善 も投降後, ギムウングで将軍の荷受に入って行って戦闘に参加した.
 
 
 
投降者たちは絹, 兵士らだけではなかった. 秀吉の第1群急先ぽう小西ユキナがの弟さえ, 投降を思った. 最高位級の長寿たちまで投降を深く考慮したとかあるいは実際投降したのだ.
 
小西ユキナがの弟(妹)が言うのを, 困った事があれば私たちも投降して行こうと思うのに朝鮮の国でまた後代してくれるかも知れない. - 先祖実録 28年 2月 10日
 
漢文種教授 : 彼らの場合は多分壬辰の乱だと言う戦争が名分がなくて無謀な戦争だという考えをすることで, 朝鮮に投降したことと思う. サヤが 金忠善も日本の朝鮮侵略が名分がない戦争だということを端的に現わす一つの事例だと見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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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上です.. おもしろいでしょう? 壬辰の乱中 多くの激戦があるが, こんな歴史的事実もありますね. 投降した倭人たちは過ちがないですね. 実際に壬辰の乱直前に日本では名分ない戦争だと反対が多かったです. 豊臣秀吉が心細い政権を戦争を通じて視線を回す目的もあったと言います. しかしむしろ半世力が増えたし, 結局には戦争 中に多いハングウェドルが増える結果をもたらします.  そんな状況で戦争が長期化されながら, 李舜臣将軍によって水軍が大敗して, 地上戦闘で全部ますます敗戦の増える状況が招来されて, 結局敗戦したのですね.
  もしかしたら日本ははじめから, 準備だめな戦争だったようです.
 
 朝鮮も戦争に備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同じです.
壬辰倭乱直前で朝鮮は朝鮮建国初期から名菓友好関係だから長年の歳月戦争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 それで朝鮮軍はその数字が非常に多く減っていたと記録されています. また歳月がたつほどもっと文官中心社会だから無関が待遇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 また伝統的に学問を重視する思想が多くて将軍たちも学問が高かったしますね. しかし文官中心社会と, 長年の戦争をしなくて軍事力が弱くなる短所を作ってしまいます.
 
 (朝鮮建国初期には軍事数がよほど高かったが, 歳月がたつほど戦争をしなくてますます軍事の数字が減る成り行きであった.) 結局こんな朝鮮の監査を批判して壬辰の乱を見越して,栗谷李イ(李珥) 十万佯病説(十万養兵設)を主張して改革案を提示します. しかし調整でその意見を黙殺(黙殺) しました. 結局壬辰の乱が起きて, 初期に朝鮮は大きく敗退します.  すなわち, 当時の壬辰の乱以前に改革案を見てもいくら朝鮮の軍事数が減っているのか分かります.
 
 そんな手迹に不利な戦争で, 幸いにも反秀吉勢力たちが投降して朝鮮軍に合流することで, 多くの助けがドエッウルゴだと見ます.
も中盤期入りながら朝鮮で多くの農民義兵が起きたし, 明軍事の支援をもらって徐徐に朝鮮の有利な状況になった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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