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6년 鴻山 전투에서 崔瑩에게 대패한 倭軍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380년 8월에는 鎭浦:錦江入口에 500여 척의 艦船과 1萬 人의 병력을 이끌고 침입,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道의 연안 지방을 약탈 ,살육하였다.
이때 원수 羅世 崔茂宣 등이 火砲로써 倭船을 격파, 전부 燒却해버렸다
퇴로를 잃은 倭寇는 내륙 지방에 침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李成桂를 楊廣 全羅 慶尙都巡察使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 책임을 맡게 하였다. 倭寇는 咸陽 雲峰 등의 險地에 陣地를 構築하였기 때문에,
李成桂는 여러 將帥를 거느리고 남원(南原)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荒山 北西쪽에 도착했을 때 倭寇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倭寇는 山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李成桂는 苦戰을 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倭寇를 擊滅하였다.
崔瑩의 鴻山大捷과 더불어 倭寇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것을 계기로 倭寇의 跋扈가 쇠퇴하였다.
고려시대 한반도 내륙 깊숙히까지 침입을 하여 고려의 정규군을 괴롭혔던
일본인의 정체와 그 기원에 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계에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에 대한 또다른 견해는 南北朝 시대의 南朝의 주축이었던
少貳賴尙가 일본인의 주체라는 학설입니다
1350년 일본의 국내 정세는 南朝와 北朝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이때 足利直冬의 공격을 받은 少貳賴尙 측이 兵糧米 확보라는 목적을 위해
고려를 침략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庚寅年 이후 큐슈 지방에서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일본인의 침략 역시
격심해진 것과 南北朝의 내란이 종식되었을 당시 일본인가 激減해가는 점을 보면
兵糧米 조달이 일본인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14세기 일본인는 南朝의 정규군이었고,
고려의 내륙까지 침범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집단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1376年 鴻山 戦闘で 崔瑩に大敗した 倭軍が 1378年 5月智異山方面でまた侵入したし,
380年 8月には 鎭浦:錦江入口に 500余尺の 艦船と 1万 人の兵力を導いて侵入,
忠清道,全羅道,慶尚道 3道の沿岸地方を掠奪 ,殺戮した.
この時元首 羅世 崔茂宣 などが 火砲として 倭船を撃破, 全部 焼却してしまった
退路を失った 倭寇は内陸地方に侵入をしてその被害が甚だしかった.
調整ではこれを討伐するために 李成桂を 楊広 全羅 慶尚都巡察使で任命,
が地方の防衛責任を引き受けるようにした. 倭寇は 咸陽 雲峰 などの 険地に 陣地を 構築したから,
李成桂は多くの 将帥を従えて南原(南原)からべ・クックリョム(〓克廉) などと合流,
各部署を整備した後雲峰を越して 荒山 北西の方に到着した時 倭寇と衝突するようになった.
この時 倭寇は 山を頼って有利な位置にあったので 李成桂は 苦戦をしたが,
危険を冒して部下将兵を励まして 倭寇を 撃滅した.
崔瑩の 鴻山大捷とともに 倭寇 撃破で一番得意するに値するけんかであり,
これをきっかけで 倭寇の 跋扈が衰退した.
高麗時代韓半島内陸深くまで侵入をして高麗の正規軍を苦しめた
倭寇の正体とその祈願については今日大部分の歴史学界でも
解けない疑問で残っています.
と関して倭寇に対するもう一つの見解は 南北朝 時代の 南朝の主軸だった
少弍頼尚が倭寇の主体という学説です
1350年日本の国内情勢は 南朝と 北朝 の間の対立が激化されていたが.
この時 足利直冬の攻撃を受けた 少弍頼尚 側が 兵糧米 確保という目的のために
高麗を侵略した可能性があります.
庚寅年 以後九州地方で軍事的衝突が激化されながら倭寇の侵略やっぱり
激甚になったことと 南北朝の内乱が終熄された当時倭寇が 激減して行く占えば
兵糧米 調逹が倭寇の主な目的中の一つだったと推正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のように思えば 14世紀倭寇は 南朝の正規軍だったし,
高麗の内陸まで侵犯するほどに力強い軍事力を持った集団という説明が可能にな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