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우선 오키나와는 17세기 초까지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류큐(琉球)’라는 국명을 가지고 중국과 대만,조선과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독립된 왕국이었습니다.당시의 중국 왕조인 명 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했고 명 나라의 신하(臣下)나라로서 조공을 바치던 나라,그래서 일본보다는 중국에 가까운 섬 나라였습니다. 이후 경제적,정치적인 속국으로 근근히 왕조를 이어가던 ‘류큐국’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아예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돼 멸망합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힘없는 작은 섬나라로서 겪을 수 있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로 태평양 전쟁,그 중 가장 치열했다는 이른바 ‘철(鐵)의 폭풍’ 오키나와 전투(1945년 3월~6월)입니다. ‘일본 영토 내’에서 일어난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최초이자 최후의 유일한 지상전인 오키나와전에서,오키나와 주민은 공식적인 통계로만 10만 명이 죽습니다.이는 미군(1만)과 일본군 전사자(8만)를 합친 수보다 많은 규모이며,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됩니다.오키나와 섬에서 배로 강제로 이동되다가 폭격을 맞고 숨진 주민 등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5만 명에 달해 전체 현(縣)민의 3분이 1이 넘는다고 합니다.그래서 지금도 오키나와 대부분 가정의 기일(忌日)은 4월부터 6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고 합니다

 

이런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도 엄청나지만,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희생이 커진 이유와 내용입니다. 미군과의 전투보다는 “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찮다”는 일본군 수뇌부의 전략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당시 오키나와 방위 부대인 일본제국 제 32군의 사명은 주민의 안전과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본토,더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こくたいごじ)’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오키나와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군관민 공생공사(共生共死)’라는 미명 하에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전 주민을 강제 부역에 동원함은 물론,수비대인 32군 부대의 3분의 1 가량을 오키나와 주민 의용대로 급히 징집했습니다.그러다 보니 사진처럼 어린 소년이나 70대 노인까지 마구잡이로 군대에 끌려 갔습니다. 그럼에도 32군의 병력은 11만,당시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전투병만 18만에 달하고 해군과 지원부대까지 포함하면 54만이나 됐던 미군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적이 ‘승리’가 아니었던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폭탄을 안고 미군의 탱크로 뛰어들게 하는 등 민간인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버팁니다. 당시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버리는 돌’에 불과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광기와 공포에 휩싸인 일본군은 주민들을 미군의 스파이로 몰아 학살하거나,총칼로 위협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합니다. 이른바 ‘집단자결’,아니 사실상 집단 학살입니다.그래서 오키나와 주민 수천여명이 동굴 안에서 일본군이 건네준 수류탄을 터트리거나 농약 같은 극약을 먹고 죽습니다. 더 비극적인 상황은 이런 방법마저 물품 부족으로 여의치 않으면,가족과 친구끼리 맨손 또는 흉기-칼이나 몽둥이,농기 등-를 써서 서로의 생명을 빼앗았던 일입니다.부모가 아이를,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아비규환 같은 처참한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의 상황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이른바 ‘치비치리 가마 사건’-가마는 오키나와말로 천연 동굴-의 경우 생존자 55명 중 20명이 자신의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 어머니라고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잘 안 되자,차라리 미군에게 맞아 죽겠다고 동굴 밖으로 나왔는데 살아남은 것이죠. 또 한 오키나와 노인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식들과 부인을 교살(絞殺)하고 자신도 죽으려다 실패해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말 그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절절히 느껴지더군요. 생존자들은 당시 일본군이 위협하며 자결을 강요한데다,미군에게 잡히면 탱크 밑에 깔리는 식의 더 처참한 죽음-실제는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당할 것이라고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었다고 합니다.“일본군에게 죽거나,미군에게 죽거나,아니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밖에 없어 자결을 선택했다”고 당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일본군은 주민의 죽음을 강요했을까요?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바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과 불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일본군 수뇌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국가 충성도가 너무 약해, 미군의 포로로 잡히면 군사 기밀을 누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특히 당시 주민 대부분이 군 비행장과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탓에,군사시설의 위치를 알고 있어 불안해 했다고 합니다.어떤 기록에는 군 식량을 축 내지 말고 죽으라고 명령했다고까지 합니다. 결국 필요할 때는 충성과 희생을 요구했지만,실제로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 국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끝내는 죽음까지 강요한 것이죠.일본군의 잔학성과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입니다.   

무수한 희생자를 낸 오키나와전이 끝나고 두 달도 안 돼,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오키나와는 그러나 일본으로 되돌아 가지 못합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이민족 국가’로 규정하고 미 군정 하에 편입시킨 것입니다.이는 명목상일 뿐 실제로는 오키나와가 가진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당시 미 태평양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중국을 견제하는 ‘천연 방어진’이라고 부른 것에서 보듯이,오키나와는 미국 입장에서는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그리고 당시 천황제 유지가 절대절명의 당면 과제였던 일본 입장에서도 오키나와를 챙길 만한 여유는 없었습니다.이후 6.25전쟁과 중국의 공산화로 오키나와의 중요성은 더 커졌고,미국은 오키나와에 군사력을 증강시킵니다.

 

점령 이후 27년간 미군 통치를 받던 오키나와는 지난 1972년에야 다시 일본으로 ‘복귀’합니다.미국이 물론 순순히 내놓은 것은 아닙니다.1960년대부터 주민들이 시위와 폭동 같은 거센 ‘일본 복귀운동’을 벌인데다,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가 변하면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덕분입니다.당시 베트남 전 등으로 미국은 기세가 한 풀 꺾인 데다,경제력이 커진 일본의 발언권도 세지면서 ‘오키나와 반환’협의가 가능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죠.그래서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의 땅을 돈으로 사는 기이한 형태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되찾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질곡의 역사는 ‘일본 복귀’로 끝나지 않습니다.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모순은 크게 두 가지,계속되는 일본 본토와의 차별과 역사왜곡의 문제입니다.앞서 오키나와전에 나타난 것처럼 뿌리깊은 차별의식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든 면에서 오키나와를 ‘일본의 변방’에 머물게 하고 있습니다.또 끈질긴 역사왜곡은 정신적인 면에서 젊은 세대들의 정체성(identity)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군 포로가 된 오키나와인...아이부터 노인까지 마구잡이 징집>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오키나와 여고생들...히메유리 기념관>

 

<태평양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당시 일제 포스터>

 

 <오키나와 출신 슈퍼스타 아무로 나미에>  

 

이렇게 ‘민족도 다르고 가난한 오키나와인’이다 보니 사회적 차별도 큽니다.특히 취직이나 결혼 등에서 유무형의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스포츠와 연예계로 진출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게 많은데,지난 90년대 일본 슈퍼스타중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아무로 나미에를 필두로 영화 ’링’과 드라마 ‘고쿠센’으로 유명한 나카마 유키에,영화 ’스윙걸스’의 마에하라 에리,그룹 스피도와 오렌지 레인지 등 수많은 가수와 탤런트,모델 등이 오키나와 출신입니다. 원래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민족인데다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모여있는 이국적인 외모가 유리하다는 속설도 있고,걸출한 연예인 사관 학교인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의 영향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취업에 제한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또 다른 오키나와의 모순은 역사왜곡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집단 자결’에 대한 끊임없는 교과서 왜곡 시도입니다.증인들이 살아있고 관련 미군 기록도 남아 있지만,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은 공식적인 ‘일본군 문서 기록’이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당시 일본군 방위부대가 궤멸됐고,군 문서도 다 소각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지논리를 피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 자결’문제가 교과서에 처음 실린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지 10년이 경과된 지난 82년이라고 합니다.일본 문부성이 이 부분만은 교과서에서 빼고 싶었지만,오키나와 주민들의 요구가 워낙 거세 마지못해 실었다고 합니다. 문부성은 그러나 가해의 주체인 ‘일본군’은 뺀 채 ‘집단적인 자살이 있었다’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얼버무립니다.이에 주민들은 “오키나와전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며 집단소송을 벌였고,지난 88년에 승소합니다.문구 하나 바로 잡는데 6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일본 문부성은 또 다시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일본군 강제’라는 표현을 전면 삭제하라고 수정지침을 내립니다.문부성은 갑자기 지침을 내린 이유로 이른바 ‘오에 겐자부로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들었지만,사실은 일본 우익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11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며 거세게 반발하자 ‘일본군 관여’로 문구를 수정하기는 했습니다만,직접적인 명령을 나타내는 ‘일본군 강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소송’은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를 상대로 오키나와전 당시 일본 주둔군의 장교와 유가족이 지난 2005년 출판금지 청구소송을 건 사건을 말합니다.원고측은 오키나와전의 참상을 그린 겐자부로의 논픽션 <오키나와 노트>가 일본군이 집단자결을 강요한 것처럼 묘사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심 결과가 지난달 말에 나왔는데,일본 오사카 지법은 “일본군이 깊이 관여했다는 합리적인 증거가 있다”며 오에 겐자부로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습니다.현재 원고인 전 일본군 장교측은 법원의 결정에 반발해 항소한 상태이며,최종심까지 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이 소송은 종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최근 일본 우익의 조직적인 ‘역사 왜곡’ 움직임을 대표하는 사건으로,일본 내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오키나와전을 왜곡하려고 하는 우익의 준동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가장 상징적인 것이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자료관에 전시된 일본군 마네킹의 모습입니다.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 안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사진에서 보듯 일본군이 마치 주민을 보호하는 인상을 주도록 ‘왜곡’된 것입니다. 우는 갓난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어머니의 절박한 모습과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본군의 모습이 모순되고 기이한 느낌을 줍니다.자료관 건립 초기에는 주민들의 증언대로 일본군의 총부리가 주민들을 향하고 있었지만,건립도중 우익성향을 가진 지사가 당선된 뒤 모습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학도병으로 오키나와전에 동원됐다 숨진 130여명의 여고생,이른바 ‘히메유리 학도병’에 관한 이미지 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진난만한 여고생들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휩쓸려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을 일본 우익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아니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식의 이른바 ‘순국미담(殉國美談)’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은 히메유리를 소재로 일본 본토에서 만들어진 상당수의 소설과 영화에도 투영돼 있는데,미군의 항복 권유를 ‘의연히’ 거부하고 비장하게 절벽으로 일제히 몸을 던져 산화했다는 식입니다.그래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이런 ‘기대감’으로 오키나와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정부와 우익의 오키나와전 왜곡 음모에 맞선 오키나와 주민의 반발과 저항은 필사적입니다.역사왜곡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고,또 무엇보다 ‘정신적인 뿌리’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키나와의 젊은 세대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또는 영화의 내용이 부모의 말과 달라 정체성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이를 줄이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평화기념 공원과 히메유리 기념관의 전시물 내용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집단적인 반발과 싸움 덕분이라고 합니다.관이 주도한 평화기념관의 경우 개관초기에는 일본군의 기록으로 가득 차는 등 마치 ‘전쟁 기념관’처럼 꾸며졌다고 합니다.그러나  주민들의 강한 요구로,지금은 상당수 전쟁의 참상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쪽으로 뜯어 고쳐진 것이라고 합니다. 히메유리 기념관도 이 덕분에 죽음을 미화화지 않고,일제의 무차별적인 주민 동원이 희생의 원인임을 알 수 있게 구성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히메유리’ 생존자 할머니들이 “너무 살고 싶었지만,일본군이 죽음을 강요했다”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리려 증언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그래서 이곳에서 영화나 소설의 이미지와 다른 히메유리의 실상을 접하고 혼란을 받는 일본인 관광객도 적지 않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텐노(天皇),즉 일왕에 대한 인식도 본토와 사뭇 다릅니다.역사가 다른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키나와전 당시 가해자의 정점에 일왕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지난 1975년 기념관 건립을 축하하러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지금의 텐노)에 대해 오키나와 청년 2명이 화염병을 투척한 사건이나,지난 1990년대 텐노가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끝내 ‘기미가요(君が代:텐노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텐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책임자이기 때문에,그를 존중하거나 찬양하는 것 자체가 고향 오키나와에 대한 모독이라는 인식에서 개인적인 저항을 벌인 것입니다.이외에도 일장기인 ‘히노마루’를 불태우거나 하수구에 처박는 등 일본의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오키나와입니다.

 

오키나와를 돌아다니고 자료를 찾으면서,우리의 아픈 식민지 역사가 계속 겹쳐졌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만행과 전쟁동원으로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고통을 겪은 현장에서는 울분이 느껴졌습니다.그럼에도 사과와 보상은커녕 지금도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과 날조로 계속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는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또 재일교포와 더불어 일본사회에서 여전히 차별과 굴욕을 당하고 있다는 설명에서는 동병상련의 정도 느꼈습니다.오키나와 평화 기념 공원의 자료관은 우리의 독립기념관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히메유리 기념관의 여고생 학도병 사진에서는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실제 오키나와는 그 자체로도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전쟁 막바지에 우리 할아버지 세대 만 여명이 일제에 강제로 징용돼 군사시설 공사장 또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할머니 세대는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와 백 곳이 넘는 군 ‘위안소’에 수용됐다고 합니다. 당시의 비참한 생활과 죽음에 대한 기록과 증언은 아직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 있는데,그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끔찍한 몸서리가 쳐지고 분통이 터집니다.”영양 실조(징용)와 성병(위안부)으로 죽은 조선사람이 많았다”고 하니,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오키나와를 바라보는 시각은 참 다양합니다. 일본인에게,오키나와인에게,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입니다.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오키나와는 하와이나 사이판 같은 이색적인 휴양지입니다.반면 일본 우익에게 오키나와는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성전(聖戰)’의 순례지이고,반전 시민단체에게는 전쟁의 교훈을 새길 수 있는 거대한 체험관으로 여겨집니다.편차의 정도는 다르지만,오키나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당수 오키나와인이 처절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반면,어떤 오키나와인은 이제 그런 과거사는 적당히 묻어두고 현실과 타협해 ‘진정한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日本自国民虐殺と沖繩

まず沖繩は 17世紀初まで日本ではなかったです. ‘琉球(琉球)’という国名を持って中国と台湾,朝鮮と日本本土を連結する中継貿易に盛んだった独立された王国でした.当時の中国王朝である人国と貿易を活発にさせたし人国の臣下(臣下)国として朝貢を捧げた国,それで日本よりは中国に近い島国でした. 以後経済的,政治的な属国でグングンヒ王朝を引き続いた ‘琉球国’は 19世紀後半明治(明治) 時代には初めから日本の沖繩県で強制編入されて滅亡します.

 

ここまではもしかしたら力無い小さな島国として経験することができる歴史と言えるかも知れないです.しかし本当に手におえにくい悲劇の歴史が始まります. まさに太平さん戦争,その中一番熾烈だったといういわゆる ‘物心(鉄)の暴風’ 沖繩戦闘(1945年 3月‾6月)です. ‘日本領土内’で起きた米軍と日本軍の間の最初と同時に最後の唯一の地上戦である沖繩前で,沖繩住民は公式的な統計にだけ 10万人が死にます.これは米軍(1万)と日本軍戦死者(8万)を合した数より多い規模であり,当時沖繩人口の 4分の 1に当たります.沖繩島からお腹で強制に移動されている途中爆撃を当たって死んだ住民などを含めば実際犠牲者は 15万人に達して全体現(県)民意 3粉餌 1が過ぎると言います.それで今も沖繩大部分家庭の期日(忌日)は 4月から 6月の間に集中されていると言います

 

こんな民間人犠牲者の規模もおびただしいが,もっと出たらめなことは犠牲が大きくなった理由と内容です. 米軍との戦闘よりは “沖繩は 100% 犠牲しても良い”と言う日本軍首脳部の戦略のためこんな話にならない民間人犠牲者が出たという点です. 当時沖繩防衛部隊である日本帝国第 32軍医使命は住民の安全と生命ではなかったです. 日本本土,一歩進んで天皇制を守るといういわゆる ‘故区タイ高だ(国体護持:こくたいごじ)’のために最大限時間を儲けるのでした.

 

したがって最初から沖繩のすべてのものを動員して最大限持久戦をするという計画だったし, 軍官民共生工事(共生共死)’という未明の下に住民たちの犠牲を強要したのです.前住民を強制賦役に動員することは勿論,守備隊である 32だね部隊の 3分の 1 ほどを沖繩住民義勇どおり急に徴集しました.そうしてみると写真のように幼い少年や 70代年寄りまでくそみそに軍隊に引かれて行きました. それでも 32軍医兵力は 11万,当時力強い火器で武装した戦闘兵だけ 18ぶりに月と海軍と支援部隊まで含めば 54万もなった米軍の相手が決してなれない状況でした. ところが目的が ‘勝利’ではなかった日本軍は住民たちに爆弾を抱いて米軍のタンクで跳びこむようにするなど民間人犠牲はものともしなくて最大限堪えます. 当時沖繩住民は日本本土防衛のために ‘捨てる石’に過ぎ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定説です.

 

なおかつこの過程で狂気と恐怖にとらわれた日本軍は住民たちを米軍のスパイに駆って虐殺するとか,銃刀で脅威して自ら命を切ることを強要します. いわゆる ‘集団自決’,いや事実上集団虐殺です.それで沖繩住民数千黎明が洞窟の中で日本軍が渡した手榴弾を噴き出すとか農薬みたいな劇薬を飲んで死にます. もっと悲劇的な状況はこんな方法さえ物品不足で不如意ならば,家族と友達どうし素手または凶器-刀や棒,農機など-を使ってお互いの生命を奪った事です.親が子供を,ご主人が妻を殺す阿鼻叫喚みたいな悽惨な状況があちこちで開いたと言います.

 

当時の状況は生存者の証言を通じて伝わっているのに,いわゆる ‘チビチリお御輿事件’-お御輿は沖繩末路天然洞窟-の場合生存者 55人の中 20人が自分の子供を自ら殺したお母さんと言います. 自ら命を切ろうとしたがうまくできないで,かえって米軍に叩かれて死ぬと洞窟外に出たが生き残ったのです. また一沖繩年寄りは最近インタビューで子たちと奥さんを絞殺(絞殺)と自分も死のうとしたが失敗していまだに生き残ってとてもすまないと通恨の涙をこぼし出しました.言葉とおり ’生き残った者の悲しみ’が切切と感じられますね. 生存者たちは当時日本軍が脅威して自決を強要したうえに,米軍につかまればタンク下に敷かれる式のもっと悽惨な死-実際は日本が中国でほしいままにした蛮行-にあうと極度の恐怖心を吹き入れたと言います.“日本軍に死ぬとか,米軍に死ぬとか,なくて自ら命を切る方法しかなくて自決を選択した”と当時を証言しています.

 

それではどうして日本軍は住民の死を強要したんでしょうか? 理由が開いた口が塞がらないです.すぐ沖繩住民に対する差別と不信のためだと言います. すなわち日本軍首脳部は沖繩住民たちの国家忠誠度がとても弱くて, 米軍の虜につかまれば軍事機密を漏らすと思ったと言います.特に当時住民大部分が余分の飛行場と陣地構築に動員されたせいに,軍事施設の位置が分かっていて不安に思ったと言います.どんな記録には余分の食糧を減らさずに死になさいと言い付けたとまでします. 結局必要な時は忠誠と犠牲を要求したが,実際に沖繩人は日本国民ではないと思いながら終わらせる死まで強要したのです.日本軍の残虐性と二重性が赤裸裸に現われた部分です.   

限りない犠牲者を出した沖繩前が終わって2ヶ月もならなく,日本は無条件降参を宣言します.沖繩はしかし日本に帰ることができません. アメリカが沖繩を ‘日本に強制に合併された異民族国家’で規定して米軍政の下に編入させたのです.これは名目上であるだけ実際では沖繩が持った戦略的位置の大切さのためだったろいます.当時米太平両軍司令官であるマッカーサーが沖繩を中国を牽制する ‘天然防禦陣’と呼んだことで見るように,沖繩はアメリカ立場(入場)では易しく譲歩することができない地理的要衝地でした.そして当時天皇制維持が絶対絶命の当面課題だった日本立場(入場)でも沖繩を取りそらえるに値する余裕はなかったです.以後 6.25戦争と中国の公算化で沖繩の大切さはもっと大きくなったし,アメリカは沖繩に軍事力を増強させます.

 

占領以後 27年間米軍統治を受けた沖繩は去る 1972年にはまた日本で ‘復帰’します.アメリカがもちろん素直に出したことではないです.1960年代から住民たちがデモと暴動みたいな荒い ‘日本復帰運動’をしたうえに,アメリカと日本の力学関係が変わりながら利害関係が一致したおかげさまです.当時ベトナム戦などでアメリカは勢いの気勢がくじけたやけどする,経済力が大きくなった日本の発言権も強くなりながら ‘沖繩返還’協議の可能な状況が造成されたのです.それで日本政府は沖繩の地をお金で暮す奇妙な形態の ‘隠密な取り引き’を通じてアメリカから沖繩を取り戻します.

 

しかし沖繩の桎梏の歴史は ‘日本復帰’で終わらないです.相変らず現在進行形です.矛盾は大きく二つの,続く日本本土との差別と歴史歪曲の問題です.先立って沖繩前に現われたように根深い差別意識は政治的,経済的,社会的すべての面で沖繩を ‘日本の辺方’に泊まるようにしています.またしつこい歴史歪曲は精神的な面で若い世代たちのアイデンティティ(identity) 混乱につながっていると言います.

 

 

<米軍虜になった沖繩な...子供から年寄りまで くそみそ徴集>

 

<軍事訓練を受けている沖繩女子高生...ヒメユリ記念館>

 

<太平洋戦争参加を督励する当時日製ポスター>

 

 <沖繩出身スーパースター安室奈美恵>  

 

こんなに ‘民族も違って貧しい沖繩である’なので社会的差別も大きいです.特に就職や結婚などで有無型の差別を受けていると言います.それでスポーツと芸能界で進出する人が著しく多いのに,去る 90年代日本スーパースター中のスーパースターだと言える歌手安室奈美恵を筆頭で映画 ’リング’とドラマ ‘ゴクセン’で有名な中間Yukie,映画 ’スイングガールス’のマエしなさいエリ,グループスピドとオレンジレなのかなど幾多の歌手とタレント,モデルなどが沖繩出身です. もとより歌と踊りが好きな民族のうえ顔が小さくて目鼻立ちが集まっている異国的な外貌が有利だという俗説もあって,傑出した芸能人士官学校である ‘沖繩エックトススクール’の影響という人もいるが就業に制限が多いからだということが定説です. 

      

現在進行形であるまた他の沖繩の矛盾は歴史歪曲問題です. 代表的なことが日本軍の強要によった ‘集団自決’に対する絶え間ない教科書歪曲試みです.証人たちが生きていて関連米軍記録も残っているが,日本政府と右翼勢力は公式的な ‘日本軍文書記録’ではいやと言いながら認めていないです.当時日本軍防衛部隊が潰滅されたし,余分の文書もすべて焼却されたという事実が分かりながらも減らず口論理を開いているのです.

 

’集団自決’問題が教科書に初めて載せられたことは沖繩が日本で復帰してから 10年が経過された去る 82年だと言います.日本文部省がこの部分だけは教科書で抜きたかったが,沖繩住民たちの要求があんまり去勢やむを得ず積んだと言います. 文部省はしかし加害の主体である ‘日本軍’は抜いたまま ‘集団的な自殺があった’というふうのあやふやな表現で紛らします.ここに住民たちは “沖繩前の本質を歪曲している”と集団訴訟をしたし,去る 88年に勝訴します.文具一つ直すのに 6年がかかったわけです.

 

しかし去年 3月日本文部省は再び高等学校教科書検定で ‘日本軍強制’という表現を全面削除しなさいと修正指針を下げます.文部省は急に指針を下った理由でいわゆる ‘大江健三郎訴訟’が進行の中なので論難の余地があるという点をあげたが,事実は日本右翼の圧力に屈服したという解釈が優勢です. 沖繩住民たちが 11万人が参加する大規模集会を開いて荒荒しく反撥すると ‘日本軍関与’で文具を修正することはしたんですが,直接的な命令を現わす ‘日本軍強制’は相変らず認めていないです.

 

‘大江健三郎訴訟’はノーベル賞受賞作家である大江健三郎を相手で沖繩前当時日本駐屯軍の将校と遺家族が去る 2005年出版禁止請求訴訟をかけた事件を言います.原稿側は沖繩前の惨状を描いたゲンザブへのノンフィクション <沖繩ノート>が日本軍が集団自決を強要したように描いて自分たちの名誉を毀損したと主張しています.1審結果が先月末に出たが,日本大阪地方法院は “日本軍が深く関与したという合理的な証拠がある”と大江健三郎の主張を事実で認めました.現在原稿である私は日本軍将校側は法院の決定に反撥して抗訴した状態であり,最終審まで行くはずだという見込みです.この訴訟は従軍慰安婦問題といっしょに最近日本右翼の組織的な ‘歴史歪曲’ 動きを代表する事件で,日本内でも少なくない関心を集めています.

 

この以外にも沖繩前を歪曲しようと思う右翼の恙動はあちこちで現われています.一番象徴的なことが沖繩平和記念公園資料官に展示された日本軍マネキンの姿です.当時住民たちが隠れて住んだ洞窟の中の姿を再現したことだが,写真で見るように日本軍がまるで住民を保護する印象を与えるように ‘歪曲’になったのです. 泣く赤ん坊の口を詰めているお母さんの切迫した姿と違う所を眺める日本軍の姿が矛盾して奇妙な感じを与えます.資料官建立初期には住民たちの証言どおり日本軍の銃口が住民たちを向けていたが,建立途中右翼性向を持った支社の当選した後姿が変わったと言います.

 

学徒兵で沖繩前に動員された死んだ 130人余りの女子高生,いわゆる ‘ヒメユリ学徒兵’に関するイメージ操作も同じです. あどけない女子高生たちが仕方なく戦争に荒されて犠牲された悲劇的な事件を日本右翼は若者達が愛国心,いや天皇に対する忠誠心で国のために命をかけたという式のいわゆる ‘殉国美談(殉国美談)’で美化しています. こんな視覚はヒメユリを素材で日本本土で作られたかなり多い数の小説と映画にも映っているのに,米軍の降参勧誘を ‘毅然と’ 拒否して悲壮に絶壁で一斉に身投げをして酸化したという式です.それで少なくない日本人たちがこういう ‘期待感’で沖繩を尋ねると言います.  

 

こんな日本政府と右翼の沖繩前歪曲陰謀に対立した沖繩住民の反発と抵抗は必死的です.歴史歪曲は悔しく犠牲された人々を二度殺す事で,また何より ‘精神的な根’を振る事だからです. 沖繩の若い世代たちが学校で学ぶ教科書または映画の内容が親の言葉と違ってアイデンティティ混乱を経験する姿を見ながら,これを減らすために切迫するように努力をしていると言います.

 

沖繩にある平和記念公園とヒメユリ記念館の展示物内容を変えることができたことも正しくこんな集団的な反発とけんかおかげさまだと言います.管が主導した平和記念館の場合開館初期には日本軍の記録でいっぱいになるなどまるで ‘戦争記念館’のように構えられたと言います.しかし  住民たちの強い要求で,今はかなり多い数戦争の惨状と日製の蛮行を告発する方で取り離して直されたのだと言います. ヒメユリ記念館もこのおかげさまで死を美化化だなくて,日製の無差別的な住民動員が犠牲の原因なのを分かるように構成されることができたと言います. 生き残った ‘ヒメユリ’ 生存者お婆さんたちが “とても住みたかったが,日本軍が死を強要した”と当時状況をまともに知らせようと証言することも同じな脈絡です.それでこちらで映画や小説のイメージと違うヒメユリの実際を接して混乱を受ける日本人観光客も少なくないと言いますね.    

 

そうしてみるとテンノ−(天皇),すなわち天皇に対する認識も本土と全く違います.歴史が違う剃りあるが何より沖繩前当時加害者の頂点に天皇がいたという事実のためですね. 去る 1975年記念館建立を祝いに沖繩を訪問した皇太子(今のテンノ−)に対して沖繩青年 2人が火炎瓶を投擲した事件や,去る 1990年代テンノ−が招待した披露宴に参加した沖繩出身の歌手安室奈美恵が終わらせて ‘君が代(君が代:テンノ−の長寿を祈る内容の日本国家)’を歌わなかった事件が代表的です. テンノ−は崇拜の対象ではなく戦争の責任者だから,彼を尊重するとかほめたたえること自体が故郷沖繩に対する冒涜という認識で個人的な抵抗をしたのです.以外にも日の丸である ‘日の丸’を燃やすとか下水溝に打ちこむなど日本の他の所では想像することができない ‘神聖冒涜事件’の起る所が沖繩です.

 

沖繩を歩き回って資料を捜しながら,私たちの痛い植民地歴史がずっと重なりました. 私たちと同じく日本軍の蛮行と戦争動員で限りない人名が犠牲される苦痛を経験した現場では鬱憤が感じられました.それでも謝りと補償どころか今も日本右翼の歴史歪曲と捏造でずっと大変なけんかをしている姿を見ながらは同じ悩みを抱いているという考えもしました.また在日韓国人といっしょに日本社会で相変らず差別と屈辱にあっているという説明では同病相憐の程度感じました.沖繩平和記念公園の資料官は私たちの独立記念館に来たような錯覚をするようにしたし,ヒメユリ記念館の女子高生学徒兵写真では従軍慰安婦に引かれて行ったお婆さんたちの  若かった時姿があんななのなかっただろうかたくて胸が痛かったです.

 

そして実際沖繩はそのものでも私たちの痛い歴史の現場です. 戦争追いこみにうちのお爺さん世代万名余が日帝に強制に徴用されて軍事施設工事現場または戦地で命を失ったし,お婆さん世代は日本軍の性奴隷にひかれて来て百ヶ所が越える郡 ‘慰安所’に収容されたと言います. 当時の惨めな生活と死に対する記録と証言はまだ沖繩あちこちに残っているのに,その話を聞けば本当に無惨な身震いが張られて憤痛が裂けます.”栄養失調(徴用)と性病(慰安婦)で死んだ朝鮮の人が多かった”と言ったら,いくら悽惨だったのか見当がつくんです.

 

沖繩を眺める視覚は本当に多様です. 日本人に,沖繩人に,そして私たちにもね. 大多数日本人たちに沖繩はハワイやサイパンみたいな風変わりな休養地です.一方日本右翼に沖繩は靖国神社のような ‘聖典(聖戦)’の巡礼誌で,反転市民団体には戦争の教訓を刻むことができる巨大な体験官で思われます.偏差の程度は違うが,沖繩人にも同じです. かなり多い数沖繩人が悽絶な戦争の痛みを憶えて真実を知らせようと労力している一方,どんな沖繩人はもうそんなすぎ去った事は適当に葬って現実と妥協して ‘真正な日本’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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