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중국인의 개고기 역사
중국 광동성?개고기 요리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향육”이라 하여 개의 부위에 따라 여러 요리가 있고 그 재료로 누렁개를 최고로 친다.
사기(史記 秦記 第 五章- 司馬遷) : 개식용의 최초의 기록
진덕공 2년(기원전 679년)에 삼복(三伏) 제사를 지내는데 성내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를 막았다.
秦나라때 상제(喪祭)날 개를 잡아 사문(四門)의 재앙을 막았다. 흰개를 잡아 피로 門에 글을 쓴다.
그 재앙을 물리치는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옛부터 그렇게 했다.
황┳뺐延쩌?皇帝內經太素) : 중국 최고 의서(醫書)
공복감을 채울 때는”식”이라 하고 병을 고칠 때에는”약”이라 한다. 예컨데 개장국은”식”이면서 “약”이 될 수 있다.
2.일본인의 개고기 역사
일본에서도 옛부터 즐겨왔다. “일본인은 소고기는 먹지 않고 개고기를 먹는다. 특히 붉은색 개를 약용으로 쓴다.”라는 서양 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3.France의 개고기 역사
★ 개고기 요리책: 1870년에 프랑스에서는 개고기 조리법 수십가지가 불어 책으로 출판되었다(6).
★ 르몽드 이류스트라온(Le monde Illustration)지: 1871년 4월, 고양이고기와 개고기 파는 가게에 사람들이 줄지어선 삽화를 그리고 있다(3,6).
사진: 1871년도 르몽드 이류스트라시온지에 실린 비에쥬르의 뎃상. 1870년 10월, 몽마르뜨(Mont Martre) 근처의 로슈슈아르 (Rochechuart) 가의 정육점. 쥐고기, 개고기, 고양이고기 팻말이 보인다(3,6)
★ 와타리로쿠노스케: 1870년 당시 당시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던 일본 청년 와타리로쿠노스케(渡六之助)는 일기에 “시청에는 지난 9월 17일 이후 파리 주민이 잡아먹은 고양이의 가죽이 약 27,553장이라고 써 있고, 파리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약 25만마리나 된다고 한다. 이 정도로 파리에서 개와 고양이를 잡고, 개와 고양이를 잡아 파는 파는 가게도 생기고, 군인 주둔지에서는 개만 잡아서 먹는다.”고 기록하였다(7).
★ 안토니오 다블뤼(Antonio Daveluy, 1817∼1866): 프랑스인이며, 조선교구 5대 교구장으로 보신탕을 즐겼다(2).
★ 끌로드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프랑스 포교자로, 조선교회사(1874)에서 “조선에는 양고기는 없고, 그 대신 개고기가 있는데 선교사들은 모두 그 맛이 나쁘지 않다”고 하였다(2).
★ 개가죽: 19세기 프랑스에서는 개가죽으로 백 파이프(bag pipe)를 만들었다. 푸아트(Poitou) 지역에서는 1950년대까지 개가죽을 안에 댄 장화를 만들었다(4).
8월 10일, 말복, 2002년 마지막 견식일 |
일본에서도 TV나 신문, Web등의 매스컴에도 다루어져 왔지만, 한국에서는 전통적약선으로서 개를 먹는 습관이 있다.그 때문에 지금까지, 주로 해외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아 왔다.그러나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시의 견식 자숙으로부터 2002년의 월드컵배 개최에 이르기까지 의 긴 시간을 거치고, 한국의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발언력이나 국위의 높아져, 국내의 내셔널리즘의 고양에 의해서 현재, 개식생활 문화를 긍정하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한국에서는 개고기나 견과는 가는 곳에 가면 일년내내 먹을 수 있지만, 8월 10일은 2002년 마지막 말복일이었다.말복이란, 삼복일의 마지막 날로, 음력의 하지의 날로부터 세어 3번째의 「경(인가의 )」가 붙는 날을 초복(조나), 4번째의 「경」이 붙는 날을 중복(틀보크) 입추부터 세어 최초의 「경」의 날을 말복(마르보크) 이라고 하여, 더운 날이라고 하는 의미로, 이것들을 정리하고, 삼복이라고 칭해, 그 중에서도 제일 더운 가운데 복의 날을 중심으로 피서로서 견과를 잘 먹는다고 하는 옛날부터의 한국의 습관이다. |
한국에서는 음양도와 음양 오행설의 가르침에 따라 달력에는, 음력일(양력도 대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에, 요일, 간지, 주당(맡는 도깨비), 12신장, 9별, 등을 각각 할당할 수 있고 있다.그 중의 간지는, 십간십이지로 십간은, 「코우·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십이지는 아시다시피, 「자·축·인·묘·진·미·오·히츠지·사루·서·술·해」다.9별은 일본의 타카시마 달력 속의 운세라고 해도 잘 알려져 있다. |
예를 들면 8월 10일(토요일)은··· 음력:7월 2일 간지:경술 주당:조(결혼의 주당), 리(이사의 주당), 평(12신장), 녀(상제의 주당) 9별:팔백 2002년의 음력 양력 대조표를 보면, 7월 21일이 경인일에 초복, 7월 31일이 경자일에 중복에 해당해, 8월 10일은 경술일에 말복이 된다. |
견식에 관해서 한국측에서는, 「견식은 야만스럽다」 「개가 귀여울 것 같다」라고 하는 비판에 대항해 「일본에서도 말고기나 고래고기를 먹거나 한다.그것이 더 야만스럽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는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도 실은 같은 구멍의 오소리적 존재로, 「개나 말이나 고래도 긴 역사적인 흐름 속의 식생활 문화로서 파악하면, 양국 모여 개나 말이나 고래도 먹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1) 일본에서는, 나라 역전의 백화점의 부지에서(보다) 나라시대의 귀족의 관적이 발굴되고 식용으로서 먹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개의 뼈가 많이 출토했다.에도시대에도 개를 먹은 기록이 있어, 주거자취로부터 이것도 또 식용으로 되었다고 생각되는 개의 뼈도 출토하고 있다. 2) 한국인도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부터 고래의 뼈가 구워 조리되었다고 생각되는 상태로 출토하고 있어, 한국 전쟁 시대에는 주로 부산 지역에서 귀중한 단백원으로서 불고기등의 요리로 해 먹을 수 있고 있었다.현재에도 부산의 자갈치 시장에는 그지라 요리점이 존재한다. 일찌기 포경이 번창했던 울산시에서는 2001년도부터 고래제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3) 쵸란말이라고 하는 전통마의 사육이 번성한 제주도에서는, 말고기를 먹는 습관이 있어, 현재에도 말고기 레스토랑이 있다. |
http://www.k-plaza.com/rensai/re_gimon01.html
···개가 방심하고 마을을 걷고 있으면, 봉으로 때려 죽여져 먹어져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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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는 식견문화권
개는, 수렵의 도움을 하거나 집 지키는 개로서 일하거나 또 애완동물로서 대화 상대가 되거나와 인간에게 있어서 궁합의 좋은 반려이다.분명히,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인간은 옛부터 언제나 개를 수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열린 축구 월드컵 때에, 브리짓드·바르드 산야 FIFA의 회장이 「월드컵 기간중은 개의 고기를 먹는 것을 멈추게 하면 좋겠다」라고, 한국 축구 협회의 회장에게 말해 물의를 양 했다.그것보다 전의 1988년 서울 올림픽때에도, 브리짓·바르드씨는 한국의 대통령앞에 「개고기를 먹는 야만스러운 일을 하지 않고 갖고 싶다」라고, 편지를 보내, 구미의 매스컴은 한국을 「개를 먹는 야만국」이라고 써 세웠다.그러나 개를 먹는 것은 별로 한국 만이 아니다.필자가 아는 곳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개를 먹는다.요컨데 동아시아에는 넓게 개를 먹는 문화가 있는 것이다.
공자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정리된 주대의 국가 조직의 제관직의 직무 내용을 상세하게 적은 「주예」(종류등 있어)의 추관소에「견유삼종, 1자전견(사냥개), 양자폐견(집 지키는 개), 삼자식개.」어떤.「본초강목」에는 「전견장훼선렵, 폐견단선수, 식견수비공찬.」라고 있어,중국에는 고대부터, 사냥개와 집 지키는 개 외에 먹기 때문에(위해)의 개가 있었던 것이다.
2.죠몽개와 3월개
일본개는, 「남방계」와「남방과 북방과의 혼혈계」라고에 크게 나뉜다고 한다.죠몽 시대의 일본 열도 가라후토, 치시마에게는, 체 고40 cm만한 소형이고, 여우와 같은 얼굴 생김새를 한 「죠몽개」가 있었지만, 도래해 온 야요이인이 데려 온 개와 혼혈 해, 이윽고, 시견, 기주견, 보람개, 시코쿠개 등에 분기 하는 것도와가 되는, 전두부에 움푹한 곳을 가져, 광대뼈가 내다 붙인 「3월개」가 형성된 것 같다.한편, 그대로 오키나와에서 살아 온 개는, 류큐개의 조견이 되어, 홋카이도의 개는 홋카이도개의 조견이 되었다.홋카이도개와 류큐개가 근친인 것이, 혈중 단백질의 유전자 조성을 비교한 최신의 조사에서 확인되었다고 한다.
「동물 고고학」의 니시모토 유타카홍·국립 역사 민속 박물관 교수에 의하면, 개를 보고 가는 것으로, 역사 중(안)에서의 일본인의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기원 전 7000년부터 8000년정도의 죠몽 시대의 개의 뼈가, 에히메와 카나가와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당시의 개가 인간과 같이 매장되고 있던 것으로부터,죠몽 시대인은 개를 매우 소중히 한 것 같은것을 안다.죠몽개는 수렵개로서 다루어져 있던 것 듯하지만, 수렵중에 다쳐 골절한 개도 많이 도움이 되지 않게 되어도 소중히 사육되고 있던 것 같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가 되면 개에 대한 취급은 격변 한다.개의 종류도 대신해, 거의 매장되지 않게 되어, 뼈도 뿔뿔이 상태로 출토해, 해체자국이 인정된다.요컨데 식료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이것으로부터도, 야요이인이 죠몽인과는 다른 민족이었던 것이 추측된다.야요이인은, 논벼농사 농경의 기술 뿐만이 아니라, 식견습관도 가져왔던 것이다.수렵민에게는 귀중한 존재인 개도, 농경민에게 있어서는 집 지키는 개인가, 식용개로서 밖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것이다.
3.육식을 계속한 일본인
「수렵 채집의 죠몽인은 고기를 먹고 있었다.불교 전래에 의해, 짐승을 죽여 그 고기를 음식(일)것은 금지되었다.메이지 이전의 일본 사회는 전국적으로 수육식에 대한 강한 터부가 있었다.불교의 불살생의 가르침과 신도적인 더러워져 의식이 융합한 결과, 수육을 먹는 것은 더러워져로서 기피 되었기 때문에이다.간신히 메이지 유신에 의해서, 나라시대 이후 행해지지 않았던 육식이 해금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일 것이다.메이지천황이 솔선수범해 쇠고기 요리를 먹어보다 , 우냄비가 대유행해 문명 개화의 대명사로도 되었다고도 말한다.그러나, 거기는 「표면」과「본심」을 구사하는 것이 자랑의 국민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일본인은 그늘에서는 고기를 계속 확실히 먹고 있었던 것이다.
676년(텐무천황 4년) 4월 17일의 육식 금지의 조에는,
경인, 조제국왈, 자금 이후, 제제어렵자, 막조우리와 함정, 급시기창등 지류.역4월삭 이후, 9월삽일 이전, 막치비미사기리·량, 차막식 우마견@계지육.이외 부재금례.젊은 유범자죄지.
어떤. 이 조는, 우, 마, 개와 원숭이, 닭의 다섯종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고 있다.그 이유는 「개는 밤에 짖고 집 지키는 개의 도움이 되어, 닭은 새벽을 고하고 사람들을 일으켜, 소는 전답을 경작하는데 지쳐 말은 사람을 태워 여행이나 싸움에 일해, 원숭이는 사람에게 유사하고 있으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열반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식 금지에는 기간이 설정되어 있는 것, 또 먹어선 안 되는 고기의 종류가 다섯종류 가축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금지하는 조가 나왔다고 하는 것은 사회의 현실로서 금지되어야 할 행위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이 금지령은 농번기에 있어서의 가축의 이용이라고 하는 공리적인 시점에 근거해 나온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해도 있다.또, 당시 행해지고 있던 신도나 벼농사 농경의 의례와의 관련에 의한 육식 금지라고도 생각된다.하라다 노부오씨에 의하면, 일본에 있어서는, 원래 벼농사와 동물의 고기와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의 신에의 공희는 농경의 추진으로 연결된다고 여겨지고 있었다.그것이 율령 체제라고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벼농사에 해를 이루는 것이라는 사상으로 전환했다고 한다.율령 국가는, 논벼농사를 기반으로 피울 수 있어 천황을 미의 최고 사제자라고 평가했다.그리고, 불교 사상으로 인민을 마인드 컨트롤 하려고 한다.그곳에서는, 미와 고기와는 반대극에 있는 음식과 파악되어 불교 도덕의 살생계에 의해서 육식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육식 금지의 조는 절대적 육식 금지령은 아니다.여기에는 논벼농사의 기간이라고 하는 한정이 있어, 구석기시대 이래 가장 선호된 사슴과 멧돼지가 나오지 않는다.게다가 육식의 금지는 철저히 하지 않았던 것 같고, 그 후도 육식 금지령이 반복해 나와 있다.
평안조 초기의 사가 천황의 무렵의 기록에 「오늘의 토요아케(와의 불빛)는 한방사」(이)라고 있다.귀국한 유학승려를 부른 궁중의 토요아케는 중화 요리였다.중화 요리에는 고기 요리는 불가결하지만, 제일 고기를 먹어선 안 돼야 할 승려를 부른 연회에 대해조차 고기를 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식을 신경쓰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그러나, 그 후 어떻게 한 것인가, 육식의 금기는 승니(승과 여승)으로부터 귀족에게 및, 마지막에는 서민으로, 긴 세월을 걸쳐 서서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도 육식의 절대적 금지는 이루어지지는 않았다.1487년에 성립한 「하늘과 땅의 신 도복기령비초」에서는 「4켤레물 식용지사.록저원호리견하 70일탄지.합화하 오십일.또 합화하삽일야.차기한 신사에 참예스베카라즈.」라고 있다.이것도, 반복하면 70일을 경과하면 신사에 참예 해도 괜찮게 된다.이외에도 수많은 복기령이 나와 있어 육식이 더러워져이다라는 사상은 완전하게는 정착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무로마치 시대, 일본에 온 쿠랏세의 「일본서교사」에는, 「부자는 우도 미식에 자랑해, 그 식탁에 육 채를 산더미 같게 번창해 세워 흡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여 해.또 육 차, 숟가락, 창칼을 용히않다, 다만 젓가락을 용히라고 육 차에 대 」(이)라고 있다.남만 무역이 번창하게 되면, 육식의 바람이 수입되어 크리스찬 오나의 사이에 유행했다.
풍직정권 시대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선교사 루이스·프로 의자는 「일본인은 들개나 학, 대원, 고양이, 생의 해초등을 먹는다」라고 쓰고 있어 당시의 일본에서는 육식은 보통 것인 것 같다.또 특히 개고기식에 대해서는 「우리는 개는 먹지 말고, 소를 먹는다.그들은 소를 먹지 않고, 가정약으로서 보기 좋게 개를 먹는다」라고도 말하므로 , 일본인은 약식실 칭하고 개를 먹어 있던 것 듯한다.
4.요리 이야기
에도초기의 연호 20년(1643),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시대에 쓰여진 「요리 이야기」는, 에도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요리서로, 작법을 주로 한 것이 아니고, 요리 재료나 조리법을 구체적으로 쓴 가장 낡은 서적이다.무로마치로부터 근세 초기에 걸쳐 상류 사회에 전승되어 온 요리법의 집대성이라고 해 제일급의 요리서이다.간행본에는 이판도 많아, 넓게 유포했던 것이 방문한다.저명한 책인 것에도 불구하고, 무주 사야마에서 쓰여졌다고 하는 이외, 저자의 신분이나 이름은 모른다.그 내용으로부터, 꽤 높은 신분에 있던 것은 아닐까도 말해진다.내용은 20의 부로 나눌 수 있어 바다의 물고기, 이소쿠사, 민물 고기, 조, 수, 버섯, 푸성귀의 7부에 대해서는, 재료명과 그 요리명만을 주어 8항목으로부터 이하, 국물의 부, 의 부 등은 대표적인 요리법을 구체적으로, 최후는 만문서의 부로서 그 외의 관련 사항을 적고 있다.
「요리 이야기」속에 「사슴:국물, 보람이나 와, 태워, 해 좋아.너구리:국물, 나오지 않는 금액 산초 된장, 멧돼지:국물, 나오지 않는 금액, 태워, 강거짓말:보람이나 와, 들이마셔 것, 나오지 않는 금액,개:들이마셔 것, 보람이나 나무 」라고 고기 요리의 방법을 전하고 있다.보람이나 나무는 가리비와 같이 큰 패각을 냄비로 해 굽는 요리이다.발문의 뒤에 음식의 등급설정이 기록되고 있어 짐승안에 「중식의 분」으로서 「구(개) 육」이라는 기술을 볼 수 있다.이와 같게 다른 동아시아 제국과 같게, 우리 나라에는 식견문화는 제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도우지 유잔의「떨어진 이삭집」에는, 「우리들 젊은 무렵까지는, 당대의 상민들에게 어라고, 개라고 하는 것은 보기 드물게라고, 봐 당불레신후.약 한 설마 봐 당문안 드림에는, 무가 상민들 모두 하들의 음식에는 개보다 뛰어나인 물건은 무레지와라고, 동향이 되어 문안 드림, 눈에 띄는 대로에 때려 죽여, 칭찬사에 첨부□의 도리에 유지사야」(에도의 상민들에게 개는 거의 없었다.그렇다고 하는 것도, 무가(쪽)편 상민들 모두, 하들의 음식으로서는 개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고 여겨져 겨울 흥분하면, 찾아내는 대로 쏘아 죽여 먹었기 때문에이다.)(이)라고 기록되고 있다.「개가 있었다고 하면, 「더 이상의 맛있는 것은 없다」와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어 곧바로 먹어져 버린다」상황이었던 것이다.
또, 사츠마에 있어서의 식견은 유명함 것 같아서 , 오오타 난포(오오타난보)(1749-1823)의 「1화 한마디 보유」에는 「사츠마에서 구(개)를 음식 하는 일」이라고 하는 항이 있어, 「네의 무렵밥(강아지밥)」가 소개되고 있다.개의 배를 할애하고 미를 들어갈 수 있어 찜구이로 하는 것으로, 시마즈번후도 먹었다고 한다.
5.우, 돈, 원, 곤충에 파충류, 뭐든지 먹은 일본인
(고대의 양돈)
(고대의 양돈)
고분 시대의 가축은, 말, 소, 개, 돼지, 닭등에서 있었다.만엽집에는 저양산(있어 보람의 산)이 나오고, 성씨록에는 저감수(있어 보람이 띠어와)의 이름이 보인다.돼지를 사육하고 있던 장소가 있어, 양돈 업자가 있었던 것이자.전 아키라 천황기에, 치쿠고수가, 축돈축조를 권하는 기사가 보인다.
시대는 내리고, 에도 중기무렵이 되면 요양이나 체력 회복을 구실로 한 「약식 있어」가 활발히 행해지게 된다.세상에는 어리석다는 것은인가, 저육을 모란 혹은 「멧돼지 고기」, 록육을 단풍이라고 불렀다.저육도 록육도 겨울철이 되면 기름이 올라 맛있어지기 위해 약식 있어는 겨울의 풍물이 되었다.이 약식 있어를, 서민은 원래 위는 장군까지 가서 있었던 것이다.
(에도의 모모응할아버지가게)
문화 분세무렵이 되면, 모모응할아버지가게가 나타난다.「마츠야 필기」에 「문화 분세 연간부터 이래, 에도에 수육을 파는 가게 많아, 코우카 시종의 사도, 이것을 고생자 있어, 저육을 멧돼지 고기라고 칭해, 록육을 단풍과 칭.웅, 랑, 리, 족제비, 다람쥐, 猿(원숭이 원)등의 류수점으로 가득 차고, 기처를 한통속거치지 않고, 또 두꺼비를 고생자 있어 와, 모두 난학자류에 일어날 수 있는 폐풍이든지.격이라고 에도의 가옥은 부정 충만해, 슈쿠유의 분노(화재)를 만나는 것 무수히 여행이든지, 사랑할 것, 한탄할 것」이라고 기록되고 있고 있다.에도의 대화재가 육식의 탓으로 되고 있다.
많은 모모응 글자가게 가운데, 코우지마치를 중심으로 코우슈우 가게, 토요타 가게, 항 가게등이 번성했지만, 안에서도 코우지마치의 산속가게, 양국의 모모응 글자나의 2채가 유명했다.산속가게에서는 멧돼지나 猿가 명물이었다고 한다.에도막부 말기에 일본을 방문한 영국인 로버트·포츈은, 점포 앞에 가죽을 벗겨진 猿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실로 기색의 나쁜 모습이었다.일본인은 아무래도 猿의 고기를 극히 풍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적고 있다.
(쇠고기의 원한)
옛부터 오오미의 나라는 소의 사육이 번창한 곳에서 있었다.겐로쿠 3년(1690)부터, 히코네번은 「쇠고기 된장 절임」을 고안 해, 약용이라고 칭해 먹고 있었다.그리고 히코네 지방 영주·정이후는, 매년, 적반우의 된장 절임을 장군 및 세 대가에게 약용으로서 헌상 하고 있었다.「쇠고기통」이라고 하는 책에는, 이이나오스케가 쇠고기의 헌상을 게을리했는데, 쇠고기 좋아하는 미토 히토시소가, 헌상의 재촉을 했다.곧 필후가 이것을 거절한 것이, 미토공과 맞지 않게 된 초라고 하는 설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열공 토쿠가와(미토) 히토시소 대노 이이나오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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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부가 좋아한 돼지고기)
토쿠가와(이치하시) 요시노부는, 기꺼이 돼지고기를 먹은 것으로부터 「돈일」과 별명 되었다.쿄토의 천황이 「짐(응)」이라고 자칭 하는 것부터, 이런 광구도 태어났다고 한다.「에도의 돼지 쿄토의 중(응)에 내쫓아져서」모리타세이고저 「메이지인 이야기」(이와나미 신서)
이치하시(토쿠가와) 요시노부 |
사츠마 번 에도야시키에서는, 중간등이 잔반으로 돼지를 길러, 이것을 이겨 그 고기를 먹어, 또 팔아도 있었다.에도 후기의 농학자·사토노부히로(노부 히로)가 저술한 「경제 요록」1827년에는 「사츠마 번 에도저로 길러지고 있는 돼지는, 그 맛이 새삼스럽게 품위있고, 이것을 보급해야 한다」라고 있다.이와 같이, 사츠마에서는 돼지고기식의 긴 전통이 있지만, 사츠마의 명군,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마지막 장군·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돼지고기를 통해서 연결이 있었다.예를 들어, 1845년 5월 2 날짜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로부터 요시노부의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의 서간에는, 「돼지고기 진상사후(개나 축제 겉늙음)」라고 있다.사이고 다카모리는 돼지뼈와 된장국을 좋아했다 ( 「난슈노인 일화」1937년).
케이오 원년부터 약 2년간 신센구미는 니시혼간지를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하고 있었다.신센구미는 혼간지의 경내에서 군사 훈련을 할 뿐더러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대사들의 건강 관리를 위해서, 고문의 마쓰모토 료준이 돼지를 기르는 것을 권했다.돼지 오두막을 만들어 자돈을 코베로부터 들여왔다.도살 해체하는 순서는 기야마치의 정의 남부 세이이치의 제자들이 맡아 주었다고 한다.절의 경내에서 돼지를 도살해, 익히거나 굽거나 하는 것에 감리카라고 혼간지측이 불평을 신청했다.그러나, 결국 떠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오사카의오가타 고안의 에도후기 난학의 기숙사에서는 돼지를 학원생 모두 먹고 있었다와 후쿠자와유키치가 「서양 의식주」에 쓰고 있다.
(게테모노식 있어의 일본인)
일본인(정도)만큼 동물 단백질에 기피를 가지지 않는 민족도 드문 것 같아서, 곤충이나 파충류, 양서류도 먹을 수 있던 것 같고, 연형 3년(1746)의 「흑백정미집(흑백 탓 봐 사람들)」에는, 사, 와, 좋은 , 백 켤레(지네)까지가 식재로서 올려지고 있다고 한다.
나가노현, 이이다·이나 지방에 전해지는 식생활 문화 「자리자리충」의 해산물 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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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rhnakai.hp.infoseek.co.jp/sub1-35.html
와~ 개고기 맛있어요 k1의 영웅 효도르 !!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태권도 선수단
음~ 개고기 정말 맛있어요 ^ ^
1.中国人の拘肉歴史
中国広東省?拘肉料理は全世界的に有名だ. ¥"ヒャングユック¥"といって犬の部位によって多くの料理があって その材料でヌロングゲを最高にする.
詐欺(史記 秦記 第 五章- 司馬遷) : 開式用の最初の記録
ジンドックゴング 2年(B.C. 679年)に三伏(三伏) 祭祀を執り行なうのに城内四大門で犬を捕って虫災を阻んだ.
秦国時葬祭(喪祭)日犬を捕って査問(四門)の災いを阻んだ. フィンゲを取って疲れ 門に文を書く.
その災いを退ける内容は伝えないが古くからそうした.
硫黄抜く延チォ?皇帝内経太素) : 中国最高医書(医書)
空腹感を満たす時は¥"式¥"といって病気を直す時には¥"薬¥"という. 例えば開場国は¥"式¥"ながら ¥"薬¥"になることができる.
2.日本人の拘肉歴史
日本でも古くから楽しんで来た. ¥"日本人は牛肉は食べないで拘肉を食べる. 特に赤色犬を薬用で使う.¥"という西洋宣教師の記録がある.
3.Franceの拘肉歴史
★ 拘肉料理本: 1870年にフランスでは拘肉料理法数十種類が仏語本に出版された(6).
★ ルモンドイリュストラオン(Le monde Illustration)だ: 1871年 4月, 猫肉と拘肉売る店に人々が列をなしては挿し絵を描いている(3,6).
写真: 1871年度ルモンドイリュストラシオンジに積まれたビエジュルのデッサング. 1870年 10月, モンマルトル(Mont Martre) 近くのロシュシュアル (Rochechuart) 加衣肉屋. ズィゴギ, 拘肉, 猫肉立て札が見える(3,6)
★ ワタリロクノ−スするように: 1870年当時当時フランスに留学していた日本青年ワタリロクノ−スするように(渡六之助)はおこるのに ¥"視聴には去る 9月 17日以後パリ住民が食った猫の皮が約 27,553枚だと書いていて, パリで育てる猫は約 25万匹もなると言う. この位にパリで犬と猫を捕って, 犬と猫を捕って売る売る店も生じて, 軍人駐屯地では犬だけ捕って食べる.¥"と記録した(7).
★ アントニオダブルルィ(Antonio Daveluy, 1817〜1866): プランス人であり, 朝鮮校で 5台校具場で犬肉のスープを楽しんだ(2).
★ クルロドシャルルルダルレ(Claude Charles Dallet): フランス布教者で, 朝鮮教誨士(1874)で “朝鮮にはマトンはなくて, その代わり拘肉があるのに宣教師たちは皆その味が悪くない”と言った(2).
★ 勝ちどきおかゆ: 19世紀フランスでは勝ちどきおかゆで百パイプ(bag pipe)を作った. プアト(Poitou) 地域では 1950年代まで勝ちどきおかゆを中につけた長靴を作った(4).
8月 10日, 末伏, 2002年最後の見識である |
日本でも TVや新聞, Webなどのマスコミにも扱われて来たが, 韓国では伝統的薬船として犬を食べる習慣がある.そのため今まで, 主に海外の人々から多くの誤解を受けて来た.しかし 1988年のソウルオリンピック開催の時の見識自粛から 2002年のワールドカップ盃開催に至るまでの長い時間を経って, 韓国の国際社会における発言力や国威の高くなって, 国内のナショナリズムの高揚によって現在, 開式生活文化を肯定する動きが出ている.韓国では拘肉や犬とは行く所へ行けば一年中食べることができるが, 8月 10日は 2002年最後のマルボックイルだった.末伏と言う(のは), サムボックイルの最後の日で, 旧暦の夏至の日からシェア 3番目の 「頃(なのかの )」が付く日を初伏(まどろむが), 4番目の 「頃」が付く日を重複(トルボク) 立秋からシェア最初の 「頃」の日を末伏(マルボク) と言って, 暑い日だと言う意味で, これらを整理して, 三伏だと称して, その中でも一番暑い中復衣日を中心に避暑として犬とをよく食べると言う昔からの韓国の習慣だ. |
韓国では陰陽道と陰陽五行説の教えるによってこよみには, 旧暦である(陽暦も対応されている場合が多い)に, 曜日, 悪知恵, 一株当り(引き受けるお化け), 12身の丈, 9星, などをそれぞれ割り当てすることができている.その中の行ったからは, 十干十二支で十干は, 「コウ・を・病気・情・大根・期・頃・申・林・係」, 十ではおわかりの通り, 「定木・の数・イン・墓・チン・米・五・ヒツだ・沙漏・西・お酒・日」だ.9星は日本のTakashimaこよみの中の運勢だと言ってもよく知られている. |
例えば 8月 10日(土曜日)は・・・ 旧暦:7月 2日 悪知恵:庚戌 一株当り:組(結婚の一株当り), 里(引っ越しの一株当り), 坪(12身の丈), 女(葬祭の一株当り) 9星:八百 2002年の旧暦陽暦対照表を見れば, 7月 21日がギョングインイルに初伏, 7月 31日がギョングザイルに重複にあたって, 8月 10日はギョングスルイルに末伏になる. |
見識について韓国側では, 「見識は野蛮だ」 「犬が可愛いようだ」と言う批判に対抗して 「日本でも馬肉や鯨肉を食べるとかする.それがもっと野蛮ではないことか!」と言う大声を出しているが, 日本や韓国も実は同じな穴のムジナ的存在で, 「犬や馬や鯨も長い歴史的な流れの中の食生活文化として把握すれば, 両国集まって犬や馬や鯨も食べていた」と言える. 1) 日本では, 国逆転のデパートの敷地で(より) 奈良時代の貴族の貫籍が発掘されて食用として食べることができたと考えられる犬の骨がたくさん出土した.江戸時代にも犬を食べた記録があって, 住居名残からこれもまた食用になったと考えられる犬の挫いても出土している. 2) 韓国人も新石器時代の遺跡から鯨の骨が焼いて料理されたと考えられる状態に出土していて, 韓国戦争時代には主に釜山地域で貴重な蛋白源として焼肉等の料理でこしらえて食べることができていた.現在にも釜山のチャガルチ市場には乞食だと料理の店が存在する. 早く包茎が栄えた蔚山市では 2001年度から鯨制も毎年開催されている. 3) チョランマルだと言う伝統麻衣飼育が盛んな済州島では, 馬肉を食べる習慣があって, 現在にも馬肉レストランがある. |
http://www.k-plaza.com/rensai/re_gimon01.html
・・・犬が油断して村を歩いていれば, 棒で殴って殺されて食べられてしま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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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東アジアは識見文化圏
犬は, 狩猟の助けをするとか家守る犬として働くとかまたペットとして対話相手がドエゴナと人間において相性の良い伴侶だ.明確に, 良医東西を問わず人間は古くからいつも犬を伴っていた.
ところが, 去年開かれたサッカーワールドカップの時に, ブリジッド・バルド山野 FIFAの会長が 「ワールドカップ期間中は犬の肉を食べることを止めるようにすれば良いだろう」と, 韓国サッカー協会の会長に言って物議を羊した.それより前の 1988年ソウルオリンピック時にも, ブリジッ・バルドシは韓国の大統領前に 「拘肉を食べる野蛮な事をしないでほしい」と, 手紙を送って, 欧米のマスコミは韓国を 「犬を食べる野蛮国」と書いて立てた.しかし犬を食べることはあまり韓国だけではない.筆者の分かる所は, 中国やベトナムでも犬を食べる.ヨコンデ東アジアには広く犬を食べる文化があるのだ.
孔子の継承者たちによって整理された主隊の国家組職の祭官職の職務内容を詳細に少ない 「ズイェ」(種類等あって)のツグァンソに「犬儒三宗, 1自転犬(鮮犬), ヤングザピェギョン(家守る犬), 三者式ヶ.」どんな.「本草綱目」には 「ゾンギョンザングフェソンリョブ, 廃犬断線(単線)数, 識見守備供刈.」とあって,中国には古代から, 鮮犬と家守る犬外に食べるから(のために)の犬がいたのだ.
2.ジョモングゲと 3ワルゲ
和犬は, 「南方係」と「南方と北方との混血係」ラゴに大きく分けられると言う.ジョモング時代の日本列島がラフト, Chishimaには, 体高40 cmほどの小型で, 狐のような顔顔付を限り 「ジョモングゲ」があったが, 渡来して来た彌生人が連れて来た犬と混血やって, やがて, 時犬, 寄主犬, やりがいヶ, 四国ヶなどに分期するゴッドワになる, 前頭部にぽこんとする所を持って, ほお骨が出して付けた 「3ワルゲ」が形成されたようだ.一方, そのまま沖繩から暮して来た犬は, 琉球ヶの早見になって, 北海道の犬は北海道ヶの早見になった.北海道ヶと琉球ヶが近親であることが, 血中タンパク質の遺伝子造成を比べた最新の調査で確認されたと言う.
「動物考古学」の西本ユタカホング・国立歴史民俗博物館教授によれば, 犬を見て行くことで, 歴史中(の内)での日本人の動きを捜すことができると言う.B.C. 7000年から 8000年ほどのジョモング時代の犬の骨が, 愛媛とカナがとの遺跡で発見されている.当時の犬が人間と一緒に売場されていたことから,ジョモング時代人は犬を非常に大切にしたようなのが分かる.ジョモングゲは狩猟ヶとして扱われていたのようだが, 狩猟中にけがをして骨折した犬もあんまり役に立たなくなっても大切に飼育されていたようだ.
しかし, 彌生時代になれば犬に対する取り扱いは激変する.犬の種類も代わりをして, ほとんど売場されなくなって, 挫いてもばらばらと状態に出土して, 解体自国が認められる.ヨコンデ食料になっていたのだ.これからも, 彌生人がジョモングインとは違う民族だったことが推測される.彌生人は, 水田の稲農業農耕の技術だけだけではなく, 識見習慣も持って来たのだ.狩猟民には貴重な存在である開度, 農耕民においては家守る犬か, 食用ヶとして外に役に立たなかったからあるでしょう.
3.肉食を続いた日本人
「狩猟採集のジョモングインは肉を食べていた.仏教伝来によって, けだものを殺してその肉を食べ物(日)のは禁止された.明治以前の日本社会は全国的に獣肉式に対する強いタブーがあった.仏教の不殺生の教えることと信徒的な汚くなって意識が融合した結果, 獣肉を食べることはドロウォジョとして忌避になったからだ.辛うじて明治維新によって, 奈良時代以後行われなかった肉食が解禁された.」と言うことが一般的な理解であるでしょう.明治天皇が率先垂範して牛肉料理を試食する , ウネムビが大流行して文明開化の代名詞でもなったとも言う.しかし, そこは 「表面」と「本心」を駆使するのが自慢の国民性を遺憾無く発揮して,日本人は陰では肉をずっと確かに食べていたのだ.
676年(テンムチォンファング 4年) 4月 17日の肉食禁止の組には,
京人, ゾゼグックワル, 自今以後, 膳所し難いで, マックゾウリと落とし穴, 級の時旗槍支流.役4月朔以後, 9ワルサブである以前, マックチビミサギリ・量, チァマックシック牛馬犬@ギェジユック.以外不在今隷.若いユボムザジェだ.
どうな. がまどろむ, ああ, 長芋, 犬と猿, ニワトリの五つ種類家畜の肉食を禁止している.その理由は 「犬は夜にほえて家守る犬の役に立って, ニワトリは夜明けを告げて人々を起こして, 牛は田畑を耕作するのにくたびれて言葉は人を乗せて旅行やけんかに働いて, 猿は人に似たり寄ったりであるので食べてはいけない」と言う 「涅槃頃」の教えるによったようだ.
しかし, ここで重要なことは, 肉食禁止には期間が設定されていること, また食べてはいけない肉の種類が五つ種類家畜に限定されているのだ.そしてなによりも重要な点は,禁止する弔歌出たと言うことは社会の現実として禁止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行為をしていたと言うのだ.が禁止令は農繁期における家畜の利用だと言う功利的な時点に根拠して出たことではないかという思ってもある.また, 当時行われていた信徒や稲作農耕の儀礼との関連による肉食禁止とも考えられる.Harada老父オさんによれば, 日本においては, 元々稲作と動物の肉とは対立するのではなくて, 動物の神さまへのゴングフィは農耕の推進で繋がれると思われていた.それが律令体制だと言う中央集権的国家建設の過程で稲作に日を成すことだという思想で切り替えたと言う.律令国家は, 水田の稲農業を基盤で立てることができて天皇を微意最高師弟者と評価した.そして, 仏教思想で人民を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しようと思う.その所では, 三輪肉とは対極にある食べ物と把握されて仏教道徳の殺生戒によって肉食は排除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なった.しかし, の上で説明したところのように肉食禁止のまどろむ絶対的肉食禁止令ではない.ここには水田の稲農業の期間だと言う限定があって, 旧石器時代以来一番選好された鹿といのししが出ない.それに肉食の禁止は徹底的にしなかったようで, その後も肉食禁止令が繰り返し始まりある.
平安朝初期の死が天皇の頃の記録に 「今日のトヨアケ(わの明り)は漢方社」(これ)とある.帰国した留学僧侶を呼んだ宮廷のトヨアケは中華料理だった.中華料理には肉料理は不可欠だが, 一番肉を食べてはだめ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僧侶を呼んだ宴会に対してさえ肉を出していることだから, 肉食を気を使っていたとは考えられない.しかし, その後どのようにしたことか, 肉食のタブーは僧尼(勝と女僧)から貴族に及び, 終わりには庶民で, 長い歳月をかけて徐徐に拡がった.
しかし, 中世に至っても肉食の絶対的禁止は成り立たなかった.1487年に成り立った 「空と地の神さまドボックギリョングビチォ」では 「4足物食用支社.ロックゾワンホリギョンハ 70イルタンジ.ハブファハ五十な.またハブファハサブイルだ.次期したジェントルマンにチァムイェスベカラズ.」とある.これも, 繰り返せば 70日を経過するとジェントルマンに参詣しても良くなる.以外にも幾多の復碁領が出ていて肉食がドロウォジョだという思想は完全するように定着しなかった可能性が高いと考えられる.
室町時代, 日本へ来たクラッセの 「日本西橋社」には, 「金持ちは牛島美食に誇って, その食卓に六軒を山盛りみたいに栄えて立てて吸もエジプトのピラミッドの女やって.また六車, さじ, 小刀をヨングヒアンダ, ただ御箸をヨングヒだと六車に台 」(これ)とある.南蛮貿易が栄えるようになれば, 肉食の望むことが輸入されてクリスチャンオナの間に流行った.
プングジックゾンググォン時代に日本に滞在していた宣教師ルイス・プロ椅子は 「日本人は野犬や鶴, 隊員, 猫, 生の海草等を食べる」と書いていて当時の日本では肉食は普通のもののようだ.また特に改稿気息に対しては 「私たちは犬は食べるの以外に, 薬味の中身を食べる.彼らは薬味の中身を食べないで, 家庭薬として格好よく犬を食べる」とも言うので , 日本人は略式室称して犬を食べていたのようにする.
4.料理話
江戸初期の年号 20年(1643), 徳川イエミスの時代に使われた 「料理話」は, 江戸時代初期の代表的な料理書で, 作法を主にしたのではなくて, 料理材料や料理法を具体的に使った一番古い書籍だ.室町から近世初期にかけて上流社会に伝え受け継がれて来たクッキングの集大成だという第一級の料理書だ.刊行本には理判も多くて, 広く流布したことが訪問する.著名な本であることにもかかわらず, 茂朱サヤマで使われたと言う以外, 著者の身分や名前は分からない.その内容から, かなり高い身分にあったのではないかも言われる.内容は 20の部に分けることができて海の魚, 李所区社, 淡水魚, 組, 数, きのこ, 野菜の 7部に対しては, 材料名とその料理人のみを主語 8項目から以下, おつゆの部, の部などは代表的なクッキングを具体的に, 最後は満文書の部としてその以外の関連事項を書いている.
「料理話」中に 「鹿:おつゆ, やりがいやわ, 乗せて, 日好き.狸:おつゆ, 出ない金額山草みそ, いのしし:おつゆ, 出ない金額, 乗せて, 姜嘘:やりがいやわ, 吸いこんでの, 出ない金額,犬:吸いこんでの, やりがいや木 」と肉料理の方法を伝えている.やりがいや木は帆立貝と同じく大きい貝殻を鍋にして焼く料理だ.劣文の後に食べ物の等級設定が記録されていてけだものの中に 「中食の分」として 「句(犬) 六」という技術を見られる.これと同じに他の東アジア帝国のように, 我が国には識見文化はまともに存在していたのだ.
多異屠牛だユザンの「落ちた穂集」には, 「私たち若い頃までは, 当代の常民たちに語だと, 犬だと言うことは表示ドムルゲだと, 見てダングブルレシンフ.弱いまさか見て当文案差し上げるには, 無価常民たち皆下たちの食べ物には犬よりトイオナである品物はムレジワだと, 動向になって御機嫌を伺い, 目立つとおりにぶっ殺して, 褒め言葉社に添付□義道理に維持社なの」(江戸の常民たちに犬はほとんどなかった.そうだとすることも, 無価(の方)便常民たち皆, 下たちの食べ物としては犬よりすぐれたないと思われて冬興奮すれば, 捜し出し次第にうっておかゆよ食べたからだ.)(これ)と記録されている.「犬がいたと言えば, 「これ以上のおいしいことはない」と人々に思うことができて直ちに食べられてしまう」状況だったことだ.
また, サツマにおける識見は有名ようで , 呉誤打卵胞(呉誤打難保)(1749-1823)の 「1火一言保有」には 「サツマで句(犬)を食べ物する仕事」と言う項があって, 「君の頃ご飯(子犬ご飯)」が紹介されている.犬のお腹を割いてミールを入ることができて蒸し焼きにすることで, シマズボンフも食べたと言う.
5.ああ, お金, ウォン, 昆虫に逝虫類, なんでも食べた日本人
(古代の養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