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日本人のための教育 - 百済大殯

일본인들이 정말 무식해서 헛소리를 하는지 왜곡을 위해 거짓말을 나열하는지 정말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日本人たちが本当に無識でうわごとをするのか歪曲のために嘘を並べるのか本当に判断がつかない場合が多いです.代表的事例を紹介したところでします.

 

문제의 발단은 이것으로 부터
問題の発端はこれから

 

島根眞人, 大原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大原真人(おほはらのまひと)。
諡は敏達の孫、百済王(くだらのみこ)より出づ。続日本紀に合へり。
島根真人(しまねのまひと)。
大原真人と同じき祖。百済親王(くだらのみこ)の後なり。

 

kouzukenosuke 04-05 14:30:07 
(쿠다라)백제왕((쿠다라)백제 황태자)은, 비다쓰 덴노의 손자로, 당시의 습관으로 유모 마을의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百済王(百済親王)は、敏達天皇の孫で、当時の習慣で乳母の里の名が付けられたと思われる。

 

일본인의 두뇌는 이토록 사물을 편향되게 바라 보는 것 같습니다.
日本人の頭脳はこのように事物を偏向されるように眺めるようです.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다츠 천황의 손자인 조메이(舒明) 천황이 백제 대정궁(大井宮) 백제 대사(大寺)를 건립하는 등 유난히 백제관련 토목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서거한 후 백제대빈(百濟大殯 : 백제의 3년상 장례의식)으로 안장되었습니다.
『日本書紀』によれば, 敏達 天皇の孫である舒明 天皇が百済大井宮 百済大寺を建立するなど特に百済関連土木事業をたくさんしました. そしてゾメイ天皇はバックゼグングで逝去した後百済大賓(百済大殯 : 百済の 3ニョンサング葬礼意識)に鞍されました.

 

어떻습니까?
舒明 天皇은 百済大井宮 百済大寺를 짓고 百済宮에서 逝去, 百済大賓에 안치되었다.
여기에서 용감하게 울부짖는 일본인의 주장을 감상해 봅시다.
どうですか?
舒明 天皇は 百済大井宮 百済大寺を作る 百済宮で 逝去, 百済大賓に安置された.
ここで勇ましく泣き叫ぶ日本人の主張を鑑賞して見ましょう.

 

kouzukenosuke 04-05 16:19:08
百済宮は、百済川のほとりにあったから付けられた名前。地名から名付けられた。他の多くの宮も地名から付けられた。
(쿠다라)백제궁은, (쿠다라)백제강의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붙일 수 있었던 이름.지명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다른 많은 궁도 지명으로부터 붙일 수 있었다.

kouzukenosuke 04-05 16:22:14
百済大殯とは、百済式葬儀ではない。舒明 天皇は、百済宮で崩御し、宮の北に殯宮を設けた。これを百済大殯という。
(쿠다라)백제대빈이란, (쿠다라)백제식 장의는 아니다.조메이 덴노는, (쿠다라)백제궁으로 붕어 해, 궁의 북쪽으로 빈궁을 마련했다.이것을 (쿠다라)백제대빈이라고 한다.

kouzukenosuke 04-05 19:21:51 
百済大殯が百済式葬儀だという根拠を提示できず逃亡したままかwwww早く、百済大殯が百済式葬儀だという証拠を出せよ。
(쿠다라)백제대빈이 (쿠다라)백제식 장의라고 하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도망한 채로인가 wwww 빨리, (쿠다라)백제대빈이 (쿠다라)백제식 장의라고 하는 증거를 내.

 

逃亡! 証拠! 울부짖는 모습이 매우 가련하므로 아까운 시간을 투자, 교육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逃亡! 証拠! 泣き叫ぶ姿が非常に可憐なので惜しい時間を投資教育時間を持つようにします.

 

kouzukenosuke 04-05 16:19:08,kouzukenosuke 04-05 16:22:14
百済川의 주변에 세워졌기 때문에 단순히 지명을 빌려 百済宮! 宮의 北에 殯宮을 설치했다。그것을 百済大殯이라고 한다.
殯宮을 百済大殯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지명을 차용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일본의 천황이 백제장례의식을 했다는 것은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겠죠?
百済川の周辺に建てたから単純に地名を借りる百済宮!宮の北に殯宮を設けた。これを百済大殯という。
殯宮を 百済大殯だと骨切って主張する理由は何でしょうか?
単純に地名を借用したと主張するたいこと.
日本の天皇が百済葬礼意識をあげたということは天皇が百済人という確かな証拠になるからでしょう?

 

다음은 殯에 대한 설명입니다.
次は 殯に対する説明です.

殯(もがり)とは、日本の古代に行われていた葬儀儀礼で、死者を本葬するまでのかなり長い期間、棺に遺体を仮安置し、別れを惜しみ、死者の霊魂を畏れ、かつ慰め、死者の復活を願いつつも遺体の腐敗・白骨化などの物理的変化を確認することにより、死者の最終的な「死」を確認すること。その棺を安置する場所をも指すことがある。殯の期間に遺体を安置した建物を「殯宮」(「もがりのみや」、『万葉集』では「あらきのみや」)という。
빈(모가리)이란, 일본의 고대에 행해지고 있던 장의 의례로, 사망자를 본장 할 때까지 의 것인지든지 긴 기간, 관에 사체를 가안치해, 이별을 아까워해, 사망자의 영혼을 외경심, 한편 위로해 사망자의 부활을 바라면서도 사체의 부패・백골화등의 물리적 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써, 사망자의 최종적인「죽음」을 확인하는 것.그 관을 안치하는 장소도 가리키는 일이 있다.빈의 기간에 사체를 안치한 건물을「빈궁」(「모가리노미야」, 「만엽집」에서는「아라키노미야」)이라고 한다.

 

『隋書』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東夷 高麗(後の高麗王朝のことではなく高句麗のこと)には、死者は屋内に於て殯し、3年を経て、吉日を択(えら)んで葬る、父母夫の喪は3年服す「死者殯於屋内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とある。これらの記録から、倭国・高句麗とも、貴人は3年間殯にしたことが窺える。
「수서」권 81렬전 제 46 동부지역 무사 고려( 후의 고려 왕조의 일로는 없게 고구려)에는, 사망자는 옥내에 어라고 빈 해, 3년을 거치고, 길일을 택(네등) 그리고 매장하는, 부모남편의 상은 3년복「사망자빈어옥내경 3년택길일이장거부모급부지상복모두 3년 형제 3월 첫종고 울음장칙고무작요이송지매흘실취사망자생 시복완거마치어묘측회장자쟁취이거」라고 있다.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야마토국・고구려 모두, 귀인은 3년간빈으로 했던 것이 엿볼 수 있다.

 

百済大殯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 봅시다.
百済大殯に対してもうちょっとよく見ましょう.

만엽집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일본인에게도 꽤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일본어에 능통하지 못한 저는 키워드 몇개만 다음에서 추려내 보겠습니다.
万葉集の出した理解することは日本人にもかなり難しい事のようです.
日本語にうまくない私はキーワードいくつだけ次で選び出す見ます.

 

高市皇子(たけちのみこ 654年 - 696年)は日本の古代の皇族。天武天皇の第一皇子。子に長屋王、鈴鹿王など。
高市皇子の壬申の乱での活躍
『万葉集』巻二 柿本人麻呂作の高市挽歌

高市皇子の城上の殯宮の時に、柿本朝臣人麻呂の作る歌一首 并せて短歌

かけまくも ゆゆしきかも言はまくも あやに畏き 明日香の 真神の原に ひさかたの 天つ御門を 畏くも 定めたまひて 神さぶと 磐隠りますやすみしし 我が大君の きこしめす 背面の国の 真木立つ 不破山超えて 高麗剣 和射見が原の 仮宮に 天降りいまして 天の下 治めたまひ食す国を 定めたまふと 鶏が鳴く 東の国の 御いくさを 召したまひて ちはやぶる 人を和せと 奉ろはぬ 国を治めと 皇子ながら 任したまへば大御身に 大刀取り佩かし 大御手に 弓取り持たし 御軍士を 率ひたまひ 整ふる 鼓の音は 雷の 声と聞くまで 吹き鳴せる 小角の音も敵見たる虎か吼ゆると 諸人の おびゆるまでに ささげたる 幡の靡きは 冬こもり 春さり来れば 野ごとに つきてある火の風の共 靡くがごとく 取り持てる弓弭の騒き み雪降る 冬の林に つむじかも い巻き渡ると 思ふまで 聞きの恐く 引き放つ 矢の繁けく 大雪の 乱れて来れ まつろはず立ち向ひしも 露霜の 消なば消ぬべく 行く鳥の 争ふはしに 渡会の 斎きの宮ゆ 神風に い吹き惑はし 天雲を 日の目も見せず 常闇に覆ひ賜ひて 定めてし 瑞穂の国を 神ながら 太敷きまして やすみしし 我が大君の 天の下 申したまへば 万代に しかしもあらむと 木綿花の栄ゆるときに 我が大君 皇子の御門を 神宮に 装ひまつりて 使はしし 御門の人も 白栲の 麻衣着て 埴安の 御門の原に あかねさす日のことごと 獣じもの い匍ひ伏しつつ ぬばたまの 夕になれば 大殿を 振り放け見つつ 鶉なす い匍ひ廻り 侍へど 侍ひえねば 春鳥のさまよひぬれば 嘆きも いまだ過ぎぬに 思ひも いまだ尽きねば 言さへく 百済の原ゆ 神葬り 葬りいまして あさもよし 城上の宮を 常宮と高く奉りて 神ながら 鎮まりましぬ しかれども 我が大君の 万代と 思ほしめして 作らしし 香具山の宮 万代に 過ぎむと思へや 天のごと振り放け見つつ 玉たすき 懸けて偲はむ 畏かれども
다케치노미코 성상의 빈궁때에, 카키모토 아손(계급 명칭)인마려가 만드는 노래 일수병키라고 단가
내기해 귀댁도 말은 뿌리는 것도 무늬에 외 나무 아스카의 마가미의 원에 히사카타의 하늘개고몬을 황송하게도 정한 마비라고 신와 반은쉬어 이바지해 우리 대군의 군령 적시는 배면의 나라의 마키 서는 후와산 넘어 고려검화 쏘아 맞혀 봐가 원의 별궁에 강림지금 해 천하 치료한 마비식국을 규정문득 닭이 우는 동쪽의 나라의 전쟁을 소혀마비라고 는 깨는 사람을 화좁은 해협봉나라를 치료해와 황태자면서 임대몸에게 대도 잡기패인가 해 대손에 활을 손에 듦지 더해 군사를 비율마비정 거절하는 북의 소리는 번개의 소리라고 들을 때까지 불어 명 다투는 코스미의 소리도 적견인 범이나 후와 여러사람까지 내림인 번의 미 나무는 건조 표고버섯 숲봄 가 오면 들 마다 다해 있는 불의 바람의 모두 나부끼지만 오덕 쥘 수 있는 궁미의 소너눈 내리는 겨울의 숲에 가마일지도 있어 감아 건너면 사까지 문 나무의 무섭게 당겨 발하는 화살의 번구폭설이 흐트러져 래는 두 서 향히 하지도 이슬과 서리의 소소구 가는 새의 쟁젓가락에 도회의 금기나무의 궁카미카제에 있어 불어 혹젓가락천운을 일광도 보이지 않고 영원한 어둠에 복히 결실히라고 정하고 해 일본을 신이면서 태 깔아서 쉬어 이바지해 우리 대군의 천하신반다이 밖에 하지도 아와 무명꽃의 영풀어에 우리 대군 황태자의 고몬을 신궁에 장틈낚시라고 사젓가락 해 고몬의 사람도 백고의 마이 입어 식안의 고몬의 원에 꼭두서니 가리키는 날마다 짐승 토산물 있어 포히복질의 저녁이 되면 오토노를 거절해 발설할 수 있는 보면서 메추라기 이루는 있어 포히회전사무라이사무라이히 있지 않으면 춘조의님이야 히 젖어 한탄도 아직도 지나지 않는에 사끈 아직도 다하지 않으면 말에 구(쿠다라)백제의 원신도의 의식에서 행하는 장례식매장해 있어서 아침도 좋아 성카미노미야를 죠구와 비싸게 드려라고 신인 무늬진꾸짖어도 우리 대군의 반다이와 사 가지고 싶은 해 작등 사자 향구산의 궁반다이에 과의무와 사방 하늘의 마다 거절해 발설할 수 있는 보면서 구슬 더하는 나무 걸어 시외그들

 

「百済の原」は通説では現在の広陵町百済の地に比定されてきた。しかし最近これに異を唱える学者が現れた。和田苹氏はこの歌から「百済の原」は香具山周辺を指していると言っている。たしかに広陵町百済は高市皇子の宮からはかなり離れており、この歌の印象にはそぐわない。またその途中には藤原の宮もあり、その宮が歌の中に出てこないというのは人麻呂の歌としては不思議である。特にこの歌の冒頭には「真神の原に ひさかたの 天つ御門を」と天武天皇の飛鳥浄御原の宮については述べているからなおさらである。ここから「埴安の宮」から「城上」までには藤原の宮がなかったとの印象を受ける。
「(쿠다라)백제의 원」은 통설에서는 현재의 코료쵸 (쿠다라)백제의 땅에 비정 되어 왔다.그러나 최근 이것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학자가 나타났다.와다평씨는 이 노래로부터「(쿠다라)백제의 원」은 향구산주변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분명히 코료쵸 (쿠다라)백제는 다케치노미코의 궁에서는 꽤 떨어져 있어 이 노래의 인상에는 맞지 않다.또 그 도중에는 후지와라의 궁도 있어, 그 궁이 노래안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인 마려의 노래로서는 이상하다.특히 이 노래의 모두에는「마가미의 원에 히사카타의 하늘개고몬을」이라고 텐무천황 아스카 죠원의 궁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여기로부터「식안의 궁」로부터「성상」까지는 후지와라의 궁이 없었다고의 인상을 받는다.

和射見(わざみ)は、岐阜県不破郡関ヶ原町関ヶ原付近と考えられています。大垣市青野町あたりだという説もあります。
万葉集の#199(高市皇子の挽歌)に登場する「和射見が原の行宮(かりみや)」は、壬申の乱のときにこの地に設けられた行宮(かりみや)と思われます。
和射見은,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쵸 세키가하라 부근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오가키시 아오노쵸 근처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만엽집의 것#199(다케치노미코의 만가)에 등장하는「和射見가 원의 행궁(행궁)」은, 임신의 난 때에 이 땅에 설치된 행궁(행궁)이라고 생각됩니다.


高麗剣이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있겠지요?
高麗剣が象徴する何なのかがありますか?

 

真神の原 飛鳥寺の蘇我入鹿の首塚。後方は蘇我一族の屋敷があったとされる甘橿の丘
마가미의 원아스카 사원의 소가노 이루카의 수총.후방은 소가 일족 저택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감강의 언덕

 

奈良県明日香村、飛鳥寺・法興寺跡一帯の地。
飛鳥真神の原の中心部であり、蘇我氏の氏寺・飛鳥寺や甘橿丘、さらに蘇我馬子の大邸宅があった、嶋宮にも非常に近い。
아스카 마가미의 원의 중심부이며, 소가씨의 일족의 명복을 위한 절・아스카 사원이나 감강구, 한층 더 소가노 우마코 대저택이 있던, 시마궁에도 매우 가깝다.

『新撰姓氏録』は蘇我氏を皇別(歴代天皇から分かれた氏族)に分類している。
「신선 성씨록」은 소가씨를 황별(역대 천황으로부터 나뉜 씨족)로 분류하고 있다.

日本書紀にも、百済人として満智という名がいくつか出てくるので、百済系の名前であることがわかる。さらに、蘇我家七代の系図を順番にならべると、満智-韓子-高麗-稲目-馬子-蝦夷-入鹿となり、母が渡来人の場合に使われていた韓子や朝鮮半島出身を暗示する高麗という名前がつづく。
일본 서기에도, (쿠다라)백제인으로서 만지라고 하는 이름이 몇개인가 나오므로, (쿠다라)백제계의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게다가 소가가7대의 계도를 차례로 늘어놓으면, 만지-한자-고려-도목-마부-에조-입록이 되어, 어머니가  도래인의 경우에 사용되고 있던 한자나 한반도 출신을 암시하는 고려라는 이름이 계속된다.

 

真神の原!
백제 도래인의 대표적인 존재 蘇我氏! 그들이 真神の原에 살고 있었던 이유도 깊이 생각해 봅시다.
百済到来人の代表的な存在 蘇我氏! 彼らが 真神の原に暮すあった理由も深く考えて見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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