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아마 ochi님은 ibm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을 하실 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倭는
아마 AD 3-4세기에 열도에 진출했던 가야인 신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ibm이 인조이 시절 자주 연립 방정식에 비유했던
isiwatari sinichiro 氏 방법론에 따르면 단순히 신라 가야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plus 알파가 있는 스토리입니다

ochi님이 최근 제기하신 광개토대왕 시절 과연 열도에서 반도로
대규모 군단을 파견할 정치 세력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

그동안 ochi님이 보여주신 고고학에 충실한 고찰을 하시는 자세를 볼 때에
고고학 아마츄어인 ibm이 ochi님의 결론에 대해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주제넘는 이야기가 될 것 같고 ochi님의 결론을 받아들여 거대한 권력
체계가 없어도 열도에서 반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
Isiwatari sinichiro 氏 방법론에 따라서 설명을 해 봅니다.


일단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倭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방의 경계까지 진출했다고 하니.. ( 참고로 ibm은 대방의 경계를 현재의 발해만
부근으로 봅니다 ) 대규모 원정입니다.
비문에는 노획한 군사 장비의 숫자가 상당했다고 기록 군대의 숫자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ochi님이 고고학적 견지에서 그런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라는
의문을 가지시게 된 것이고

한반도 史書 삼국사기 or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正史에도 이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부분이 ochi 님의 의구심을 증폭시켰을 것입니다
ochi님의 이런 의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AD 4세기에 정말로 열도에서 반도에 대규모 군단을 출병한 기록이 없습니까?

매우 기초적인 부분에서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들도 중국 기록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만, 싸움의 불씨인 北史 해석을 다시 이야기 합니다

北史에 倭人은 맨발로 다니고 특히 ochi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기에 있어서
뼈로된 화살 촉을 사용하고 전쟁은 하지 않는다. 라고 나옵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에 AD 4-5 세기에 철제 무기가 묻힌 유적들이 많이 나오므로
北史가 틀린 것입니까?

이것에 대한 ibm의 답은 알고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北史는 열도의 상황에
대해서 열도의 원주민 倭人도 기록하였고 동시에 열도를 大國으로 만든 신라
백제인의 존재도 기록하였습니다.

맨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밥을 먹고 뼈로된 화살촉을 가진 원시 시대를 이제 막
벗어난 倭人은 선주민 ainu에 대한 기록이고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敬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인이 倭를 큰 나라가 되게 하였고 ( 신라 백제인은) 진기한 물건이
많아 그 물건들을 숭배하고 항상 사신이 왕래했다..라고 ibm의 해석에 기초한
열도의 또 다른 세력 신라 백제인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동의하시지 않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
일단 ibm의 생각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 보면 열도의 뼈로 된 화살촉을 무기로 하고 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北史에 기록된
ainu 세력이 바다 건너 반도를 공격하고 멀고먼  발해만까지 원정을 간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열도 안의 신라 백제인을 의심해야 하는데 기록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한번 문제 제기를 했던 부분..

北史 신라 기록을 보면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그 왕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바다로부터 신라로 들어가고———(A)

처음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B)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시기에 부역을 피해서 뒤에
돌아와서 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백제를 공격하고 (因襲百濟)—- (c)

가야국에 부용하였다.

A+C 는 광개토대왕 비문 辛卯年 기록의 倭人度海 기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통해서 신라로 들어간...즉
해외에 거점을 두었던 세력입니다. 하와이나 제주도는 아닐 것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 열도에서는 신라나 백제와 유사한 유물들이
발굴이 되고 있습니까.. 이 세력은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진사왕 아화왕의 교체
시기 백제의 내란에 개입한 것입니다.

AD 4세기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왕이 戰死하고 북쪽으로 밀려났던
고구려인들은 열도에서의 가야 백제의 진출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세력의 정체를 정확히 몰랐던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열도에서 건넜다는 것 때문에 단지 倭人이라고 비문에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상당히 plausible 하지 않습니까..


가설의 검증은 늘 같습니다. 이런 스토리를 바탕으로 僞史를 창작해야 한다면..
그러면 여러차례 이야기 드렸던 安羅 이야기가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처음에 이야기 드렸던 plus 알파 이야기를 드립니다 비문의 辛卯年 391에
해당하는 연대가 연대를 올바로 추정하면 應神 3年 부근이 됩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是歳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 
嘖譲其无禮状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 便立阿花爲王而歸

 

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 등은 단순한 가야 세력이 아니라
七支刀를 들고 처음에 도래한 백제왕족 物部氏 이것이 가야에 종속된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여기까지만..


広開土大王碑文の 倭

多分 ochi様は ibmが問題に対してどんな答をなさるか
分かると思います. そうです広開土大王碑文の 倭は
多分 AD 3-4世紀に列島に進出した伽揶である新羅人だと思っています
しかし ibmがエンジョイ時代よく連立方程式に比喩した
isiwatari sinichiro 氏 方法論によれば単純に新羅伽揶人だと
夏期よりは plus アルファがあるストーリーです

ochi様が最近申し立てた広開土大王時代果して列島から半島で
大規模軍団を派遣する政治勢力があったのか? する疑問...

その間 ochi様が見せてくれた考古学に充実な考察をなさる姿勢を見る時に
考古学アマチュアである ibmが ochi様の結論に対して評価をするというのは
非常にでしゃばる話になるようで ochi様の結論を受け入れて巨大な権力
体系がなくても列島で半島に大規模軍隊を派遣するようになる特殊な状況に対して
Isiwatari sinichiro 氏 方法論にしたがって説明をして見ます.


一応広開土大王碑文には 倭が高句麗を攻撃したことは事実です. だけでなく
大房の境界まで進出したと言うの.. ( 参照で ibmは大房の境界を現在の渤海湾
近所で見ます ) 大規模遠征です.
碑文には捕獲した軍事装備の数字が相当だったと記録軍隊の数字も少なくないです

ここに対して ochi様が考古学籍見地でそんな勢力が見えない. という
疑問を持つようになったことで

韓半島 史書 三国史記 or 三国有史そして中国の 正史にもこんな話は
見えないです. 多分こんな部分が ochi 様の疑問を増幅させたはずです
ochi様のこんな疑問は当たり前なのです.

ところが...

ところが...

AD 4世紀に本当に列島で半島に大規模軍団を出兵した記録がないですか?

非常に基礎的な部分で日本人そして韓国人たちも中国記録に対して深刻な
誤解をしているからですが, けんかの火種である 北史 解釈をまた話します

北史に 倭人は裸足で通って特に ochi様が重要に思う武器において
ピョロドエン矢燭を使って戦争はしない. と出ます.

考古学籍で見る時に AD 4-5 世紀に鉄製武器のつけた遺跡たちがたくさん出るので
北史が違ったことですか?

これに対する ibmの答は分かっていると思います. 北史は列島の状況に
対して列島の原住民 倭人も記録したし同時に列島を 大国で作った新羅
百済人の存在も記録しました.

裸足で歩いて通って手でご飯を食べてピョロドエン矢先を持った遠眼時代をもう幕
脱した 倭人は先住民 ainuに対する記録で

新羅百済皆以倭為大国, 多珍物, 敬仰之, 恒通使往来

新羅百済人が 倭を大きい国になるようにしたし ( 新羅百済人は) 物珍しい品物が
多くてその品物を崇拜していつも使臣が往き来した..と ibmの解釈に基礎した
列島のまた他の勢力新羅百済人があったと思って見ます

もちろんこの部分に対してはまだ同意しないことは分かっていますが ^^;
一応 ibmの考えが当たる仮定したら

考えて見れば列島の骨になった矢先を武器にして戦争をしなかったと 北史に記録された
ainu 勢力が海向こう半島を攻撃してはるか遠く  渤海湾まで遠征を行くという
話は現実的ではないです

それなら列島の中の新羅百済人を疑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記録がありますか?


だねあります..

これはもう一度問題申し立てをした部分..

北史 新羅記録を見れば


其王本百済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国. 初附庸于百済,
百済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帰之, 遂致強盛. 因襲百済,
 附庸於迦羅国焉


その王は元々百済人として

海から新羅に入って行って ------(A)

初めには百済の属国であって -----(B)
百済が高句麗を征伐する時期に賦役を避けて後に
戻って来て剛性するようになった,

したがって百済を攻撃して (因襲百済)--- (c)

伽揶国に芙蓉こんにちはだった.

A+C 増えた広開土大王碑文 辛卯年 記録の 倭人度海 記録に
あたるのです.. 海を通じて新羅に入って行った...すなわち
海外に拠点を置いた勢力です. ハワイや済州島ではないだろう
考古学籍にこの時期に列島では新羅や百済と類似の遺物たちが
発掘が出来ていますか.. この勢力は百済を攻撃して百済陳謝王アファワングの入れ替え
時期百済の内乱に介入したのです.

AD 4世紀に百済との戦争で王が 戦死と北に押し寄せた
高句麗人たちは列島での伽揶百済の進出が分からなかった可能性が高いです
が勢力の正体を正確に分からなかった当時の高句麗人たちは
列島で渡ったということのためただ 倭人だと碑文に記録をした
のです


よほど plausible しないですか..


仮説の検証は常に同じです. こんなストーリーを土台で 偽史を創作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ら..
それでは何回も話申し上げた 安羅 話が日本書紀に出ます

初めに話申し上げた plus アルファ話を申し上げます碑文の 辛卯年 391に
あたる連帯が連帯を正しく推正すれば 応神 3年 近所になりますか..

こんな話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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