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다이쇼 텐노

 

 

 

 한국어를 공부한 천황
 
 

망모루가 다이쇼 텐노 팬이 되어 버린 이유는,
인민에게 엄숙하게 군림한 부친·메이지천황에게의 반발일까하고 생각될 정도의
자유분방, 만사 간략, 활발 다변인 삶의 방법 만이 아니다.
실은, 「다이쇼 텐노」(하라 타케시저아침해 추천도서)에 의하면,
건강자의 가인(다이쇼 텐노)은 한국어에 평범치 않은 관심을 대고 있던 것 같다.
한국어를 공부한 천황은 이 사람 만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한국어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이토히로부미의 권모술수로 꽉 눌린 한국 여행이다.
이 여행으로, 27세의 가인(후의 다이쇼 텐노)이

이왕의 장남인10세가 귀여운 리은(이운)에

친밀감을 안았던 것이다.
이 아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가인이 이 때 서울에서 리은(이운)을 만났을 때,
즉시

「통역을 맡은 비서관에 대해서, 한국어에 대해 질문하고 있어」

싶다고 하다.

 

다음 해리은(이운)이 도쿄에 유학해 오면,
가인(28)은 번역관에

「가끔 한태자를 만나기 때문에 조금 조선어를 연습해 보고 싶지만,
무엇인가 책은 아닐까.
어느A 시종까지 보내 주었으면 한다」

(이)라고 부탁하고 있다.

 

또, 리은(이운)을 만났을 때는,
나중에 번역관에
「오늘의 이야기의 불평을 조선어의 언문(한글 문자)으로 쓰고,

거기에 발음과 번역문을 붙여 내밀도록(듯이)」
(와)과 명했다고 한다.


망모루의 경험으로부터 말해도 이것은 상당히 빠질거야.

이야기는 수십년 후로 날지만,
마키노 노부아키 내무 대신의 각명인 일기에는 다음일열매가 기재되어 있다.

1921년, 다이쇼 텐노(42세)의 병상은 악화되고 있었다.
의식도 분명히 없는 것이 적지 않았다.
8월에, 이왕세코·이은(이운 23, 4세)가,
전년 결혼한 (분)편 아이의 부모님·배시타미야 부부와 함께 천황을 문병했다.

천황은, 리은(이운)을 그의 유소의 무렵부터 알아 해,
「자신 조선어를 한다라는 겸한 포부도 있어」,
한편, 18세나 연하이니까 사양도 필요 없다고 하는 것으로

그 내방을 대단히 기다려 바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리은(이운)이 8월 19일에 찾아 왔을 때는
「사나가려고 할 때 귀댁, 말의 출자갈 밖에」,
다이쇼 텐노는 그에게 한마디도 말을 거는 것이 없었다.

 

이 기술에는, 4일 후의 일기에 보충이 있다.

「8월 19일의 기사에 이왕·세코배알때에

말씀잎을 없앤 일에 인() 째인이,
그 후, 카이에다 시종의 이야기에,  상(여주인)에서(보다)

무엇인가 해 해 나무 말씀잎을 어 발해 되어인 좋아.
아마 조선어의 작정에서 이야기든지라는 자 되지 않아라는 추측이든지.」
가인의 한국어력은 수십년에 이른 것이다.

 

가인의 황태자 시대 및 천황 시대는,
러일 전쟁, 한국의 식민지화, 3·1 독립 운동으로
가장 꺼림칙한 일한 관계의 출발로부터 완성의 시대였다.
이 역사의 흐름의 의미는 가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인의 변호를 하는 것 등은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그런 중에, 반드시 이해타산 빼고,
단지 단지 리은(이운)과의 회화를 기대해

한국어를 공부한 가인을 생각하면,
바보같은 망모루는 무심코 눈물지어 버린다.

http://mamo.huu.cc/bd00112.htm 

 

 


 

 

 


한국 황태자를 불러
다음는, 메이지 31년, 황태자 30세.
하야마의 황실의 별저에 한국의 황태자를 초대되고,
매화꽃 놀이를 하셨을 때의 시.

 

하야마남원여      하야마남원에서  

한국 황태자 동간매   한국 황태자와 동[과도]에 매화를 간
불관꽃샘 추위 히세츠경사    관 하지 않고 꽃샘 추위 히세츠경사 되는에
희군 내방잠정차    기뻐하는 너내방해 잠시 차를 정를
하야마환회흥 무슨진    하야마의 환회흥무엇인가 다하지 않아
공상 원매기수화    모두 상 원매기 이츠키의 꽃

 

이 시는 한일합방의 2년전, 한국 황태자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어,
당시 12세.그 후도 쭉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
나시모토의 궁의 왕녀와 결혼, 육군 중장까지 올라졌다.

이 작품을 보면, 병합 전야에 메이지 정부가 준비 했는지 모르지만,
순수하게 한국 황태자를 불러 환영받은 심정이 잘 나와 있고,
정치의 색조등 느끼게 하지 않는,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http://www.zen-kanshiren.com/article/project/lecture/33.html

 

 

 

 

리방자

(마사코, 이·반쟈, Lee Bangja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은)는,
일본의 황족.구대한제국의 원황태자로 일본의 이왕이 된 리은의 왕비.

쇼와 20년(1945년) 8월 15일의 종전에 의해,

왕공족의 신분을 상실해 1 재일 한국인이 된리은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승만에 의해 귀국을 방해
(귀국에 의해서 왕정 복고가 되어

자신의 지위가 위협해진다고 생각했다고 말해진다)


쇼와 35년(1960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이승만 퇴진 후의 쇼와 38년(1963년),
박정희대통령의 조치로 부부는 간신히 귀국을 완수한다.

쇼와 45년(1970년), 리은서거.

 

한국에 귀화한 (분)편 아이는,

지적 장해아, 지체 부자유아의 원호 활동에 임해,
취미이기도 한 칠보의 특기를 살려 서울 칠보 연구소를 설립해,
자작의 칠보 외에도 책이나 회화를 판매하거나
이씨 조선의 궁중 의상을 가져

온 세상을 날아다녀 왕조 의상 쇼를 개최하는 등 하고 자금을 모으는 옆,
지적 장해아 시설의

「명휘원」이라고 지적 장해 양호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한다.
이 공적이 인정되어

쇼와 56년(1981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모란 훈장」이 수여되었다.
헤세이 원년(1989년) 4월 30일 서거, 향년 87.
장의는 개정전의 법령에 따라, 한국 황태자왕비 준국장으로서 거행해져
일본에서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황태자 부부가 참례했다.
후에 한국 국민 훈장근상(훈일등)이 추증되었다.

 


大正天皇と韓国皇太子

大正天皇

 

 

 

 韓国語を勉強した天皇
 
 

忘暮楼が大正天皇ファンになってしまった理由は、
人民にいかめしく君臨した父親・明治天皇への反発かと思われるほどの
自由奔放、万事簡略、活発多弁な生き方だけではない。
実は、『大正天皇』(原武史著 朝日選書)によると、
元気者の嘉仁(大正天皇)は韓国語に並々ならぬ関心を寄せていたらしい。
韓国語を勉強した天皇はこの人だけではないだろうか。

となると、ほっとけない。

韓国語に関心をもったきっかけは、

伊藤博文の権謀術数で押しつけられた韓国旅行である。
この旅行で、27歳の嘉仁(のちの大正天皇)が

李王の長男である10歳のかわいい李垠(イウン)に

親密感を抱いたのである。
この坊やと話したいばかりに韓国語を勉強し始める。

嘉仁がこのときソウルで李垠(イウン)に会ったとき、
さっそく

「通訳を務めた秘書官に対して、韓国語につき質問してい」

たそうだ。

 

翌年李垠(イウン)が東京に留学してくると、
嘉仁(28)は翻訳官に

『たびたび韓太子に会うから少し朝鮮語を稽古してみたいが、
何か本はあるまいか。
あれば侍従まで届けてもらいたい』

と頼んでいる。

 

また、李垠(イウン)に会ったときは、
あとで翻訳官に
『今日の話の文句を朝鮮語の諺文(ハングル文字)で書いて、

それに発音と訳文を付けて差し出すように』
と命じたという。


忘暮楼の経験からいってもこれは相当にはまっているぞ。

話は十数年後に飛ぶが、
牧野伸顕内務大臣の刻銘な日記には次の事実が記載されている。

1921年、大正天皇(42歳)の病状は悪化していた。
意識もはっきりないことが少なくなかった。
8月に、李王世子・李垠(イウン 23、4歳)が、
前年結婚した方子の両親・梨下宮夫妻とともに天皇を見舞った。

天皇は、李垠(イウン)を彼の幼少のころから知っていたし、
「ご自分朝鮮語を話すとの兼ねての御抱負もあり」、
かつ、18歳も年下だから遠慮も要らないということで

その来訪をずいぶん待ち望んでいたそうだ。

しかし、李垠(イウン)が8月19日に訪ねてきたときは
「御思出しなきか、言葉の出ざりしか」、
大正天皇は彼に一言も言葉をかけることがなかった。

 

この記述には、四日後の日記に補足がある。

「8月19日の記事に李王・世子拝謁の時に

御言葉なかりし事に認(したた)めたるが、
その後、海江田侍従の話に、御上(おかみ)より

何か解しがたき御言葉を御発しなりたるよし。
多分朝鮮語のつもりにて御話なりたるものならんとの推測なり。」
嘉仁の韓国語歴は十数年に及んだわけである。

 

嘉仁の皇太子時代および天皇時代は、
日露戦争、韓国の植民地化、3・1独立運動と、
最も忌まわしい日韓関係の出発から完成の時代であった。
この歴史の流れの意味は嘉仁もよくわかっていたはずだ。
だから、嘉仁の弁護をすることなどはできそうもない。
しかし、そんな中で、きっと欲得抜きで、
ただただ李垠(イウン)との会話を楽しみにして

韓国語を勉強した嘉仁を思うと、
おろかな忘暮楼はつい涙ぐんでしまうのだ。

http://mamo.huu.cc/bd00112.htm 

 

 


 

 

 


韓国皇太子を招いて
次ぎは、明治31年、皇太子30歳。
葉山の御用邸に韓国の皇太子を招かれて、
梅見をされた時の詩。

 

葉山南園与      葉山南園にて  

韓国皇太子同看梅   韓国皇太子と同[とも]に梅を看る
不管春寒飛雪斜    管せず 春寒飛雪斜なるに
喜君来訪暫停車    喜ぶ 君来訪して暫く車を停むるを
葉山歓会興何尽    葉山の歓会 興何ぞ尽きん
共賞園梅幾樹花    共に賞す 園梅幾樹の花

 

この詩は日韓併合の2年前、韓国皇太子は日本に留学しており、
当時12歳。その後もずっと日本で教育を受け、
梨本の宮の王女と結婚、陸軍中将まで上られた。

この作品を見ると、併合前夜で明治政府がお膳立てしたのか知らないが、
純粋に韓国皇太子をお招きして喜ばれた心情がよく出ていて、
政治の色合いなど感じさせない、良い詩だと思う。

http://www.zen-kanshiren.com/article/project/lecture/33.html

 

 

 

 

李方子

(り まさこ、イ・バンジャ、Lee Bangja 1901年11月4日 - 1989年4月30日)は、
日本の皇族。旧大韓帝国の元皇太子で日本の李王となった李垠の妃。

昭和20年(1945年)8月15日の終戦により、

王公族の身分を喪失して一在日韓国人となった李垠は、
韓国の初代大統領李承晩により帰国を妨げられ
(帰国によって王政復古がなされ

自分の地位が脅かされると考えたと言われる)


昭和35年(1960年)に脳梗塞で倒れる。

李承晩退陣後の昭和38年(1963年)、
朴正熙大統領の計らいで夫妻はようやく帰国を果たす。

昭和45年(1970年)、李垠逝去。

 

韓国に帰化した方子は、

知的障害児、肢体不自由児の援護活動に取り組み、
趣味でもあった七宝焼の特技を生かしソウル七宝研究所を設立し、
自作の七宝焼の他にも書や絵画を販売したり、
李氏朝鮮の宮中衣装を持って

世界中を飛び回り王朝衣装ショーを開催する等して資金を集める傍ら、
知的障害児施設の

「明暉園」と知的障害養護学校である「慈恵学校」を設立する。
この功績が認められ、

昭和56年(1981年)には韓国政府から「牡丹勲章」が授与された。
平成元年(1989年)4月30日逝去、享年87。
葬儀は旧令に従い、韓国皇太子妃の準国葬として執り行われ、
日本からは三笠宮崇仁親王夫妻が参列した。
後に韓国国民勲章槿賞(勲一等)を追贈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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