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쉽게 말한다면 공립교육 기관인 향교와 다른 사립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겠는데 향교와 같이 교육기능과 함께 종교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는 건축이다.
서원의 발생에 대해 당시 조선사회의 이해가 필요하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성리학적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삼은 士林이라는 집단이 정치 주도권을 잡는 16세기 중반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리학자들의 물질관은 節儉의 정신으로 건축물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불교와는 달리 최소의 기능과 필요를 충족시키면 되었기 때문에 서원은 화려함과 장식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의 입지는 향촌사회와 가까우면서도 지방수령과 관학인 향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곳, 학문과 마음을 수양할 수 있는 조용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 그리고 그 서원의 사당에 모시는 인물과 연고가 있는 곳에 위치한다.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은 안동 하회마을 사이에 산을 두고 떨어져 위치하고 있는데 1613년에 설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지금의 총리직책이었던 류성룡(1542~1607)을 모시고 있는데 건축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산서원의 입지는 앞에 강이 흐르고 하얗고 넓은 백사장이 있고 건너편에는 절벽이 있고 병풍처럼 퍼져있는 屛山이 위치한다. 서원이 앉아있는 곳은 花山이 시작되는 곳으로 약간 기울어진 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건물로만 본다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없고 그렇게 수준이 높을 것도 없다. 병산서원의 진정한 가치는 누각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그 경치들을 마당 안으로 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건물과 건물들, 건물과 외부 공간의 자연스런 조직과 집합적인 효과에 있다.
중심건물인 입교당의 마루 위에 앉으면 만대루는 외부경관의 시각적 틀로 기능하여 흘러가는 강은 수직으로 7칸으로 나뉘어 병풍과도 같은 경치를 선사하며 수평으로 나뉘어 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움직임, 강의 흐름, 산의 우뚝한 모습이 독자화되어 드러난다.
서원은 크게 나누면 강당群, 사당群, 廚所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강당군은 공부하는 곳으로 북쪽에는 교수의 방으로 사용되고 講會가 이루어지는 立敎堂이 있고 동쪽에는 상급생의 기숙사, 서쪽에는 하급생의 기숙사인 東,西齋, 엄격한 수련의 이완장소이자 또는 여름철의 교육장소인 누각이 자리한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텅비어 있어 주요 기능이 없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다. 휴식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밖에서 벌어지는 사당패의 공연에는 객석이 되기도 하고 교육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강당에서 바라보는 시각적 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냥 공허한 건물이지만 자연과 인공과의 관계 속에서 비어있음으로 가득 찰 수 있는 그릇이다.
서원 안에서 가장 북쪽 높은 곳에는 사당이 위치한다. 17세기는 예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로 서원이 엄격한 좌우대칭과 중심축을 고수하는 건축유형을 만들었지만 병산서원은 서쪽의 강당과 동쪽의 廚所를 드나드는 마당 북쪽에 사당을 만들어 강당군과 廚所를 연결하는 공간인 동시에 제사 때에는 의례용 공간이 된다.
강당군과 사당군, 廚所, 이 세 영역은 각자 대칭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 중심축은 각자 평행을 이루지 않고 미묘하게 오므라져 최종지향점은 뒤쪽의 花山에서 이루어진다. 영역群끼리 대칭적인 부분들을 비대칭적으로 집합시켰다는 점은 집합이 곧 건축인 병산서원의 특징을 보여준다.
도동서원(道東書院)
1605년에 설립하였고 조선 사림파의 최초 순교자라고 할 수 있는 김굉필(1453~1504)을 모신 서원이다. 김굉필은 禮의 실현과 道의 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였고 戊午士禍 때에 희생을 당하였다. 설립자는 증손자인 정구인데 이 인물도 예와 질서를 상당히 중요시 생각했던 인물이다. 서원이름도 道가 동쪽으로 왔다고 道東書院이다. 이런 사상은 건축에서도 드러난다.
이 서원의 중요한 건물은 중심축 위에 배열되며 그 중심축은 돌로 된 길과 조각들로 되어 더욱 강조된다. 도동서원은 엄격한 질서와 규범으로 조직된 건축물로서 그 건축적 표현은 통일성, 위계성, 대칭성으로 드러난다.
비탈에 위치하여 석단을 쌓아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위치하며 아래의 강당영역 안에서의 중심의 강당은 가장 크고 돌로 된 기단도 높고 장식적으로 쌓았다. 좌우로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훨씬 작은 東齋와 西齋가 위치하며 건물들이 위계화된 모습으로 규모와 격식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대부분의 건물은 엄숙한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으로 통일되어 있다.
강당 바로 뒤에는 사당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있다. 도동서원에서는 이런 좁은 돌길이 중심에 위치해 가장 신성한 사당까지 이어진다.
앞의 병산서원은 강당의 동쪽에 사당의 문이 위치해 제사에서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도동서원은 강당 바로 뒤에 붙어 여유공간도 그렇게 남지않고 이 좁은 길을 따라 유생들이 서열에 따라 일렬로 차례대로 올라가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능성은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나누어 교육기능과 종교기능이라 할 수 있는데 사당은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단청을 하고 엄숙한 공간으로 가장 중시된다.
서원의 입지조건 중에 하나는 서원 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적 대상, 즉 案對였는데 도동서원은 앞으로는 좌우로 강이 흐르고 강 너머로는 약간의 평지가 있고 평지 너머로는 산이 솟아있다. 이상적인 자연환경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불편함에도 도동서원은 일부러 북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관념화하여 방위체계를 재조직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건축은 그 사회를 담는 그릇이다.
書院は易しく言ったら公立教育機関である郷校と違う私立教育機関と言えるのに郷校と一緒に教育機能とともに宗教機能も一緒に持っている建築だ.
書院の発生に対して当時朝鮮社会の理解が必要だが簡単に言わば性理学的世界の具現を目標にした 士林という集団が政治主導権を取る 16世紀中盤から始まる.
性理学者たちの物質観は 節倹の精神で建築物自体を信仰の対象とした仏教とは違い最小の機能と必要を満たせば良かったから書院は派手さと飾りとは距離が遠い姿をしている.
書院の着るのは郷村社会と近いながらも地方受領と官学である郷校とどの位距離を置く所, 学問科心を修養することができる静かで自然景観がすぐれた所, そしてその書院の祠堂に仕える人物と軟膏がある所に位する.
屏山書院(屏山書院)
屏山書院は安東河回村の間に山を置いて落ちて位しているのに 1613年に設立された. 壬辰の乱の時の今の総理職責だったリュソングリョング(1542‾1607)を仕えているのに建築する人々の関心を受けている所でもある.
屏山書院の着るのは前に川が流れて白くて広い白砂浜があって向う側には絶壁があって屏風のように広がっている 屏山が位する. 書院が座っている所は 花山が始まる所でちょっと傾いた坂に位している.
書院建物にだけ見たら国家文化財に指定されたこともなくてそのように水準が高いこともない. 屏山書院の真正な価値は樓閣という装置を利用してその景色たちを庭先の中に劇的に引き入れているし建物と建物, 建物と外部空間の自然な組職と集合的な效果にある.
中心建物である入校当たりの床の上に座れば万代塁は外部景観の視覚的フレームに機能して流れる川は垂直で 7間で分けられて屏風とも同じ景色をプレゼントして水平で分けられて大門に入って来る人の動き, 講義流れ, 山のにょっきりした姿が読者化されて現われる.
書院は大きく分ければ講堂群, 死当たり群, 廚所 三つの領域で構成される. この中で講堂君は勉強する所で北には教授の部屋に使われて 講会の成り立つ 立教堂があって東には上級生の寮, 西の方にはジュニアの寮である 東,西斎, 厳格な修練の緩み出し場所と同時にまたは夏季の教育場所である樓閣が位置する.
屏山書院の万代塁はがらんと空いていてください機能がないことが存在の理由だ. 休息ができたり外で起るサダングペの公演には客席になったり教育の場所になったり講堂で眺める視覚的装置の役目をしたりする. そのまま空虚な建物だが自然と人工との関係の中で空いていることでいっぱいになることができる器だ.
書院の内で一番北高い所には祠堂が位する. 17世紀は礼学が絶頂に達した酸っぱいことに書院が厳格な左右対称と中心軸を固守する建築類型を作ったが屏山書院は西の方の講堂と東の 廚所を出入りする庭先北に祠堂を作って講堂君と 廚所を連結する空間である同時に祭祀の時には儀礼用空間になる.
講堂君と祠堂君, 廚所, この三つの領域は各各対称されて独自の領域を持っているのに中心軸は各各平行を成さないで微妙にすぼんで最終志向店は裏側の 花山で成り立つ. 領域群どうし対称的な部分たちを非対称的に集合させたという点は集合がすなわち建築である屏山書院の特徴を見せてくれる.
ドドングソワン(道東書院)
1605年に設立したし朝鮮士林派の最初殉教者と言える金宏弼(1453‾1504)を仕えた書院だ. 金宏弼は 礼の実現と 道の実現を最高の価値だと思ったし 戊午士禍 の時に犠牲にあった. 設立者は曽孫子である庭球なのにこの人物もはいと秩序をよほど重要視思った人物だ. 書院名前も 道が東に来たと 道東書院だ. こんな思想は建築でも現われる.
この書院の重要な建物は中心軸の上に配列されてその中心軸は石になった道と彫りたちになってもっと強調される. ドドングソワンは厳格な秩序と規範に組職された建築物としてその建築的表現は統一性, 位階性, 対称性で現われる.
坂に位して石段を積んで一番高い所に祠堂が位して下の講堂領域中での中心の講堂は一番大きくて石になった気団も高くて飾り的に積んだ. 左右では相対的に大きさがずっと小さな 東斎と 西斎が位して建物が位階化された姿で規模と格式で差が現われる.
大部分の建物は厳肅な感じを与えるマッベ屋根に統一されている.
講堂すぐ後には祠堂に上がる狭い階段がある. ドドングソワンではこんな狭いドルギルが中心に位して一番神聖な祠堂までつながる.
前の屏山書院は講堂の東に祠堂の門が位して祭祀で待機することができる空間があったがドドングソワンは講堂すぐ後に付いて余裕空間もそれほど残らないでこの狭い道に付いて儒生たちが序列によって一列で順番どおり上がって祠堂で祭祀を執り行なった. 機能性はあまり重視されなかった.
書院の機能は大きく分けて教育機能と宗教機能と言えるのに祠堂は書院で一番重要な所だから丹青をして厳肅な空間に一番重視される.
書院の立地條件の中に一つは書院内で眺めることができる視覚的対象, すなわち 案対だったがドドングソワンはこれからは左右で川が流れて川越しでは少しの平地があって平地越しでは山が湧いている. 理想的な自然環境はどの所にでも存在するのではないから機能的に不便さにもドドングソワンはわざわざ北向をしている.
これは人間を中心に観念化して防衛体系を再組織したからだ. このように建築はその社会を盛る器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