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역사 기록을 짜집기하여 즐겁게 노는 모습들을 볼 때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일제강점기 대대적인 관개시설을 전하여 줬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이 자랑하는 선진 수차가 왜 설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못하는 우매한 백성들이다
세종실록을 통해 灌漑施設用 水車에 대한 진실을 밝혀 본다.

日本人たちの歴史歪曲は、昨日今日のことではない。
歴史の記録を挂(け)継ぎして、楽しく遊ぶ姿を見ているとき恻隐一つの心がする。
日本植民地時代大々的な灌漑設備を伝えてくれたと主張しながら、
日本が誇る先進水車がなぜ設置されないだろうかの基本的な考え方はできないオメハン民である
世宗実録で灌漑施设用水車についての真実を明らかに見る。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3일(을해) 5번째기사
通信使朴瑞生具可行事件以啓:
日本農人, 有設水車, 斡水灌田者, 使學生金愼, 審其造車之法。 其車爲水所乘, 自能回轉, 挹而注之, 與我國昔年所造之車因人力, 而注之者異矣, 但可置於急水, 不可置於漫水也。 水砧亦然。 臣竊料之, 雖漫水, 使人踏而升之, 則亦可灌注矣。 今略造其形以獻, 乞於各官可置之處, 依此造作, 以助灌漑之利。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시행할 만한 일들을 갖추어 아뢰기를
일본 농민에게 수차(水車)를 설비하여 물을 퍼 돌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학생(學生)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그 수차를 만든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수침(水砧)1431) 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世宗 49卷, 12年(1430 庚戌 / 명 선덕(宣德) 5年) 9月 27日(乙丑) 5번째기사
傳旨戶曹:
 本國人民, 但知堤堰之利, 不知水車灌漑之益, 遇旱失農, 誠可憐憫。 其令各道監司, 放可置水車之處, 以今所頒水車, 依樣製造, 監司以時考察, 每當殿最, 幷錄勤慢, 以憑黜陟
 
世宗 52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5月 17日(庚辰) 6번째기사
知印李克剛啓: “臣到鐵原、水原, 觀排設水車之狀, 機械皆具。 令人激水, 隨卽滲漏, 不得灌漑。” 上御思政殿, 引見知申事安崇善曰: “太宗時禹希烈, 以監築堤堰爲己任, 不避衆責, 太宗稱之。 厥後所築堤防, 頗多不實, 然可用灌漑處亦多, 民受其利。 今於國家事, 夙夜盡心者蓋寡, 良可嘆也。 水車之設, 本以備旱, 奉行官吏, 皆不用心, 排置沙石之地, 以至無用, 甚爲不當。 上自中國, 下至倭邦, 皆受水車之利, 豈於我國, 獨不能行, 予之拳拳於此, 匪棘其欲, 視民利耳。 予欲必收成効, 宜選可任此事者, 分遣各道。” 遂遣敬差官前護軍李韞于京畿、江原、咸吉道, 前署令吳致善于忠淸、全羅道, 經歷朴絜于慶尙道, 護軍趙昆于平安、黃海道。
 世宗 54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11月 18日(己卯) 3번째기사
戶曹啓: “水車監造官手本內, 倭水車, 若於田未盡乾時用之, 則二人一日之役, 可灌數畝之田, 宜移文各道, 預備造車之材, 令匠人指導造作, 竝就陂澤, 習激水之狀, 使農民樂用。 唐水車, 亦竝造作, 外方匠人有能傳習, 利於灌漑者, 令監司考其實效, 啓聞賞功。” 從之。


호조에서 아뢰기를,
 
“수차 감조관(水車監造官)의 수본(手本) 가운데에, ‘만약 전답(田畓)이 다 마르지 않은 때에 왜수차(倭水車)를 쓴다면, 2인이 하루 동안의 역사(役事)로서 여러 무(畝)의 전답을 관개(灌漑)할 수가 있다. ’고 하였으니, 마땅히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미리 수차(水車) 만들 재목을 준비하게 하여 장인(匠人)들에게 만들도록하고, 아울러 둑[陂澤]에 나아가서 세찬 수세(水勢)를 익히게 하여 농민으로 하여금 즐겨 쓰도록 하고, 당수차(唐水車)1776) 도 아울러 만들도록 하고, 외방의 장인들이 능히 전해 익혀서 관개하는 데 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에게 그 실제의 효과를 상고하여 계문해서 그 공을 상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54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12月 25日(丙辰) 4번째기사
 工曹啓: “倭水車及唐水車造作匠人, 請於京畿、忠淸道幷一名, 全羅、慶尙道幷一名發遣。” 從之。
공조에서 아뢰기를,
 “왜수차와 당수차(唐水車)1790) 를 만드는 장인을 경기도와 충청도에 모두 1명을, 전라도와 경상도에 모두 1명을 뽑아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60卷, 15年(1433 癸丑 / 명 선덕(宣德) 8年) 4月 8日(辛卯) 2번째기사
初, 朴瑞生奉使日本回還, 極言水車之利, 上信之, 都承旨安崇善亦獻議以爲可行, 上顧左承旨金宗瑞曰: “爾意何如?” 對曰: “前此禹希烈多作水車, 行之數年, 竟不見其利而罷之, 臣意恐未可也。” 上曰: “中國及倭邦皆利其用, 我國介在其間, 安有不可用之理? 但行之者不用力, 或未得其要耳。” 對曰: “本國土(姓)〔性〕麤疎, 泉水汚下, 雖百倍其功, 一日所灌, 不過一畝, 而功輟則滲漏, 臣親見其狀。” 上曰: “大抵人情, 憚於新作。” 卽分遣敬差官于各道, 多置水車, 久無其效, 上疑之。 至是, 令宦寺田吉洪, 置水車於行宮近處, 役百人激之, 一日所灌, 止一畝, 而亦盡滲漏。 又令崇善往觀之, 崇善啓曰: “宗瑞終始皆言不可用, 請與俱行, 詰其利害。” 命許之。 俱往, 役八十餘人終日激之, 所灌不及一畝, 而皆滲漏。 崇善等回啓其狀, 命扈從宰相議之, 皆曰: “不可用。” 卽命還各道敬差官, 其水車藉人力者皆罷之, 唯自激水車不罷。

처음에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수차(水車)의 이익을 역설하였다. 임금도 이것을 믿었고, 도승지 안숭선도 건의하여 행함직 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좌승지 김종서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뜻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에 우희열(禹希烈)이 수차를 많이 만들어서 수년 동안 써 보았으나 마침내 이익을 보지 못하여 파하고 말았으니, 신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두 이용하는데 우리 나라는 그 사이에 있으면서 어찌 쓰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힘을 쓰지 않았거나, 혹은 그 요령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본국은 토질이 나쁘고 샘물이 낮아서, 백배나 공력을 들여도 하루에 물 대는 것은 1무(畝)에 불과하고, 〈수차를〉 그치면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데, 신이 그 상황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 새로 만드는 것을 꺼리는구나.”
 
하고, 곧 경차관(敬差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수차를 많이 설치하였으나, 오래도록 효력이 없어 임금이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환시(宦侍) 전길홍(田吉洪)을 시켜서 수차를 행궁 근처에 설치하고, 사람 백명을 써서 물을 올려도 하루의 물 대는 것이 1무에 그치고, 또한 물이 다 새어버렸다. 또 숭선을 보내었더니, 숭선이 아뢰기를,
 
“종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쓸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함께 가서 그 이해(利害)를 따지게 하여 주소서.”
 
하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니 〈종서와〉 함께 가서 80여 명의 사람을 써서 종일 물을 올려도, 물 대는 것이 1무에도 미치지 못하고, 물이 모두 새었으므로, 숭선 등이 돌아와서 그 상황을 아뢰었다. 호종(扈從)하는 재상들에게 의논하여도 모두 쓸 수 없다고 하므로, 곧 각도 경차관을 돌아오게 하고 인력으로 돌리는 수차는 모두 없애고, 스스로 도는 수차는 없애지 말도록 하였다.

 

世宗46巻、11年(1429己酉/人宣徳(宣德)4年)12月3日
朴瑞生が実施済みのものを備えアルェギを
日本の農家への水車を調節して、水をファー回して田畑に寄せる者がいることに、学生 金愼に同様、その水車を作成法を探究したところ、その水車が水に乗って自然に回転しながら水をファー上げて向かっていて、私たちの国では、過去に作られた水車は、人材(人力)に水を挙げるのとは違うが、ちょうど力強いが強いところには、インストール済みや、力強いが遅いところにインストー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水砧(1431)もまたしかしハヨトウニ、臣が静かに考えてみると、にもかかわらず、力強いがヌリドもの人が足で踏んで水を上げるには、また、水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ようです。これで、簡単にそれらのモデルを作成して捧げので、各郡にインストール済みのところ、このモデルに基づいて作成して、灌漑の便利に助けるようにハソソ。

世宗60卷、15年(1433癸丑/人宣徳(宣德)8年)4月8日(辛卯)
最初に 朴瑞生が日本に使臣として行ったが戻ってきて、水車の利益を力説した。王もこれを信じ、都承旨安崇善も 提案して... 、王が左承旨 金宗瑞を巡りなどを、
”君の意味はどうなのか。”
 
”禹希烈が水車をたくさん作って数年の間、文字を見たが、最終的には利益を見ないれずパハゴてしまったのウニ、臣は良くないができないと考えています。”
 
している。王が話すことを、
”中国と倭国では、すべて使用するために私たちの国は、その中にありながら、どうして書き込みができない市川のだろうか。ただし、これを使用している人々が力を書いていないか、あるいはそのコツを知っているはずだ。”
 
ハニー、応答することを、
 
”本国には土質が悪く、川の水が低く、百倍の力を投入しても 1日に水を挙げることは1畝に過ぎないし、”水車を”陥没、水の土地の中に染みこんで行くのに、臣が彼の状態を直接してみました”。
 
している。王が話すことを、
  “普通の人々は両方とも新規に作成することを気にするんだな。”
やがて敬差官の各道に分けて送信して水車をたくさんインストールしましたが
長く効果がなく、王が疑われた。この時に至り、宦侍 田吉洪をさせて水車を行宮の近くに設置して、人々の百人を使いて水を上げても、一日の水を挙げることが 1畝に過ぎない、また、水も漏れてしまった。また、安崇善を送ったけれど、安崇善が 報告する、
 
” 金宗瑞は最初から最後まで使うことがないと言って、一緒に行って、その利害を調査することにしてください。”
 
ので、王がこれを許可なので 金宗瑞と一緒に行って80人余りの人々を使いて1日中水を上げても、水を挙げることが1畝を及ぼすことができず、水がすべて リークされて、安崇善が戻ってきて、その状態を報告した 。扈从の宰相に相談しても、すべて使くことがないので、すぐに各道 敬差官に戻るようにして人力で回る水車は、すべて排除し、自分で回る水車は、保存するようにした。


 

 

 



日本人たちの妄想と歪曲-水車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역사 기록을 짜집기하여 즐겁게 노는 모습들을 볼 때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일제강점기 대대적인 관개시설을 전하여 줬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이 자랑하는 선진 수차가 왜 설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못하는 우매한 백성들이다
세종실록을 통해 灌漑施設用 水車에 대한 진실을 밝혀 본다.

日本人たちの歴史歪曲は、昨日今日のことではない。
歴史の記録を挂(け)継ぎして、楽しく遊ぶ姿を見ているとき恻隐一つの心がする。
日本植民地時代大々的な灌漑設備を伝えてくれたと主張しながら、
日本が誇る先進水車がなぜ設置されないだろうかの基本的な考え方はできないオメハン民である
世宗実録で灌漑施设用水車についての真実を明らかに見る。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3일(을해) 5번째기사
通信使朴瑞生具可行事件以啓:
日本農人, 有設水車, 斡水灌田者, 使學生金愼, 審其造車之法。 其車爲水所乘, 自能回轉, 挹而注之, 與我國昔年所造之車因人力, 而注之者異矣, 但可置於急水, 不可置於漫水也。 水砧亦然。 臣竊料之, 雖漫水, 使人踏而升之, 則亦可灌注矣。 今略造其形以獻, 乞於各官可置之處, 依此造作, 以助灌漑之利。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시행할 만한 일들을 갖추어 아뢰기를
일본 농민에게 수차(水車)를 설비하여 물을 퍼 돌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학생(學生)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그 수차를 만든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수침(水砧)1431) 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世宗 49卷, 12年(1430 庚戌 / 명 선덕(宣德) 5年) 9月 27日(乙丑) 5번째기사
傳旨戶曹:
 本國人民, 但知堤堰之利, 不知水車灌漑之益, 遇旱失農, 誠可憐憫。 其令各道監司, 放可置水車之處, 以今所頒水車, 依樣製造, 監司以時考察, 每當殿最, 幷錄勤慢, 以憑黜陟
 
世宗 52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5月 17日(庚辰) 6번째기사
知印李克剛啓: “臣到鐵原、水原, 觀排設水車之狀, 機械皆具。 令人激水, 隨卽滲漏, 不得灌漑。” 上御思政殿, 引見知申事安崇善曰: “太宗時禹希烈, 以監築堤堰爲己任, 不避衆責, 太宗稱之。 厥後所築堤防, 頗多不實, 然可用灌漑處亦多, 民受其利。 今於國家事, 夙夜盡心者蓋寡, 良可嘆也。 水車之設, 本以備旱, 奉行官吏, 皆不用心, 排置沙石之地, 以至無用, 甚爲不當。 上自中國, 下至倭邦, 皆受水車之利, 豈於我國, 獨不能行, 予之拳拳於此, 匪棘其欲, 視民利耳。 予欲必收成効, 宜選可任此事者, 分遣各道。” 遂遣敬差官前護軍李韞于京畿、江原、咸吉道, 前署令吳致善于忠淸、全羅道, 經歷朴絜于慶尙道, 護軍趙昆于平安、黃海道。
 世宗 54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11月 18日(己卯) 3번째기사
戶曹啓: “水車監造官手本內, 倭水車, 若於田未盡乾時用之, 則二人一日之役, 可灌數畝之田, 宜移文各道, 預備造車之材, 令匠人指導造作, 竝就陂澤, 習激水之狀, 使農民樂用。 唐水車, 亦竝造作, 外方匠人有能傳習, 利於灌漑者, 令監司考其實效, 啓聞賞功。” 從之。


호조에서 아뢰기를,
 
“수차 감조관(水車監造官)의 수본(手本) 가운데에, ‘만약 전답(田畓)이 다 마르지 않은 때에 왜수차(倭水車)를 쓴다면, 2인이 하루 동안의 역사(役事)로서 여러 무(畝)의 전답을 관개(灌漑)할 수가 있다. ’고 하였으니, 마땅히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미리 수차(水車) 만들 재목을 준비하게 하여 장인(匠人)들에게 만들도록하고, 아울러 둑[陂澤]에 나아가서 세찬 수세(水勢)를 익히게 하여 농민으로 하여금 즐겨 쓰도록 하고, 당수차(唐水車)1776) 도 아울러 만들도록 하고, 외방의 장인들이 능히 전해 익혀서 관개하는 데 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에게 그 실제의 효과를 상고하여 계문해서 그 공을 상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54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12月 25日(丙辰) 4번째기사
 工曹啓: “倭水車及唐水車造作匠人, 請於京畿、忠淸道幷一名, 全羅、慶尙道幷一名發遣。” 從之。
공조에서 아뢰기를,
 “왜수차와 당수차(唐水車)1790) 를 만드는 장인을 경기도와 충청도에 모두 1명을, 전라도와 경상도에 모두 1명을 뽑아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60卷, 15年(1433 癸丑 / 명 선덕(宣德) 8年) 4月 8日(辛卯) 2번째기사
初, 朴瑞生奉使日本回還, 極言水車之利, 上信之, 都承旨安崇善亦獻議以爲可行, 上顧左承旨金宗瑞曰: “爾意何如?” 對曰: “前此禹希烈多作水車, 行之數年, 竟不見其利而罷之, 臣意恐未可也。” 上曰: “中國及倭邦皆利其用, 我國介在其間, 安有不可用之理? 但行之者不用力, 或未得其要耳。” 對曰: “本國土(姓)〔性〕麤疎, 泉水汚下, 雖百倍其功, 一日所灌, 不過一畝, 而功輟則滲漏, 臣親見其狀。” 上曰: “大抵人情, 憚於新作。” 卽分遣敬差官于各道, 多置水車, 久無其效, 上疑之。 至是, 令宦寺田吉洪, 置水車於行宮近處, 役百人激之, 一日所灌, 止一畝, 而亦盡滲漏。 又令崇善往觀之, 崇善啓曰: “宗瑞終始皆言不可用, 請與俱行, 詰其利害。” 命許之。 俱往, 役八十餘人終日激之, 所灌不及一畝, 而皆滲漏。 崇善等回啓其狀, 命扈從宰相議之, 皆曰: “不可用。” 卽命還各道敬差官, 其水車藉人力者皆罷之, 唯自激水車不罷。

처음에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수차(水車)의 이익을 역설하였다. 임금도 이것을 믿었고, 도승지 안숭선도 건의하여 행함직 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좌승지 김종서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뜻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에 우희열(禹希烈)이 수차를 많이 만들어서 수년 동안 써 보았으나 마침내 이익을 보지 못하여 파하고 말았으니, 신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과 왜국에서는 모두 이용하는데 우리 나라는 그 사이에 있으면서 어찌 쓰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힘을 쓰지 않았거나, 혹은 그 요령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본국은 토질이 나쁘고 샘물이 낮아서, 백배나 공력을 들여도 하루에 물 대는 것은 1무(畝)에 불과하고, 〈수차를〉 그치면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데, 신이 그 상황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 새로 만드는 것을 꺼리는구나.”
 
하고, 곧 경차관(敬差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수차를 많이 설치하였으나, 오래도록 효력이 없어 임금이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환시(宦侍) 전길홍(田吉洪)을 시켜서 수차를 행궁 근처에 설치하고, 사람 백명을 써서 물을 올려도 하루의 물 대는 것이 1무에 그치고, 또한 물이 다 새어버렸다. 또 숭선을 보내었더니, 숭선이 아뢰기를,
 
“종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쓸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함께 가서 그 이해(利害)를 따지게 하여 주소서.”
 
하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니 〈종서와〉 함께 가서 80여 명의 사람을 써서 종일 물을 올려도, 물 대는 것이 1무에도 미치지 못하고, 물이 모두 새었으므로, 숭선 등이 돌아와서 그 상황을 아뢰었다. 호종(扈從)하는 재상들에게 의논하여도 모두 쓸 수 없다고 하므로, 곧 각도 경차관을 돌아오게 하고 인력으로 돌리는 수차는 모두 없애고, 스스로 도는 수차는 없애지 말도록 하였다.

 

世宗46巻、11年(1429己酉/人宣徳(宣德)4年)12月3日
朴瑞生が実施済みのものを備えアルェギを
日本の農家への水車を調節して、水をファー回して田畑に寄せる者がいることに、学生 金愼に同様、その水車を作成法を探究したところ、その水車が水に乗って自然に回転しながら水をファー上げて向かっていて、私たちの国では、過去に作られた水車は、人材(人力)に水を挙げるのとは違うが、ちょうど力強いが強いところには、インストール済みや、力強いが遅いところにインストー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水砧(1431)もまたしかしハヨトウニ、臣が静かに考えてみると、にもかかわらず、力強いがヌリドもの人が足で踏んで水を上げるには、また、水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ようです。これで、簡単にそれらのモデルを作成して捧げので、各郡にインストール済みのところ、このモデルに基づいて作成して、灌漑の便利に助けるようにハソソ。

世宗60卷、15年(1433癸丑/人宣徳(宣德)8年)4月8日(辛卯)
最初に 朴瑞生が日本に使臣として行ったが戻ってきて、水車の利益を力説した。王もこれを信じ、都承旨安崇善も 提案して... 、王が左承旨 金宗瑞を巡りなどを、
"君の意味はどうなのか。"
 
"禹希烈が水車をたくさん作って数年の間、文字を見たが、最終的には利益を見ないれずパハゴてしまったのウニ、臣は良くないができないと考えています。"
 
している。王が話すことを、
"中国と倭国では、すべて使用するために私たちの国は、その中にありながら、どうして書き込みができない市川のだろうか。ただし、これを使用している人々が力を書いていないか、あるいはそのコツを知っているはずだ。"
 
ハニー、応答することを、
 
"本国には土質が悪く、川の水が低く、百倍の力を投入しても 1日に水を挙げることは1畝に過ぎないし、"水車を"陥没、水の土地の中に染みこんで行くのに、臣が彼の状態を直接してみました"。
 
している。王が話すことを、
  "普通の人々は両方とも新規に作成することを気にするんだな。"
やがて敬差官の各道に分けて送信して水車をたくさんインストールしましたが
長く効果がなく、王が疑われた。この時に至り、宦侍 田吉洪をさせて水車を行宮の近くに設置して、人々の百人を使いて水を上げても、一日の水を挙げることが 1畝に過ぎない、また、水も漏れてしまった。また、安崇善を送ったけれど、安崇善が 報告する、
 
" 金宗瑞は最初から最後まで使うことがないと言って、一緒に行って、その利害を調査することにしてください。"
 
ので、王がこれを許可なので 金宗瑞と一緒に行って80人余りの人々を使いて1日中水を上げても、水を挙げることが1畝を及ぼすことができず、水がすべて リークされて、安崇善が戻ってきて、その状態を報告した 。扈从の宰相に相談しても、すべて使くことがないので、すぐに各道 敬差官に戻るようにして人力で回る水車は、すべて排除し、自分で回る水車は、保存するよう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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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감 pipecloud 2009-09-06 1320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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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 Wildboy 2009-09-05 3348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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