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조선 통신사는 장군의 교대나 상속인 탄생때, 막부를 축하 하기 위해서 왔다.

당시의 일본인은 「다시 한반도를 공격받으면 곤란하므로, 조선 통신사가 공물을 가져 장군의 기분을 취하러 온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조선 통신사를 「일본은 한국의 선진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이었으므로, 사절단은 외교 사절로서만 안되어,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 하는 역할을 완수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사실, 다도, 유교, 서도, 수묵화, 역, 력, 건축, 한방, 도예 등, 한반도로부터 전해져 온 것 뿐이다.


실은 한국 출병 시에 일본에 데리고 사라진 유교가나 도공은, 일본에서는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찻그릇이나 도기를 만들어 내는 도공은 오나에 의해서 보호되어 각지에 구이의 가마가 열렸다.조선 통신사가 일본 방문해, 포로의 반환을 요구했을 때, 납치되고 있는 도공의 대부분이, 일본에 머무는 것을 바랬다고 한다.조선에서는 유교 사상에 의한 신분 제도에 의해서 도공이 최하위에 자리 매김되어 노예와 같은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토쿠가와막부는, 쇄국령을 깔아 외국 문화에 접할 기회가 부족한 상황이며,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조선 통신사」의 왕래를 통해서, 해외의 문화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조선 통신사의 내방은, 확실히 「문명의 사자」라고 부르기에 어울린 것<화상>였습니다.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아카마가세키에 도착한 일행은, 아카마 신궁의 전면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해, 아미타불절과 인접절의 양사관에 이별 체재, 사절단은, 왕복과도 아카마가세키에 들러, 사관에 입관해, 쵸우슈번의 번사·번민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있습니다.통신사안에는, 뛰어난 학자나 시인·화가등의 문화인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보초의 제소설가가 밀려 들어 회를 거듭할 때 마다 성 진정한 교제가 깊어졌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것
 당시의 조선은 일본에 비해 훨씬 더 선진국이었다.일본은 쇄국 상태로, 세계에서 본 토쿠가와막부의 지위를 확인하는 좋을 기회였다.또, 조선 통신사중에 유교자, 의사, 화가등이 포함해 문화면에서 다대한 영향을 받았다.주자학 번성한 무렵으로, 유교나 문자를 배운 사람들은 사절단의 숙소에 책이나 획을 요구해 밀어닥쳤다.유학, 미술, 의학, 예능의 면에서 선린우호의 꽃이 벌어졌다.통신사에 연관되는 축제나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오카야마현·우시마도당자 춤추어, 미에현·진의 중국인  행렬, 기후현·오카이 춤등도 그 발자국이다.


■헌상품과 사례···막부가 소비한 총비용은?
 조선 통신사는 친서 외에 수많은 헌상품을 가지고 가고 일본에 왔다.인삼, 직물, 호피, 말, 매 등이다.한편, 막부로부터 사물로서 장도, 코가네, 뵤부등이 건네받았다.막부는 1회의 일본 방문에 조선 통신사를 위해서 소비한 비용은 100 백냥금(오늘의 600억엔) 모두 불렸다.일본측의 재정 부담이 늘어난 것으로부터 1811년에 대마도에서 맞이한 것을 마지막으로 중지되었다.


 

 

여인숙에서 숙소에 통신사가 묵으면, 과학을 배우는 사람, 음악을 가르침을 청하는 일본인이 모여, 붐비고 있었다.일본의 사람들에게는, 선진국 조선의 통신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통신사들은 우호가 깊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북의 우호 관계를 쌓아 올려 걸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자극이 있는 이벤트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오사카 소설가와의 교류 통신사일행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숙소에는 학문이나 풍아의 길을 뜻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통신사일행과의 면회를 요구했다.그 중에서도, 오사카는 다른 지방의 몇배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신유한은 써두고 있다.안에는 호위의 쓰시마번사 정원 색을 주어서까지 중개를 요구한 사람도 있던 것 같다.자작의 시의 강평을 요구하는 사람, 아이의 명명을 부탁하는 사람, 조선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듣)묻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에게 응대해, 신유한들은 해 면아침을 맞이한 것 같다.


 숙소에서의 회화는 필담으로 행해졌지만, 한문의 실력은, 역시 조선측 쪽이 현격히 위에서 만났다.조선의 공무원은 한문의 시험으로 선택되어 일상적으로 한문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무리도 없다.이것에 대해서, 일본의 관직은 모두 세습으로 정해진다.이것으로는 유능의 사가 파묻혀 무능의 사람이 제멋대로 설치지 아닌지, 라고 신유한은 강한 비판을 더하고 있다.이씨 조선은 주자학을 국교로 하고 있었다.이것은, 중국의 명왕아침을 모방한 것이었다 가, 중국에 퉁구스계의 북방민족, 만주인의 왕조인 청이 성립하고 나서는, 조선에서는 주자학의 본고장은 이쪽이라고 하는 강한 자부가 태어나고 있었다.그리고, 현실에 일본에서는, 주자학의 선진지로서 조선의 평가는 극히 높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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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サイトに説明された朝鮮通信使

 

朝鮮通信使は将軍の交代や世継ぎ誕生の際、将軍家を祝賀するためにやってきた。

当時の日本人は「再び朝鮮半島を攻撃されると困るので、朝鮮通信使が貢物を持って将軍の機嫌をとりに来る」と考えていたようだが、韓国では朝鮮通信使を「日本は韓国の先進学問を学ぶために懸命だったので、使節団は外交使節としてのみならず、先進文化を日本に伝播する役割を果たした」と位置づけている。事実、茶道、儒教、書道、水墨画、易、暦、建築、漢方、陶芸など、朝鮮半島から伝わってきたものばかりだ。


実は朝鮮出兵の際に日本に連れ去られた儒教家や陶工は、日本では手厚い待遇を受けていた。茶器や陶器をつくりだす陶工は大名によって保護され、各地に焼き物の窯が開かれた。朝鮮通信使が来日し、捕虜の返還を求めた際、拉致されている陶工の多くが、日本に留まることを望んだという。朝鮮では儒教思想による身分制度によって陶工が最下位に位置づけられ、奴隷のような労働を強いられていたからだ。

 

当時の徳川幕府は、鎖国令をしき外国文化に接する機会が乏しい状況であり、わが国の人々は、「朝鮮通信使」の往来を通じて、海外の文化に接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朝鮮通信使の来訪は、まさに「文明の使者」と呼ぶにふさわしいもの<画像>でありました。当時の資料によりますと、赤間関に着いた一行は、赤間神宮の前面の海岸から上陸し、 阿弥陀寺と引接寺の両使館に別れ滞在、使節団は、往復とも赤間関に立ち寄り、使館に入館し、長州藩の藩士・藩民から歓待を受けたとあります。通信使の中には、優れた学者や詩人・画家などの文化人が数多くいたため防長の諸文士が押し寄せ、回を重ねるごとに誠真の交わりが深ま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

 

 

■朝鮮通信使が日本に残したもの
 当時の朝鮮は日本に比べて遥かに先進国であった。日本は鎖国状態で、世界から見た徳川幕府の地位を確認するよい機会であった。また、朝鮮通信使の中に儒教者、医師、画家などが含み文化面で多大な影響を受けた。朱子学盛んな頃で、儒教や文字を習った人たちは使節団の宿に書や画を求めて押しかけた。儒学、美術、医学、芸能¥の面で善隣友好の花が開いた。通信使にちなむ祭りや地名が多く残されている。岡山県・牛窓唐子踊り、三重県・津の唐人行列、岐阜県・大垣踊りなどもその足跡である。


■献上品と謝礼・・・幕府の費やした総費用は?
 朝鮮通信使は親書の他に数々の献上品を携えて日本に来た。人参、織物、虎皮、馬、鷹などである。一方、幕府から謝物として長刀、黄金、屏風などが渡された。幕府は一回の来日で朝鮮通信使のために費やした費用は100万両(今日の600億円)とも呼ばれた。日本側の財政負担がかさんだことから1811年に対馬で迎えたのを最後に中止された。


 

 

宿場で宿に通信使が泊まると、科学を習う人、音楽を教えを乞う日本人が集まり、ごった返していた。日本の人々には、先進国朝鮮の通信使は憧れの対象であった。通信使たちは友好を深めるため、積極的に日朝の友好関係を築いて歩いたので、多くの人々には凄く刺激のあるイベントだっただろう、と思う。

 

大阪文士との交流 通信使一行の行く所ならどこでも、宿舎には学問や風雅の道を志す人々がおしかけ、通信使一行との面会を求めた。中でも、大阪は他の地方の何倍もこのような人々が多かったと申¥維翰は書き留めている。中には護衛の対馬藩士にわいろを贈ってまで取り次ぎを求めた者もいたらしい。自作の詩の講評を求める者、子どもの命名を頼む者、朝鮮事情についてあれこれ聞く者、こういった人々に応対し、申¥維翰たちはしばしば眠れぬまま朝を迎えたようである。


 宿舎での会話は筆談で行われたが、漢文の実力は、やはり朝鮮側のほうが格段に上であった。朝鮮の役人は漢文の試験で選ばれ、日常的に漢文を用いていたのだから無理もない。これに対して、日本の官職はすべて世襲で決まる。これでは有能¥の士が埋もれ、無能¥の者がのさばるではないか、と申¥維翰は強い批判を加えている。李氏朝鮮は朱子学を国教としていた。これは、中国の明王朝にならったものだったが、中国にツングース系の北方民族、満州人の王朝である清が成立してからは、朝鮮では朱子学の本場はこちらだという強い自負が生まれていた。そして、現実に日本では、朱子学の先進地として、朝鮮の評価はきわめて高か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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