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1917년 ~1945년
북간도 출생 .연희전문학교 [延世대학교 ]졸업
일본 릿쿄대학 도시샤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여 친일문학은 쓰지 않았고 .식민지 국가의 민족의 아픔이나 지식인의 고뇌 .괴로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마음을 표현한 시를 썼다
세월이 흘렀지만 영원히 20대 젊은 청년시인으로 남았습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한국인 징병을 의뢰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합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윤동주를 환송하기 위해 급우들이 송별회를 마련했고
노래를 주지 않겠는가? 라고 급우들이 청하자 .윤동주는 송별회를 마련해준 급우들의 고마움에 사양하지 않고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토 우지江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었고 .한달 후
윤동주는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 됩니다
체포 이유는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했고
한국인 징벌제도를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체포된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尹東柱
1917年 ‾1945年
北間島生まれ .延喜専門学校 [延世大学 ]卒業
日本リッキョデハックドシシャ大学で修学した
彼は日帝に抵抗して親日文学は書かなかったし .殖民誌国家の民族の痛みや知識人の苦悩 .つらい現実を乗り越えようとした心を表現した時を書いた
歳月が経ったが永遠に 20代若い青年詩人で残りました
太平洋戦争で日本は朝鮮人徴兵を依頼したし状況が悪くなると尹東柱は帰国を決心します
朝鮮に帰る尹東柱を歓送するために級友たちが送別会を用意したし
歌を与えないのか? と級友たちが 請じよう .尹東柱は送別会を用意してくれた級友たちのありがたさに遠慮しないでアリランを歌ったと言います
最後に京都牛脂江 多分加勢陸橋の上で写真を撮ったし .一月後
尹東柱は 1943年 7月14日治安維持法違反疑いで逮捕します
逮捕理由は
朝鮮独立の野望を実現するために独立意識を鼓吹させて .朝鮮学生たちに民族意識を誘発したし
朝鮮人懲罰制度を批判したということです
逮捕した尹東柱は
福岡刑務所で残酷な拷問で死亡し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