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도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최근 여덟 차례의 해전에서 계속 승리하자 일본 수군의 수뇌부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래 전략은 육군이 내륙으로 북진하는 것과 함께 수군은 남해를 돌아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육군과는 달리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와 마주치기가 무섭게 연전연패(聯戰聯敗)를 하게 되자, 일본군 장수들은 크게 당황하여 이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륙병진작전은 커녕 부산에 본거지를 둔 수군 본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이 조선 관군을 계속 격파하면서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고만장하던 히데요시는 난데없는 수군의 연패(聯敗) 보고를 받고 불같이 화를 냈다.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하고는 중국 정벌은 커녕 조선 정복도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일본 수군의 주장(主將)으로 삼아 새로운 함대를 편성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개전 초의 경상도 수군 파멸로 조선 수군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안심한 채 육상전투에 전념하고 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등 수군 장수들이 급히 부산과 웅천 등지로 내려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순신도 일본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개전 초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전황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결과 하루빨리 우리 땅 우리 바다에서 왜적(倭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적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왜군이 아무리 기세를 타고 육지에서 설치더라도 바닷길을 막으면 독 안에 든 쥐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칠인의 창[七本槍]이라 불리우는 7명의 무장(武將)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6월 5일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1천 6백여명의 군사로 조선의 하삼도 연합군 5만 병력을 대파한 위력을 보여줬던 무서운 용장이었다. 히데요시가 야스하루에게 조선 수군과의 정면대결을 맡긴 것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무기를 정비하도록 하면서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마침내 세번째 출정에 나섰다.

7월 4일 저녁, 이억기(李億祺)와 약속한대로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과 합류했다. 5일에는 군선 48척에 이르는 연합선단의 편성과 훈련을 실시하고, 전투시의 행동요령에 관한 구체적인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6일에 다시 함대를 거느리고 경상도 쪽 바다로 항진했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자 여기에서 7척의 군선을 수리하여 이끌고 온 원균(元均)이 합세했다.

이로써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의 규모는 군선만 해도 55척에 이르렀다.

7월 7일에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 항해하기 힘들었지만 함대를 출동시켜 당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식수와 연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조선 수군을 보고 급히 달려온 그 섬 주민 김천손(金千孫)이 다음돠 같이 중요한 정보를 일러바쳤다.

”왜군의 배가 중선, 소선을 합쳐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에서 나와 거제도를 지나 견내량에 이르러 머물고 있습니다.”

7월 8일, 이른 아침에 견내량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나타나자 일본 수군의 아다케후네[安宅船] 1척과 세키부네[關船] 1척이 포구에서 나와 동정을 살펴보고는 다시 포구 안으로 사라졌다. 이순신이 적선을 따라 들어가며 적군 함대가 주변 지세픞 살폈다. 적선은 아다케후네[安宅船]가 36척, 세키부네[關船]가 24척, 고바야[小早]가 13척 등 총 73척으로 김천손이 말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런데 주변 지형이 좁고, 또 연안에는 암초가 많아서 마음 놓고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곳 지세가 접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왜적(倭敵)이 형세가 불리하면 뭍으로 달아날 것이므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위치하여 적군이 달아날 곳이 없고, 혹시 뭍에 오르더라도 굶어 죽게 되겠지요.”

그리고 함대의 주력을 한산도 쪽으로 물린 다음 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 등으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 5척을 거느리고 적군 함대를 유인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판옥선 5척이 적선을 추격하자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자기네 계획에 말려든 것으로 알고 모든 배에 돛을 올리고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의 판옥선들은 슬금슬금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고, 일본 수군은 사기가 올라 앞을 다투며 넓은 바다로 뒤쫓아 나왔다.

그렇게 하여 양국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모든 군선은 뱃머리를 돌려라! 성진(成陳)하라!”

기함에서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 학익진(鶴翼陣)으로 적군 함대를 포위 공격

이순신(李舜臣)은 이어서 전 함대에 대해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도록 했다.

적군 함대가 눈앞에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전 함대를 180도 회전시켜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갖춘다는 것은 웬만큼 숙련된 함대가 아니고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위험한 전술이었다. 그런 까닭에 평소의 훈련이 실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전 함대 공격! 적선을 한 척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분멸하라!”

무사히 180도 회전으로 학익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55척의 군선으로 73척의 적군 함대를 포위한 조선 수군은 적군의 선봉 군선부터 격파하기 시작했다.

거북선이 돌격하여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을 발사하고, 승자총통(勝字銃筒)과 대완구(大碗口)에서도 불을 뿜었다.

초전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은 적군은 선봉에 선 2,3척의 전함이 깨지고 불타기 시작하자 이내 전의가 꺾이고 말았다.

뒤쪽에 선 적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도주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신이 손수 전고(戰鼓)를 치며 독전했다.

”공격을 멈추지 말라! 왜군의 대장선을 먼저 부숴라!”

일본 수군도 개전 초기 경상도 수군 진영을 장악하면서 노획한 천자총통(天字銃筒) 등의 화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주력 전함인 아다케후네[安宅船]의 선체(船體)가 화포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약했으므로 조선의 판옥선처럼 화포를 대량으로 군선에 장착할 수가 없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2층 누각의 일본군 아다케후네[安宅船]로 돌진하여 적선을 당파(撞破)하고 그 배에 있던 적장 와키사카 사베에[脇坂左兵衛]를 궁시(弓矢)로 사살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도 적선 1척을 나포하면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가신(家臣)인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과 검투(劍鬪)를 벌이다가 그 자를 쓰러뜨리고 목을 베었으며, 중부장 어영담(魚泳潭), 후부장 배홍립(裵興立) 등 역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사정없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다.

지휘관을 잃은 적선들이 한 척 두 척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맴돌다가 아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 포환이나 화살에 맞아 죽는 적병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함대가 거의 궤멸되자 진영의 후방에 있던 왜선 14척이 멀리 김해 쪽으로 무사히 도주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한산도에 상륙한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패배의 분기를 누르지 못하고 부관인 마나베 사마노죠[眞鍋左馬允]에게 할복자살을 명령했다.

이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군선 73척 가운데 42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일본 군사 5천 8백여명을 전사하게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날 날이 저물도록 적군을 소탕한 이순신의 함대는 견내량으로 이동하여 그날 밤을 지냈다.

객관적으로 열세의 전력으로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12척의 적선을 나포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순신의 전략 전술이 탁월하고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이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용감무쌍하게 잘 싸웠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에서 밤을 지샌 후 조선 수군은 그 이튿날 가덕도 쪽으로 행군했다.

그 무렵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일본 수군 신예 함대가 안골포(安骨浦)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날 해질 무렵에 “왜선 40여척이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이억기, 원균 등과 더불어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미 해가 저물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그날 밤은 거제 온천도에서 보낸 뒤, 그 다음날인 7월 10일 새벽에 안골포로 향했다.

안골포에는 아다케후네[安宅船] 21척, 세키부네[關船] 15척, 고바야[小早] 6척 등 총 42척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아무리 유인작전을 써도 이미 그런 작전에 말려들어 여러 차례 혼쭐이 난 일본 수군인지라 잘 먹혀들지 않았다.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은지라 판옥선이 제대로 돌격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여러 장수가 번갈아가며 포구 안으로 들어가 포격을 가하도록 했다. 그러자 적군도 어쩔 수 없이 응전하기 시작하여 전투가 본격화되엇다. 적군의 응전도 필사적이었지만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맹공을 퍼붓는 조선 수군의 적수는 아니었다.

종일 계속된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층각선을 비롯한 크고 작은 군선들이 하나둘씩 격침되고 숱한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죽고 바다에 빠져 죽으면서 전세가 기울어졌다.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 적장들이 야음을 틈타 잽싸게 도주해 버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적병들도 뭍으로 기어올라 저마다 살길을 찾아 달아나기에 바빴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일본 수군의 피해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협판종군기(脇坂從軍記)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의 군선 20여척이 격침되고 병사 3천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不敗の名将李舜臣(李舜臣)」6.閑山島大勝(閑山島大捷) (1)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도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최근 여덟 차례의 해전에서 계속 승리하자 일본 수군의 수뇌부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래 전략은 육군이 내륙으로 북진하는 것과 함께 수군은 남해를 돌아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육군과는 달리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와 마주치기가 무섭게 연전연패(聯戰聯敗)를 하게 되자, 일본군 장수들은 크게 당황하여 이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륙병진작전은 커녕 부산에 본거지를 둔 수군 본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이 조선 관군을 계속 격파하면서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고만장하던 히데요시는 난데없는 수군의 연패(聯敗) 보고를 받고 불같이 화를 냈다.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하고는 중국 정벌은 커녕 조선 정복도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일본 수군의 주장(主將)으로 삼아 새로운 함대를 편성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개전 초의 경상도 수군 파멸로 조선 수군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안심한 채 육상전투에 전념하고 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등 수군 장수들이 급히 부산과 웅천 등지로 내려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순신도 일본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개전 초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전황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결과 하루빨리 우리 땅 우리 바다에서 왜적(倭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적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왜군이 아무리 기세를 타고 육지에서 설치더라도 바닷길을 막으면 독 안에 든 쥐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칠인의 창[七本槍]이라 불리우는 7명의 무장(武將)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6월 5일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1천 6백여명의 군사로 조선의 하삼도 연합군 5만 병력을 대파한 위력을 보여줬던 무서운 용장이었다. 히데요시가 야스하루에게 조선 수군과의 정면대결을 맡긴 것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무기를 정비하도록 하면서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마침내 세번째 출정에 나섰다.

7월 4일 저녁, 이억기(李億祺)와 약속한대로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과 합류했다. 5일에는 군선 48척에 이르는 연합선단의 편성과 훈련을 실시하고, 전투시의 행동요령에 관한 구체적인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6일에 다시 함대를 거느리고 경상도 쪽 바다로 항진했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자 여기에서 7척의 군선을 수리하여 이끌고 온 원균(元均)이 합세했다.

이로써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의 규모는 군선만 해도 55척에 이르렀다.

7월 7일에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 항해하기 힘들었지만 함대를 출동시켜 당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식수와 연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조선 수군을 보고 급히 달려온 그 섬 주민 김천손(金千孫)이 다음돠 같이 중요한 정보를 일러바쳤다.

"왜군의 배가 중선, 소선을 합쳐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에서 나와 거제도를 지나 견내량에 이르러 머물고 있습니다."

7월 8일, 이른 아침에 견내량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나타나자 일본 수군의 아다케후네[安宅船] 1척과 세키부네[關船] 1척이 포구에서 나와 동정을 살펴보고는 다시 포구 안으로 사라졌다. 이순신이 적선을 따라 들어가며 적군 함대가 주변 지세픞 살폈다. 적선은 아다케후네[安宅船]가 36척, 세키부네[關船]가 24척, 고바야[小早]가 13척 등 총 73척으로 김천손이 말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런데 주변 지형이 좁고, 또 연안에는 암초가 많아서 마음 놓고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곳 지세가 접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왜적(倭敵)이 형세가 불리하면 뭍으로 달아날 것이므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위치하여 적군이 달아날 곳이 없고, 혹시 뭍에 오르더라도 굶어 죽게 되겠지요."

그리고 함대의 주력을 한산도 쪽으로 물린 다음 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 등으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 5척을 거느리고 적군 함대를 유인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판옥선 5척이 적선을 추격하자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자기네 계획에 말려든 것으로 알고 모든 배에 돛을 올리고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의 판옥선들은 슬금슬금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고, 일본 수군은 사기가 올라 앞을 다투며 넓은 바다로 뒤쫓아 나왔다.

그렇게 하여 양국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모든 군선은 뱃머리를 돌려라! 성진(成陳)하라!"

기함에서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 학익진(鶴翼陣)으로 적군 함대를 포위 공격

이순신(李舜臣)은 이어서 전 함대에 대해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도록 했다.

적군 함대가 눈앞에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전 함대를 180도 회전시켜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갖춘다는 것은 웬만큼 숙련된 함대가 아니고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위험한 전술이었다. 그런 까닭에 평소의 훈련이 실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전 함대 공격! 적선을 한 척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분멸하라!"

무사히 180도 회전으로 학익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55척의 군선으로 73척의 적군 함대를 포위한 조선 수군은 적군의 선봉 군선부터 격파하기 시작했다.

거북선이 돌격하여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을 발사하고, 승자총통(勝字銃筒)과 대완구(大碗口)에서도 불을 뿜었다.

초전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은 적군은 선봉에 선 2,3척의 전함이 깨지고 불타기 시작하자 이내 전의가 꺾이고 말았다.

뒤쪽에 선 적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도주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신이 손수 전고(戰鼓)를 치며 독전했다.

"공격을 멈추지 말라! 왜군의 대장선을 먼저 부숴라!"

일본 수군도 개전 초기 경상도 수군 진영을 장악하면서 노획한 천자총통(天字銃筒) 등의 화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주력 전함인 아다케후네[安宅船]의 선체(船體)가 화포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약했으므로 조선의 판옥선처럼 화포를 대량으로 군선에 장착할 수가 없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2층 누각의 일본군 아다케후네[安宅船]로 돌진하여 적선을 당파(撞破)하고 그 배에 있던 적장 와키사카 사베에[脇坂左兵衛]를 궁시(弓矢)로 사살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도 적선 1척을 나포하면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가신(家臣)인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과 검투(劍鬪)를 벌이다가 그 자를 쓰러뜨리고 목을 베었으며, 중부장 어영담(魚泳潭), 후부장 배홍립(裵興立) 등 역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사정없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다.

지휘관을 잃은 적선들이 한 척 두 척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맴돌다가 아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 포환이나 화살에 맞아 죽는 적병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함대가 거의 궤멸되자 진영의 후방에 있던 왜선 14척이 멀리 김해 쪽으로 무사히 도주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한산도에 상륙한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패배의 분기를 누르지 못하고 부관인 마나베 사마노죠[眞鍋左馬允]에게 할복자살을 명령했다.

이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군선 73척 가운데 42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일본 군사 5천 8백여명을 전사하게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날 날이 저물도록 적군을 소탕한 이순신의 함대는 견내량으로 이동하여 그날 밤을 지냈다.

객관적으로 열세의 전력으로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12척의 적선을 나포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순신의 전략 전술이 탁월하고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이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용감무쌍하게 잘 싸웠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에서 밤을 지샌 후 조선 수군은 그 이튿날 가덕도 쪽으로 행군했다.

그 무렵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일본 수군 신예 함대가 안골포(安骨浦)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날 해질 무렵에 "왜선 40여척이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이억기, 원균 등과 더불어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미 해가 저물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그날 밤은 거제 온천도에서 보낸 뒤, 그 다음날인 7월 10일 새벽에 안골포로 향했다.

안골포에는 아다케후네[安宅船] 21척, 세키부네[關船] 15척, 고바야[小早] 6척 등 총 42척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아무리 유인작전을 써도 이미 그런 작전에 말려들어 여러 차례 혼쭐이 난 일본 수군인지라 잘 먹혀들지 않았다.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은지라 판옥선이 제대로 돌격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여러 장수가 번갈아가며 포구 안으로 들어가 포격을 가하도록 했다. 그러자 적군도 어쩔 수 없이 응전하기 시작하여 전투가 본격화되엇다. 적군의 응전도 필사적이었지만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맹공을 퍼붓는 조선 수군의 적수는 아니었다.

종일 계속된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층각선을 비롯한 크고 작은 군선들이 하나둘씩 격침되고 숱한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죽고 바다에 빠져 죽으면서 전세가 기울어졌다.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 적장들이 야음을 틈타 잽싸게 도주해 버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적병들도 뭍으로 기어올라 저마다 살길을 찾아 달아나기에 바빴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일본 수군의 피해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협판종군기(脇坂從軍記)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의 군선 20여척이 격침되고 병사 3천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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